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 지나친 도발
한국팀은 공격 상황에 도라익과 이혁신이 위치를 바꿨다. 이혁신은 드리블과 돌파가 장기인 윙인데 지난 시즌부터 득점력 역시 일취월장했다.
중앙으로 간 이혁신은 고명준의 패스를 받아 현란하게 드리블했다. 도라익은 순발력과 탄탄한 기본기로 상대가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에 돌파하는 거라면, 이혁신은 공을 계속 굴리면서 상대의 반응을 보고 돌파하는 스타일이다.
"형!"
왼쪽 윙 자리로 갔던 도라익이 중앙으로 달리며 공을 요구했다. 이혁신은 페이크를 두 번 줘서 수비수가 함부로 발을 못 내밀게 한 후, 공을 사선으로 백 패스했다.
그런데 도라익이 그만 공을 발바닥 밑으로 흘렸다. 고등학교 축구부만 되어도 잘 하지 않는 실수인데, 호흡 곤란으로 집중력이 하락한 도라익이 그만 공을 놓쳤다.
도라익이 흘린 공은 이란 미드필더가 잡아 바로 앞으로 패스했다. 수비에 참여하지 않고 중앙선 근처에 대기하던 하다디가 쏜살같이 달려가 공을 잡았다.
속도가 장점이 아닌 한국의 두 센터백은 하다디를 힘겹게 쫓아갔다.
빠르게 판단을 끝낸 김춘호는 과감히 골 박스 밖으로 나왔다. 한국팀은 센터백 한 명이 하다디를 쫓고 한 명은 김춘호가 비운 골대를 향해 달려갔다.
하다디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주전을 경쟁하는 공격수답게 판단이 빨랐다. 더 지체하다간 아까운 기회를 허망하게 날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바로 칩슛으로 공격을 마무리했다.
잘 찬 칩슛은 김춘호의 머리를 넘어 골대 안에 안착했다. 골대로 달리던 센터백이 슬라이딩으로 몸을 던졌으나, 공이 이미 들어가고 난 뒤였다.
골을 넣은 하다디는 양손을 밑으로 누르는 동작을 하며 천천히 걸었다. 하다디를 향해 기쁜 얼굴로 달리던 이란 선수들이 속도를 늦추더니 역시 천천히 걸었다.
한국에선 도라익 세리머니로 알려진 침묵 세리머니를 펼친 것이다.
"귀엽네."
도라익이 중얼거렸다.
"저 털부숭이 어디가 귀여워?"
오창범이 씩씩거렸다.
팀의 기둥인 도라익이 흔들리지 않고 주장인 고명준이 잘 다독인 덕분에 한국팀은 상대의 세리머니에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주심이 휘슬을 불어 경기를 재개했다. 한국팀은 공을 잡고 느리게 패스하며 숨을 골랐다.
이십 대 초중반의 선수들은 경기 초반에 잠깐 호흡 곤란이 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고명준을 비롯한 베테랑은 아예 증상이 오지도 않았다.
도라익은 기초 체력이 출중하고 폐활량도 프로 수영선수 평균보다 높다. 그렇기에 고산 반응이 전혀 없이 잘 날뛰었는데, 첫 골을 넣을 때 무리한 바람에 간간이 숨이 가쁜 상황이다.
다행히 시간이 흘러 도라익의 호흡이 돌아왔다. 그러나 아까처럼 급격히 날뛰다가 또 숨이 가빠지는 상황이 올까 봐 자제했다.
대신 오창범과 이혁신이 활약했다.
공항에서 받은 수모 덕분에 일시적으로 각성한 오창범이 돌파에 성공해 크로스를 올렸다. 그리고 페널티 박스 안에서 박창식이 쓰러졌다.
도라익을 포함한 한국팀 선수들이 손을 들어 페널티킥을 주장했다. 그러나 주심은 양팔을 어깨높이로 든 다음 양쪽으로 활짝 펼치는 것으로 반칙이 아니라고 천명했다.
주심과 가까운 한국팀 선수들이 몰려가 항의했다.
그 틈을 타 이란이 반격했다. 터치라인을 나갈 거로 예상한 공을 이란 선수가 가까스로 잡은 덕분이다.
