쐐기를 박다
멕시코는 15분 쉬는 동안 멘탈을 잡고 후반전 전술을 숙지하고 나왔다. 그런데 한국팀이 컵대회의 금기라고 할 수 있는 포메이션 변형을 들고나오자 큰 혼란에 빠졌다.
얼핏 4-5-1로 보이지만, 1인 박창식이 오히려 윙인 이혁신보다 위치가 더 낮다. 전반전에 윙으로 뛰던 선수가 풀백에 갔고, 도라익 역시 왼쪽 수비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연히 전반전의 한국팀으로 상정하고 전술을 세운 멕시코는 선수들 생각이 조금씩 어긋나면서 패스워크가 삐걱거렸다.
"형!"
박창식의 백 패스를 받은 고명준이 머리도 안 들고 긴 패스를 때렸다. 컨디션이 좋아선지 집중력이 살아선지, 고명준의 패스는 거의 최고속으로 달리는 도라익 앞에 정확히 떨어졌다.
- 멋진 퍼스트 터치입니다.
- 트래핑과 드리블이 동시에 이뤄졌죠.
도라익은 속도를 거의 줄이지 않은 채 공이 그라운드에 떨어지기 전에 건드렸다. 도라익이 건드린 공은 정확히 도라익이 달리는 방향으로 적당한 속도로 굴러갔다.
- 도라익 선수 중앙으로 컷합니다.
어느새 달려온 박창식이 콘카의 머릿속을 뒤집었다. 콘카는 도라익을 수비하러 가자니 박창식이 걱정이고, 박창식을 수비하자니 도라익을 단독으로 수비해야 할 4번 센터백이 걱정이었다.
콘카는 4번과 자신 그리고 이혁신을 수비하는 5번의 거리를 가늠한 후, 조금 도라익과 가까운 곳으로 가며 손짓으로 5번에게 좀 더 중앙으로 오라고 지시했다.
콘카의 예측대로 4번은 도라익의 플리플랩에 몸이 굳어 돌파당했다. 그러나 도라익은 콘카의 예상과 달리 골라인 쪽이 아닌 중앙으로 드리블했다.
골라인으로 돌파하면 콘카가 달려가서 패스를 방해할 생각이었고, 4번이 박창식에게 가는 패스를 방해하면 된다.
만약 4번이 방해하기 어려우면 5번이 알아서 이혁신을 버리고 박창식을 수비하러 가면 실점 가능성을 최소로 낮출 수 있다.
그런데 도라익이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콘카가 원하는 대로 골라인으로 가지 않았다.
"측면 버려!"
5번에게 이혁신을 버리고 박창식을 수비하라고 지시하며 콘카는 도라익을 향해 달려갔다. 굳은 몸이 금세 풀린 4번도 몸을 돌려 도라익을 쫓았다.
중앙으로 드리블하던 도라익이 공을 뒤로 치면서 패스 각을 만들었다. 콘카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도라익에게 빠르게 접근해 칩 킥으로 이혁신에게 패스하는 걸 방해했다.
도라익은 미리 준비했다는 듯이 아주 부드럽게 오른발로 공을 자기 뒤로 끌어왔다. 이어서 왼발 아웃사이드로 공을 툭 치며 몸을 돌려 오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급히 접근한 콘카는 물론, 도라익을 쫓던 4번마저 역동작에 걸려 왼쪽으로 향하는 도라익을 방해하지 못했다.
도라익은 금세 공을 따라잡아 골라인 쪽으로 툭 쳤다. 5번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뒤로 달렸다.
도라익은 왼발 인사이드로 5번보다 뒤에 있는 이혁신에게 패스해도 되고, 45도 각으로 백 패스해서 박창식에게 줘도 된다.
현재 콘카와 4번 모두 도라익의 패스를 방해하기 어려운 위치기에 수비의 중임은 5번의 어깨에 걸렸다.
도라익이 앞에 수비수도 없는 상황에 왼발로 플리플랩을 펼쳤다. 도라익의 플리플랩은 이상한 마력이 있었다. 멕시코의 키퍼와 5번 모두 복잡하던 생각이 갑자기 사라졌다.
