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번복
전반전은 0:0으로 끝났다. 상대적으로 노장이 많은 스토크시티가 노련한 운영을 했지만, 우승을 확정한 데다가 도라익의 은퇴 경기를 뛰게 돼서 흥분한 맨유 선수들의 활발한 움직임에 휘둘렸다.
공격이 장기인 도라유와 봉코 모두 수비하느라 스토크시티의 반격도 날카롭지 못했다.
다행히 미야코를 뺀 남은 세 수비수의 노련함과 미라클의 초특급 컨디션 덕분에 실점은 면했다.
15분 휴식 후, 맨유는 전반전 선수 그대로 출전했다.
- 어, 스토크시티 선수 교체가 있습니다.
- 도민호 선수가 출전하네요.
- 이벤트 아니었나 봅니다.
도민호는 마우루를 교체해 출전했다.
- 지금 선 위치로 봐선 도민호 선수가 공격수고 도라익 선수가 왼쪽 윙으로 뛰는 것 같습니다.
- 도라익 선수 입장에서도 윙이 편할 겁니다. 전후좌우 다 안 살펴도 되니깐요.
경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두 해설은 경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 잠시만요. 이러면 도라익 선수 프리미어리그 최연소 출전 기록이 깨지는 거 아닙니까?
- 그러네요. 은퇴 경기에서 기록 하나 사라집니다.
- 어. 지금 주장 완장이 도민호 선수 팔에 있는데요?
- 최연소 주장 기록도 깨진 건가요?
두 해설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 기분이 묘합니다.
- 도민호 선수는 10월 생일이거든요. 다음 시즌에 출전해도 두 기록이 깨지는 건 같습니다.
- 그래도 굳이 은퇴 경기에 이래야 하나 싶습니다.
- 스토크시티가 우승이라도 했으면 뭐 그러려니 할 텐데.
공을 잡은 도라익이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컨디션을 풀로 당긴 맨유 수비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도라익이 이를 살짝 악물며 상체를 골라인 쪽으로 살짝 보냈다. 집중력이 최고조에 이른 맨유 수비수 역시 몰래 무게중심을 이동했다.
- 패스입니다.
상체 페이크로 수비수를 속인 도라익은 패스로 도라유를 찾았다. 공을 잡은 도라유는 바로 드리블로 중앙으로 향했다.
득점력이 높은 선수는 아니지만, 5골 모두 아크 써클 근처에서 넣었기에 맨유 선수들이 황급히 달려 도라유의 슈팅 경로를 봉쇄했다.
- 스루패스!
중앙으로 드리블하던 도라유가 노룩 패스를 찔렀다. 공을 받은 건 코와 입과 턱은 도라익을 닯고 눈과 눈썹은 엘을 닮은 도민호였다.
- 골! 골입니다!
날쌔게 침투해 공을 받은 도민호는 접근하는 맨유 수비수를 팔을 뻗어 거부하며 왼발로 가볍게 슛했다.
다급히 가까운 포스트로 움직이던 키퍼가 급히 몸을 던져 손으로 공을 막으려 했지만, 공은 정확히 먼 포스트를 스치며 골이 되었다.
골을 넣은 도민호는 달려가 도라유 등에 업혔다.
- 잠시만요. 도라익 선수 리그 최연소 골 기록도 깨지네요.
- 이게 기뻐하기도 그렇고, 안 기뻐하기도 그렇고.
- 방금 도민호 선수 순간 속도가 시속 25km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 순발력이 도라익 선수를 닮았네요.
- 방금 슈팅 자세도 바르사에서 뛸 때 도라익 선수랑 비슷합니다.
- 참. 조금 늦었지만, 도라유 선수 10도움 축하드립니다.
- 다들 알다시피 도라유 선수는 도라익 선수를 따라 영국을 뺀 네 나라를 계속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축구 스타일에 혼란이 생겼다고 하네요.
- 이번 시즌 도라익 선수의 가르침을 받아 자기 스타일을 찾아서 다행입니다.
한 골 먹은 맨유는 라인을 올리고 매섭게 몰아붙였다. 도라익의 체력이나 스피드가 예전 같지 않은 것도 있지만, 맨유의 센터백이 육상 선수 출신으로서 최근 100미터를 10.7초로 끊은 적도 있다.
전성기의 도라익이어도 드리블하면서 맨유 센터백을 떨구는 건 무리다.
- 도라익 선수 스미스를 도와 수비합니다.
- 스미스 선수 새내기 시절에도 도라익 선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 기술이나 경험뿐이 아니라 프로 선수로서의 마음가짐을 많이 배웠다고 최근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 그때 도라익 선수도 20대 초반이었는데요.