한국팀 선수들이 항의를 멈추고 부랴부랴 수비하러 달려갔으나 공을 잡은 하다디를 막을 사람은 김춘호만 남았다.
아까 칩슛으로 실점했지만, 김춘호는 과감히 골대를 버리고 앞으로 나왔다. 아까와 달리 두 센터백이 없기에 하다디 역시 확률이 낮은 칩슛을 시도하지 않았다.
김춘호와 일대일 상황이 된 하다디는 플리플랩을 시도했다. 그러나 도라익의 것처럼 빠르지도 않고, 호나우지뉴처럼 부드럽지도 않았다.
하다디의 실수로 틈이 생기자 김춘호가 발을 뻗어 공을 차버리려 했다.
하다디의 어설픈 플리플랩은 함정이었다. 김춘호가 한쪽 다리를 들어 공을 건드리려 하자 하다디는 바로 공을 툭 치고 옆으로 달렸다.
무게 중심을 한쪽 다리에만 둔 김춘호는 결국 하다디를 저지하지 못했다.
속임수로 김춘호를 돌파한 하다디는 드리블로 공을 골라인까지 갖고 갔다. 그러곤 골라인에 공을 세운 뒤 세리머니를 펼쳤다.
- 지나친 도발입니다.
한 손으로 강철민의 입을 틀어막은 박만호가 이를 갈며 말했다.
세리머니를 마친 하다디가 발꿈치로 공을 톡 건드려 골대에 넣었다. 관객석의 환호가 한 층 커졌다.
"아시아 최강은 우리야."
도라익을 지나치며 하다디가 말로 도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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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의 휴식 시간에 한국 선수 대부분이 진정하지 못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해서 도무지 안정을 취하며 편하게 쉴 수 없었다.
VAR에 불복한 것과 하다디에게 카드를 줘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탓에 오히려 본인이 옐로카드 한 장 받은 차 감독 역시 분을 참지 못했다.
"후반전에 도발이 이어질 거다. 휘둘리지 말고 우리 방식대로 경기를 이끌어야 한다."
말은 옳은 말이나, 화를 참느라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하니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오늘 경기 진다고 뭐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매 경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우릴 응원하는 국민께 미안하지 않다."
감독도 코치진도 선수도 최대한 평정심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상식 밖의 도발과 주심의 대처 때문에 쉽지 않았다.
- 후반전 재개합니다.
- 하다디의 도발 행위에 주심은 경고조차 없었는데요.
- 그건 한국팀이 똑같이 돌려줘도 카드를 못 꺼낸다는 말 아닐까요?
- 도라익 선수, 아스널전에서 그저 순둥이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보여줬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도발에는 도발로 갚아줘야 합니다.
하다디의 도발로 한국팀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그러나 몇몇 선수가 이를 갈며 한없이 집중한 덕분에 오히려 전반전보다 훨씬 강한 모습이 되었다.
- 하다디가 그라운드에 앉아서 양팔을 벌리며 항의합니다. 그러나 주심은 무시합니다.
- 주심도 아까 하다디의 도발을 응징하지 않은 게 마음에 조금 걸리나 봅니다.
한국팀의 호재였다. 결정적인 순간엔 역시 이란의 편을 들 가능성이 크지만, 양심이 아주 없지는 않은지 한국팀의 웬만한 반칙은 눈감아 줬다.
- 고명준 스루패스!
도라익이 번개같이 달려가 공을 잡았다. 키퍼가 골대를 비우고 달려 나왔고 수비수 한 명이 도라익을 쫓았다. 남은 한 명은 빈 골대로 달리는 중이었다.
아까 하다디가 넣은 첫 골과 비슷한 상황이다. 위치도 오른쪽으로 같았다.
'창식이 형이 없어.'
박창식은 수비를 돕느라 패스한 고명준보다 위치를 더 내린 상황이었다.
'칩슛은 어려워.'
칩슛에 자신감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이란의 수비수가 골대에 곧 도착한다.
'일단.'
뭘 해야 할지 모를 땐 일단 변화를 줘야 한다. 그리고 변화한 상황을 먼저 파악하고 행동하는 자가 이긴다. 도라익이 알론소한테서 배운 축구 철학이다.