플리플랩으로 리듬을 조절한 도라익은 바로 오른발을 들어 먼 포스트를 노려 땅볼 슛을 때렸다.
가까운 코스를 지킬 수밖에 없었던 키퍼가 비록 다리를 뻗었으나 조금 늦었다. 이혁신과 박창식에게 향하는 패스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던 5번 역시 도라익의 슛을 방해하기엔 거리가 멀었다.
- 어, 도라익 선수 여전히 세리머니를 안 합니다.
- 이게 무슨 일인가요? 해트트릭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인가요?
- 4골로 앞섰다고 선수들이 해이해질까 봐 일부러 안 하는 게 아닐까요?
- 속이 깊은 도라익 선수라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후반 72분.
공격을 서두르던 자타가 터치 실수로 공을 조금 길게 찼다. 제임스의 수제자 오창범이 잽싸게 몸을 날려 발끝으로 공을 건드렸다.
협동 수비를 하던 고명준이 오창범이 살짝 건드린 공을 잡고 바로 앞으로 찼다.
이혁신이 오른팔을 들어 멕시코 수비수의 접근을 방해하며 고명준이 찬 공을 잡았다.
박창식이 패스받으러 달려갔다. 콘카는 후반전 첫 실점 이후 계속 도라익과 가깝게 있었기에 4번이 박창식을 방해하러 달려갔다.
이혁신이 공을 뒤로 툭 친 다음 앞으로 달렸다. 박창식은 고민하지 않고 바로 앞으로 찔렀다.
다행히 이혁신이 더 빨랐다. 멕시코의 풀백도 느린 선수는 아닌데, 지쳐서 평소 속도를 내지 못했다.
공을 잡은 이혁신은 불편함을 참고 앞으로 드리블했다. 왼발 선수이기에 컷인이 더 편하다. 그러나 상대 골대와 거리가 멀어서 아직 컷인을 고민할 시기가 아니다.
그때 도라익과 박창식의 외침이 들렸다. 이혁신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허리에 힘을 줬다.
이혁신이 드리블하며 느려진 틈을 타 다가온 멕시코 풀백이 슬라이딩 태클을 펼쳤다. 현재 공격수와 수비수의 숫자가 같기에 혹여 실점할까 봐 옐로카드를 각오하고 백태클을 펼친 것이다.
이혁신은 허리에 이어 허벅지에도 힘을 줬다. 덕분에 상대 태클에 다리를 차였지만, 부상은 없었다.
"주심, 이거 레드카드 아닙니까?"
도라익이 얼굴을 가린 채 잔디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이혁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연기인 거 티 나."
안타깝게도 영어가 별로인 이혁신은 주심이 이미 간파한 줄도 모르고 여전히 몰입했다.
- 사실 크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거든요.
- 키퍼에 수비수가 두 명이고, 공격수 역시 두 명이었어요. 박창식 선수가 달려오곤 있지만, 상대는 풀백과 센터백까지 두 명이 복귀하는 중이었어요.
- 도라익 선수의 세리머니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긴장해 오판한 거 같습니다.
- 그나저나 이혁신 선수 연기 학원 좀 다녀야겠습니다.
경기장 중앙의 대형 스크린에 손가락 사이로 눈치를 보는 자기 모습이 크게 비친 것도 모르고 이혁신은 여전히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라익아, 벤치 지시 왔어. 프리킥을 찬 다음 완전 수비로 전술 바꾼다."
"알았어요."
도라익이 왼발 키커로 서고 오창범이 오른발 키커로 섰다. 첫 득점 때와 마찬가지로 오창범이 선수들 위치를 조정하며 요란하게 굴었다.
첫 실점도 크로스가 더 어울리는 상황에 오창범의 예상을 벗어난 직접 슈팅 때문에 생겼다. 그렇기에 오른발 크로스가 더 어울리는 상황에도 멕시코 선수들은 머리가 복잡했다.
- 오창범 페이크!
- 도라익 슛!
- 골! 골입니다.
- 꿈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네 번째 골을 넣은 도라익은 한국 응원단이 모인 곳으로 가서 세리머니를 펼쳤다.