- 타고난 겁니다. 인품도, 재능도, 노력도, 얼굴도.
협동 수비로 공을 빼낸 도라익은 바로 콜린스에게 패스했다.
30대가 되면서 활동 범위가 준 콜린스지만, 센터백치고는 여전히 넓게 뛰는 선수다.
- 마르친이 공을 받아 지킵니다.
- 봉코가 접근합니다.
- 봉코 공 받아 드리블합니다.
맨유 선수가 발을 뻗어 공을 건드렸다. 봉코는 기민하게 발을 뻗어 자신의 제어를 벗어난 공을 발바닥으로 힘껏 찼다.
- 유연성 좋네요.
- 도라유 선수가 공 잡았습니다.
공을 잡은 도라유가 왼발로 공을 부드럽게 밀었다.
- 도라유 선수도 왼발을 잘 쓰네요.
- 아까 미처 얘기 못 했는데, 왼발로 골 넣은 도민호 선수도 오른손잡이입니다.
도민호와 맨유의 빠른 센터백, 그리고 키퍼가 동시에 공을 향해 달렸다.
- 키퍼 멈춥니다.
몇 걸음 달린 키퍼는 아니다 싶은 마음에 급정지했다. 자신이 공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달렸는데, 회전이 별로 없는 도라유가 찌른 공이 점점 속도를 죽였다.
- 도민호 선수, 빠릅니다.
두 선수는 공을 향해 달리면서 서로 밀었다. 그런데 아직 만 16세까지 반년 정도 남은 도민호가 힘에서 전혀 안 밀렸다.
물론, 이기지도 못했지만.
- 가속합니다!
비슷하게 달리던 둘이었지만, 공과 가까워지자 거리가 벌어졌다. 빠르게 달리던 상황에 한 번 더 가속한 도민호가 먼저 공을 건드렸다.
- 또 가속!
도라익의 축구를 보며 자란 도민호기에 공을 건드린 다음 또 한 번 가속했다. 허탈한 마음이 든 맨유 센터백은 다리에 힘이 풀리며 혼자 넘어졌다.
- 스텝 오버!
- 키퍼 제칩니다.
- 골! 골입니다.
- 도민호 선수, 사랑합니다.
호나우두가 와도 엄지손가락을 뽑을 완벽한 스텝 오버였다. 도민호의 무게중심 이동에 따라 몸을 좌우로 흔들던 키퍼가 맥없이 쓰러졌고, 손쉽게 돌파한 도민호가 공을 가볍게 밀어 골에 성공했다.
- 도라익 선수도 비슷한 골 넣은 적 있지 않나요?
- 700골 넘게 넣었는데 뭐 비슷한 게 하나 정도 있겠죠.
- 고작 7백 골이에요? 천 골 정도 되지 않나요?
골을 넣은 도민호는 달려가 도라익 등에 업혔다.
- 잠시만요. 도라익 선수 최연소 멀티 골 기록도 깨진 거네요.
- 이젠 그냥 기뻐합시다. 도라익 선수가 저렇게 좋아하잖아요.
자기보다 더 크고 무거운 아들을 업은 도라익의 얼굴엔 기쁨이 넘실댔다.
- 그래요. 차라리 응원합시다. 이런 은퇴식도 나쁘지 않습니다.
- 역시 도라익답다고 할까요.
맨유는 선수 2명을 교체해 반전을 꾀했다. 그러나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네이선과 콜린스나 스미스 모두 프리미어리그에서 십수 년 버틴 선수들이다.
게다가 미친 컨디션의 미라클이 있어 심리적 안정감이 있기에 맨유의 다양한 공격 루트에 흔들림 없이 대처했다.
- 도민호 선수 공 잡고 드리블합니다.
- 등만 보면 도라익 선순 줄 알겠습니다.
- 체형이 정말 비슷한데, 기술 동작도 거의 똑같습니다.
플리플랩으로 수비수를 속인 도민호가 골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속도 빠른 센터백이 곧 따라붙었다.
급정지한 도민호는 도라유에게 패스했다. 맨유 선수의 압박을 떨쳐내지 못한 도라유는 공 받으러 가까이 온 도라익 대신 스미스에게 패스했다.
스미스가 공을 몰고 올라왔다. 도라익이 센터백과 풀백 사이에 위치를 잡고 도라유가 근처에서 맴돌며 맨유 선수들을 짜증 나게 했다.
느린 드리블로 전진하던 스미스가 공을 툭 쳐서 도라익에게 줬다. 도라익은 패스하고 앞으로 달린 스미스에게 원투로 밀어줄 것처럼 하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크로스를 올렸다.
- 도민호 선수!