도라익이 멈춘 상태에서 갑자기 골라인 쪽으로 공을 치고 달렸다. 한 호흡 늦게 반응했으나 키퍼와 수비수 모두 늦지 않게 도라익이 중앙으로 드리블하는 걸 방해했다.
도라익은 팬텀 드리블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저 오른발 인사이드로 공을 왼쪽으로 치고 왼발 인사이드로 드리블 방향을 직각으로 꺾는 간단한 기술이지만, 급작스러운 리듬 변환과 방향 전환 때문에 성공률이 꽤 높다.
거기에 도라익이 빠르게 달리던 중에 완벽한 급정지를 했기에 키퍼와 수비수 둘 다 허망하게 당했다.
도라익이 왼발로 찌른 공은 키퍼와 수비수 사이로 지나갔다. 공을 먼저 보낸 도라익은 상체를 숙인 후 드릴처럼 키퍼와 수비수 사이를 파고들었다.
도라익의 급정지와 팬텀 드리블에 당한 키퍼는 중심을 잃어 허우적거리느라 아무런 방해도 못 했다. 그러나 키퍼가 앞에 있어서 어느 정도 여유를 두고 달렸던 수비수는 바로 반응해 몸을 돌려 도라익을 막으려 했다.
정면으로 막으면 페널티킥 가능성이 크기에 몸을 돌려 공을 쫓는 척하며 도라익의 전진 루트를 차단하려 한 것이다.
수비수의 대처는 도라익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공을 중앙으로 찌른 다음 바로 안으로 파고들며 유리한 위치를 잡은 도라익은 상대보다 먼저 땅을 디뎠다. 그러곤 엉덩이로 이란 수비수를 힘껏 밀었다.
최근 힙합을 즐겨 들은 덕분인지, 도라익은 힙 싸움에서 완승을 했다.
엉덩이로 비벼서 길을 낸 도라익이 놀라운 순발력으로 공을 향해 달려갔다. 이때 이란 키퍼는 끝내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고, 도라익의 진로를 방해하려던 수비수는 조금 전 키퍼가 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중심을 다시 찾으려고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문제는 마지막 수비수가 골대를 비우고 달려 나오며 공을 향해 슬라이딩 태클을 펼쳤다.
도라익의 허벅지가 부풀러 올랐다. 슬라이딩 태클을 한 이란 수비수가 급한 마음에 다리를 쭉 폈다.
- 마르세유 턴!
중계도 잊고 숨죽인 채 경기를 관람하던 강철민이 비명을 질렀다.
도라익은 수비수보다 먼저 공에 접근했다. 그러나 공을 잡고 뭘 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공을 잡으려다가 이란 수비수의 태클에 다칠 위험이 큰 상황이다.
그래서 선택한 게 마르세유 턴이었다.
도라익은 오른발을 공 위에 살포시 얹은 채 몸을 앞으로 던졌다. 공이 오른발을 따라 부드럽게 굴렀다.
이어서 도라익은 오른발로 공 앞의 잔디를 밟았다. 동시에 도라익의 왼발이 공을 누른 채 뒤로 움직였다.
골대를 오른손 편에 뒀던 도라익인데, 마르세유 턴으로 어느새 골대를 마주했다.
키퍼는 이제 겨우 몸을 일으키는 중이고, 키퍼를 돕던 수비수는 끝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슬라이딩 태클을 했던 수비수는 관성 때문에 골대와 오히려 멀어지고 있다.
완벽한 찬스였다.
도라익은 지체 없이 오른발을 휘둘러 강슛으로 공격을 마무리했다. 그러곤 꽉 쥔 오른쪽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강하게 두드렸다.
- 이게 바로 프리미어리거의 품격, 대한민국의 품격입니다.
- 우리 도라익은 훌륭한 선수이기 전에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 브라질의 레전드 펠레도 상대의 도발을 늘 골로 갚아줬다고 말했죠.
- 골을 넣는 과정 및 세리머니 과정에 어떠한 도발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선진국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품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상대의 도발을 완벽히 무시하는 신종 도발. 그러나 두 해설 모두 근질거리는 입을 잘 단속했다.
지금은 도라익의 행위를 최대한 아름답게 포장해야 함을 모를 둘이 아니었다.
- 작가의말
도(라익이)가 (무시하고) 지나친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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