인터뷰
7월 5일.
쇠렌센은 자꾸 머리가 신경 쓰였다. 무스를 듬뿍 발라 만든 2대8 가르마가 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쇠렌센 곁엔 마찬가지로 긴장한 얼굴을 한 타이먼이 꼿꼿하게 앉아있었다. 그리고 회색 정장을 입은 페데리치가 한국에서 온 방송사의 인터뷰를 받고 있다.
"안 늦었지?"
고급 양복에 명품 시계. 얼굴은 뭘 처발랐는지 미끈하다. 얼굴만 따지면 프리미어리그에서 5위 안에 반드시 드는 제임스 체스터가 요란한 차림으로 등장했다.
여자들 시선이 제임스한테 몰리는 걸 확인한 쇠렌센은 패배감을 느꼈다. 쇠렌센이 제임스보다 부족한 건 딱 둘이다.
얼굴과 축구 실력.
'아무리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뭐 해. 타고난 얼굴과 감각을 못 따르는데.'
제임스는 브라질 국적의 어머니 덕분인지 공을 다루는 감각을 타고났다. 기본기가 부족하고 훈련에도 게으르지만 타고난 재능으로 주전 자리를 확보했다.
지난 시즌이 끝나고부터 도라익과 함께 훈련도 열심히 하고 있기에 쇠렌센이 제임스를 따라잡는 건 당분간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쇠렌센과 타이먼의 인터뷰가 짧게 끝나고 제임스 차례가 됐다.
"하하. 나랑 도우는 소울 메이트입니다. 데이터로도 명확하게 보이겠지만, 서로 도움을 기록한 골이 열 개 넘습니다."
"제길. 우리 셋 인터뷰 합친 것보다 더 길어."
셋이 예상 가능한 똑같은 질문을 받은 것과 대조되게 제임스는 질문이 훨씬 많고 다양했다. 인터뷰어의 볼에 보조개가 끊이지 않고 피는 걸 확인한 세 청년은 짙은 패배감에 휩싸였다.
"저 버터 바른 얼굴이 동양까지 먹힐 줄은 몰랐어."
별 시답잖은 제임스의 농담에도 여자들이 깔깔 웃어주는 모습에 눈꼴이 셨다. 셋은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의 잔디에선 도라익이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저놈도 만만치 않아."
가깝게 지내는 선수들을 인터뷰하는 시간에 도라익은 근육을 풀고 있었다. 카메라가 열 대 이상 동원된 인터뷰에 흥분한 셋과 달리 도라익은 덤덤하게 자기 일과를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도 정신 차리자. 인터뷰가 뭐라고."
셋은 창고 방으로 가서 양복을 벗고 훈련복으로 갈아입었다. 최경호가 빨래할 때 뭘 넣었는지 옷에서 아주 좋은 향이 났다.
옷을 갈아입은 셋은 도라익과 함께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간단한 훈련을 했다.
제임스 다음으로 최경호까지 인터뷰를 끝낸 다음 도라익 차례가 왔다. 땀을 닦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도라익은 카메라 앞에 앉아 질문을 기다렸다.
"현재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도라익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특히 거액을 기부한 것으로 연일 화제인데요. 기부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도라익은 담담하게 잭과 만났던 이야기를 풀었다.
"잭이 죽음을 입에 올리는 순간 너무 슬펐습니다. 그간 저는 비행기를 몇 번이나 탔거든요. 그런데 신나기만 했지 비행기가 추락해서 내가 죽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떠올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를 회상한 도라익은 코끝이 찡했다.
"그런데 잭은 어린 나이에도 죽음으로 사랑하는 부모와 이별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럼 도라익 선수로선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것이겠네요?"
"네. 슬프고 무서운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도울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되거든요."
인터뷰는 잔잔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도라익은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이르자 아나운서가 표정을 바꿨다.
"조금 민감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네요. 볼튼 전에 찰리 아담 선수와 페널티킥을 두고 잠깐 언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골 9개 넣었습니다. 한 골만 넣으면 10골이 되어 백만 파운드 상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페널티킥 기록이 없기도 하고요."
"특별 수당을 생각하고 페널티킥을 차려고 했다는 건가요?"
"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꽤 중요한 이유였죠."
인터뷰를 진행하던 아나운서는 흥분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이 부분을 예고편으로 내보내면 시청률이 낮을 수 없다.
"그럼 맨유와 벌인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양보한 것도 같은 이유인가요?"
"아니요. 맨유 경기에선 그런 걸 떠올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관객과 상대 선수들이 주는 압박, 맨유라는 명성이 주는 압박, 지면 강등이라는 부담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찰리 아담한테 페널티킥을 양보할 때 무슨 생각이었나요?"
"찰리 아담은 발이 350이 넘어요. 그래서 슈팅 정확도가 높습니다. 그리고 볼튼과 경기를 벌인 다음 왠지 서먹서먹해진 느낌이었어요. 그전엔 친하지 않아도 거리감은 없었거든요. 그래서 페널티킥을 양보했습니다."
"돈 생각은 요만치도 없었나요?"
아나운서가 엄지와 검지로 집게를 만들어 보이며 웃었다.
"네. 그런 생각을 떠올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도라익 선수의 어머니께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고 계시더군요.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않은 거로 압니다. 도라익 선수가 받은 돈이면 집안에 큰 보탬이 될 텐데, 조금 적게 기부할 생각은 안 해봤나요?"