- 며칠 전에 모 평론이 칼럼을 기고했습니다.
- 누군지 알 거 같네요.
- 그 칼럼에서 모 평론은 도라익 선수의 단점을 조목조목 짚었는데요.
- 아! 어려운 일을 하셨군요. 대부분 찾다가 포기하는데 참 끈기도 좋으십니다.
- 프리킥 득점이 적은 점, 드리블로 슈팅 기회를 만들어 득점하는 능력이 부족한 점 등을 꼽았습니다.
- 스토크시티는 강팀이 아닙니다.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기 상대적으로 힘들죠. 그리고 드리블로 슈팅 기회를 만들어 득점하려면 동료들의 유력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두 명 세 명씩 우르르 와서 수비하는데 돌파한 후 득점까지 하라는 건 억지 아닌가요?
- 오늘 후반전에 드리블로 슈팅하는 능력과 프리킥으로 득점하는 능력을 증명했습니다. 고작 한 경기 아니냐고 하기엔 월드컵이라는 무대와 북미의 패자로 불리는 멕시코의 무게가 만만치 않거든요.
5골로 앞선 한국은 이혁신과 박창식을 내리고 풀백 한 명과 미드필더 한 명을 넣었다. 풀백으로 뛰던 윙은 수미와 고명준 사이에 가서 수비를 도왔고, 도라익은 여전히 윙으로 뛰면서 왼쪽 라인의 수비를 도왔다.
- 그런데 첫 경기에서 너무 많은 걸 보여주는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전반전엔 공격과 수비의 균형이 잘 잡힌 포메이션과 전술을 보여줬고, 후반전이 시작하고 반격을 극대화한 조금 괴이한 포메이션과 전술을 취했다.
지금은 수비를 극대화하고 반격은 도라익의 개인 기량에 의존하는 극단적 수비 전술을 펼쳤다.
- 제가 차 감독님의 혜안을 감히 알지 못하지만, 일부러 보여주는 거 같습니다.
- 스페인을 흔드는 건가요?
- 객관 전력만 따지면 한국팀은 스페인에 비기기도 어렵습니다. 독일과 함께 이번 월드컵 우승 후보로 점쳐지는 팀 아니겠습니까.
- 하지만 우린 디펜딩 챔피언인 독일을 2:0으로 이겼던 대한민국입니다.
- 그때 우리가 독일을 이긴 덕분에 멕시코가 16강 진출을 이뤘죠.
- 참 아이러니하네요.
- 잠깐 말이 샜네요. 차 감독님은 오늘 경기를 통해 스페인에 우린 공격과 수비의 균형이 잡힌 정상적인 플레이도 할 수 있고, 무승부를 노린 극단적 수비도 할 수 있고, 괴이한 진형으로 반격 능력을 극대화해서 너희를 이길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 겁니다.
- 스페인 입장에선 골치가 아프겠네요.
- 더구나 우승을 노리는 스페인은 현재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란 말이죠.
스페인으로선 우승을 노리기 참 좋은 상황이다.
첫 경기부터 컨디션을 끌어올리면 5번째 혹은 6번째 경기에서 컨디션 하락이 불가피하게 오며 결승 진출이 어려울 수 있다. 그렇기에 첫 상대가 콩고이고 두 번째 상대가 한국인 건 스페인에 정말 꿈 같은 시나리오다.
콩고와 한국을 적당히 상대하고 멕시코 경기부터 컨디션을 끌어올리면 토너먼트 때 최상의 경기력을 보일 수 있고, 결승전까지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팀이 첫 경기에서 예상을 깨고 멕시코를 5골로 폭격했다. 비록 순수한 실력으로 한 게 아니라 적절한 전술과 도라익이라는 전략급 무기를 잘 활용한 덕분이긴 하지만, 스페인의 시나리오와는 전혀 다른 흐름이 분명하다.
한국에 진 멕시코는 3경기에서 스페인과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경기에 콩고를 상대하는 한국이 오히려 가장 유리하다.
- 아, 자타가 결국 득점했습니다.
경기 87분. 자타가 직접 프리킥으로 득점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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