- 헤딩!
- 들갑니다.
- 골이에요.
- 해트트릭입니다. 도민호 선수가 데뷔전에 맨유 상대로 해트트릭을 달성합니다.
- 기록 또 깨졌네요.
- 갑자기 모 평론이 생각나네요.
- 혹시 포차 하다가 거하게 말아먹은 그분?
- 네. 도라익 선수가 찰리한테 페널티킥을 양보했을 때 16세 나이에 맨유 상대로 해트트릭을 하는 선수는 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거라고 했던 그분.
-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도민호 선수 지금 15세입니다.
- 다음 시즌에 맨유 상대로 해트트릭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도라익 선수도 같은 팀 상대로 해트트릭 9번 해서 기네스북에 올랐는데요.
두 해설은 라리가의 모 불행한 팀을 위해 잠깐 묵념했다.
- 처음엔 도라익 선수의 기록이 깨지는 데 조금 불만이었는데요. 지금 생각하니 이처럼 완벽한 은퇴 경기가 또 있겠나 싶습니다.
- 내가 은퇴하는 경기에서 아들이 내 기록을 깨고 새로운 기록 주인이 되는 것. 꿈 같은 일 아닙니까?
- 재벌들도 그래서 기를 쓰고 회사를 자식한테 물려주려고 하나 봅니다.
- 비유가 좀 그렇지만, 뭐 의미는 통하네요.
3:0이 되고 맨유가 좀 더 조심스럽게 경기를 운영했다. 아직 16세도 안 된 선수한테 해트트릭을 당했는데, 침투와 반격 그리고 헤딩으로 다양하게 골을 먹었다.
은퇴하는 도라익을 훌륭하게 수비하며 들떴던 마음이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에 맞춰 스토크시티도 템포를 적절히 늦추고, 교체를 진행했다.
코디를 내리고 미드필더 한 명 올린 다음, 도라익과 도민호의 투톱을 결성해 4-3-3을 4-4-2로 바꿨다.
- 샘 클루카스 감독이 수첩에 뭘 계속 적네요.
- 도민호 선수가 골 넣는 조건으로 중학교 숙제를 감독이 대신해주는 게 아닌지 싶습니다.
- 스토크시티 감독은 참 어렵네요. 축구도 잘해야 하고 중학교 수학도 잘해야 하니깐요.
- 인수분해랑 근의 공식만 알아도 중학교 수학은 반 먹고 들어가는 겁니다.
- 그래서 강 해설 중학교 때 수학 성적은 어떻게 됐나요?
- 도라익 선수 공 잡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팬이 늘었다. 비록 월드컵 경기가 남았다곤 하지만, 리그에서 도라익이 뛰는 모습은 더는 라이브로 볼 수 없다.
- 선수 그 이상의 무언가인 도라익입니다.
- 88분이면 도라익 선수를 교체한다고 했거든요. 이제 3분 남았습니다.
봉코와 마르친과 공을 주고받던 도라유가 갑자기 앞으로 찔렀다.
공격수는 도라익과 도민호뿐이고, 수비수는 4명이나 되어 공격하기 적합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공을 받은 도민호가 밖으로 드리블했다. 선수 두 명이 협동 수비를 펼쳐 골대 쪽으로 향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 페이크를 주고 몸을 돌립니다.
- 플리플랩!
연속 세 번 플리플랩을 펼친 도민호가 골라인 쪽으로 공을 툭 친 다음 크로스를 올렸다.
도라익이 점프했다. 예전처럼 높지 않았고, 위로 솟는 속도도 예전처럼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점프 자체가 더없이 자연스럽고, 고개를 돌리는 모습도 더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 골! 도라익 골! 리그 20골 달성합니다.
- 한 시즌에 20골씩 넣는 선수가 왜 은퇴합니까.
- 그러게 말입니다. 동생이랑 아들이랑 몇 시즌 더 뛰었으면 좋겠습니다.
- 음. 도민호 선수 지금 3골 1도움 기록한 거 맞죠?
- 익숙한 데이터네요.
- 아버지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아닌가 싶습니다.
경기 88분. 도라익이 교체되었다.
도라익은 경기장의 모든 선수는 물론, 스토크시티와 맨유 벤치의 선수와 스텝 모두와 포옹했다.
하나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 강철민 해설 그만 우세요. 경기 안 끝났어요.
- 제 경기는 이미 끝났습니다.
- 그래도 마지막 해설은 끝까지 하셔야죠.
- 네?
- 해설 은퇴한다고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 안 했는데요.
- 다 녹화됐습니다.
- 아니요. 방금 2시간 전으로 돌아가 제 입을 꼬맸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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