"기부하기 전에 전화해서 물어봤는데요. 아버지는 알아서 하라고 하셨고 엄마는 좋은 일 하는 거라며 응원해 주셨어요."
"그때는 도라익 선수의 어머니가 갓 출산해서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돈이면 어머니가 힘겨운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는 데 전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머니도 그렇고 동생들한테도 좋은 일 아닌가요?"
"엄마가 그러셨어요. 정당한 노동으로 돈 버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라구요. 엄마는 아직 젊으시거든요. 일하는 게 즐겁다고도 하셨어요. 그리고 동생들도 자기 앞가림을 다 하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구 했어요."
"노동으로 가치를 만드는 건 즐거운 일이죠. 참으로 훌륭한 어머님을 두셨습니다. 오늘 인터뷰를 보고도 도라익 선수의 진의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얘기 해줘서 고맙습니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집에서 저녁 대접 드리고 싶은데."
곁에서 시종일관 기꺼운 미소를 짓던 최경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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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빛.
└ 같은 돈이어도 쓰임새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고작 16살도 아는 걸 난 왜 여태 몰랐을까?
└ 그간 욕했던 거 사과한다. 맨유전에서 돈 때문에 페널티킥 양보한 거라고 해도 지지한다.
└ 라익아, 창범이 형이다. 톡 읽었으면 답장 좀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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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솔직히 말해. 뭐 있지?"
맥주를 홀짝이던 최경호가 사레들렸다.
"뭐, 뭐가?"
최경호가 옷에 묻은 맥주를 닦으며 떠듬거렸다.
"계약서 사진 유출된 거. 형 짓이지?"
"어떻게 알았어?"
"형 바보야? 계약서 본 사람이 형하고 나밖에 없잖아."
"구단에서 유출됐을지도 모르잖아."
"우리 계약서야. 잉크 튄 자국이 있거든."
최경호는 그제야 자초지종을 도라익한테 설명했다.
"유니폼 판매 수익을 구단이 전부 가져가는 게 불만이어서 그랬다고? 형 또라이야?"
18세 미만 선수의 계약서에 초상권 항목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 미처 몰랐던 최경호는 초상권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래서 유니폼 판매 수익은 전부 구단 앞으로 갔다.
리그컵 우승 때 좋은 기회를 놓쳤던 최경호는 기부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도라익이 당분간은 광고 안 찍고 훈련에 전념하겠다는 말을 듣고 크게 상심했다.
그러다가 계약서를 유출해서 유니폼 판매량을 떨구고, 초상권을 삽입한 새 계약이 효력을 발생하는 7월 1일에 기부 사실을 터뜨리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그간 봐온 수전노 구단주의 고명한 수단에 자극을 받은 탓에 원래 최경호라면 떠올리지도 않았을 일을 실행에까지 옮기게 되었다.
"네가 한국에 기부한 바람에 일이 계획보다 잘 풀렸어."
그런데 최경호가 터뜨리기 전에 오태범의 전화로 기부 사실이 수면에 떠 올랐다. 덕분에 최경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파장이 컸고 도라익의 이미지에 긍정적이었다.
"그런 위험한 짓을 왜 해?"
"다 알아봤어. 계약서 유출해도 불법이 아니야. 법적으론 아무 문제 없는 일이라고."
"형은 가끔 보면 라진이 같아."
라진은 도라익의 넷째 동생이다.
"그 꼴통? 너보다 더 또라이던데."
"내 평생 최대의 수치가 형한테 또라이 취급받는 거야."
"난 또라이 짓 하더라도 다 계산이 서서 한다고. 넌 그냥 또라이잖아."
"요즘 애들 다 나만큼 해. 그리고 난 형 나이 되면 점잖은 사람 될 거야."
"네가 퍽이나."
대화가 끝나자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졌다. 최경호가 무모한 짓을 한 건 맞지만, 그게 자신을 생각해서 한 일이었음을 도라익은 안다. 마찬가지로 최경호 역시 자기 생각이 짧았음을 안다. 잘 풀렸으니 말이지 중간에 어디가 꼬였으면 도라익의 이미지만 시궁창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때 유니폼 판매 기사만 안 봤어도.'
최경호가 우연히 떠올린 생각을 충동적으로 실행한 건 도라익이 병원에 기부한 사실과 유니폼 판매량 급증 기사를 연이어 확인한 탓이 컸다.
"형. 영국 처음 왔을 때 지갑 소매치기당한 거 기억나?"
"어. 기름 넣었는데 지갑이 사라져서 네가 버스킹 하자고 했잖아."
"버스킹 하자고 한 건 형이었어."
"아니야. 네가 주유소에서 기타 발견하고 먼저 했어. 기타도 원래 네가 치기로 했는데 너무 엉망이어서 내가 쳤지."
"무슨 소리야. 형이 노래 너무 못해서잖아. 내가 기타랑 노래를 동시에 못 해서 어쩔 수 없이 형이 기타 친 거지."
음식값이 모자라서 접시 닦은 일. 타이어가 닳아 터져서 도로에서 하루 지냈던 일. 최경호가 꼬시려던 여자가 도라익에게 관심 준 일.
힘들었던 시절 추억으로 서먹서먹하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렸다.
"형, 다신 이런 일이 없어야 해. 날 위해서 형이 바르지 않은 일을 하면 내가 슬퍼."
"미안해. 형 생각이 짧았다."
- 작가의말
다리 부러진 노루끼리 한데 모이고, 또라이는 또라이에게 끌린다.
-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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