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호의 도화행
프리미어리그는 2월에 휴식기가 있다. 아주 쉬는 건 아니고, 평소라면 2라운드를 진행할 기간에 1라운드 경기만 펼친다.
그리고 대부분 구단은 리그위원회의 의도에 알맞게 훈련도 쉬면서 선수들에게 휴식을 준다. 스토크시티는 대부분 구단에 속했다.
"라익아. 너 진짜 팀이 강등할까 봐 이적 안 한 거야?"
오창범이 흔들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며 질문했다.
도라익이 이적하면 오창범은 스토크시티에 홀로 남는다. 식사와 빨래는 물론 구단까지 매일이다시피 태워 주는 최경호도 함께 사라진다.
그렇기에 내심 도라익이 이적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나 자신 때문에 도라익이 더 좋은 팀에 가서 더 높은 주급을 받으며 더 대단한 선수가 될 기회를 포기할까 봐 티를 못 내고 이적에 관한 화제는 최대한 자제하며 지냈다.
2월이 되어 이적 시장이 닫힌 후에도 자기 속내를 들킬까 봐 계속 자제하다가 이제야 질문했다.
"그것도 있고. 감독이 자주 설득하기도 했어."
"알론소 감독이?"
"그래. 우리가 그간 알론소를 오해했더라고."
"무슨 오해?"
도라익은 알론소와 나눈 대화를 간략히 전했다.
사람들은 알론소가 선수 양성에 재능을 보이지만, 운영에 재능이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전술의 귀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알론소가 선수 양성에 재능이 있는 건 맞는 얘기다. 그러나 운영과 전술에 대한 평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알론소는 스토크시티의 제안을 받은 즉시 프리미어리그를 분석했고, 박싱데이를 기준으로 실력 차이에 큰 변화가 생긴다는 점을 주목했다.
아스널이나 아스톤 빌라처럼 후반기에 기세가 팍 꺾이는 팀이 있는가 하면, 스토크시티나 웨스트햄 등 후반기에 상대적으로 탄력이 붙는 팀도 있다.
별반 차이가 없는 팀도 드물게나마 있으나, 대부분 팀은 박싱데이를 계기로 확실히 변한다.
"구단 사람들은 이번 겨울에 내가 반드시 팀을 떠난다고 여겼대. 그래서 감독은 내가 없는 후반기에 대비하여 계획을 짰어."
알론소가 도라익과 찰리를 중심으로 하는 확고한 전술을 짜지 않은 이유다. 그리고 또 하나. 많은 사람이 깊이 생각지 않고 지나친 부분도 있다.
"우리 전반기에 극단적인 공격과 수비 전술을 많이 사용했잖아. 그게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래."
공격할 땐 최대한 강한 압박을 하고 수비할 땐 최대한 물러났다. 얼핏 생각하면 체력 소모가 매우 심한 전술로 여겨진다. 시즌 초반에 스토크시티가 보인 모습도 그랬다.
그러나 선수들이 어느 정도 전술에 적응하자 다른 모습이었다. 공격할 때 상대에게 반격 기회를 많이 주지 않자 급히 돌아가서 수비하는 일이 줄었다.
"지금 우리 팀은 다른 19팀보다 체력 비축이 훨씬 뛰어나."
알론소는 경기의 승패보다 선수의 부상 및 체력 관리에 더 신경을 썼다. 이는 윌슨과 다르다. 윌슨은 이길 가능성이 있는 경기에선 주전을 쉽게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알론소는 경기 결과보단 팀 전체의 체력에 더 신경을 써서 선발 명단 및 인원 교체를 결정했다.
비록 찰리와 루이스의 공백 때문에 한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고집쟁이 알론소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덕분에 12월 하순의 3연패 이후 스토크시티는 확연히 살아난 모습이었다. 아직 그 효과가 완전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3월부터 스토크시티엔 승리가 일상사가 될 예정이다.
"찰리 역할을 줄리엔이 어느 정도만 하면 난 후반기에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을 거야."
"알론소 감독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네. 천재야, 천재."
오창범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도라익은 그런 오창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면서 자기 주변 사람들을 한 번 돌이켜봤다.
최경호, 오창범, 알론소, 제임스 외 기타 등등.
"형. 왜 내 주변엔 또라이만 가득할까?"
왕 또라이가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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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익아, 형 저녁 먹고 들어가니까 시켜 먹어."
- 형, 많이 바빠?
"바쁘지. 요즘 내가 기운이 좋아."
- 이적 시즌도 끝났는데 뭐가 그렇게 바쁜데?
"형 올해 결혼할지도 몰라. 아니면 너 기다려서 합동결혼식 올릴까? 그리고 창범이한테도 전해. 형 여자친구 생기면 창범이한테 새끼 쳐준다고."
평소 전형적인 독일인이지만, 가끔은 한국에서만 쭉 자란 토종이 아닌지 의심되는 최경호다. 자주는 아니어도 도라익은 물론 마당발 오창범도 잘 모르는 한국식 표현을 써서 둘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야, 왔다. 끊어."
최경호도 181로 작은 키는 아니다. 그러나 신체 비율이 완벽에 가까운 모델과 마주 서자 왜소하게 느껴졌다.
"앉으시죠."
최경호는 매너 있게 상대 의자를 빼줬다.
"고마워요. 그런데 영어가 유창하네요?"
"독일인입니다. 유전자는 순수한 한국인이지만 말이죠."
"그렇군요. 저 독일에도 자주 갑니다."
하이힐 때문에 선키는 비슷했지만, 앉은키는 최경호가 압도했다. 덕분에 둘은 아까보다 훨씬 어울려 보였다.
"그런데 절 어떻게 알고 DM 주신 건가요?"
한 번이면 우연으로 치부하고, 두 번이면 운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2월에만 벌써 3번째로 슈퍼모델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된 최경호는 더는 우연이나 운으로 여길 수 없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여자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미소에 반한 최경호는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 중요합니다. 이렇게 미인이신 분과 함께 식사한다는 게 중요하죠."
"당신이 프로듀싱한 앨범을 들어본 적 있어요."
"진짜요? 되게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전 훌륭한 것보단 특별한 게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훌륭한 건 언제든 누군가가 찾아낼 테지만, 특별한 건 그런 보장이 없잖아요."
"맞습니다. 저랑 생각이 똑같군요."
최경호는 작곡가와 작사가에게 많은 돈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훌륭한 노래보단 특이한 노래를 찾았다. 그런 곡들은 극소수의 마니아 층에 어필할 순 있어도 대중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말이 통해서 참 기쁘네요. 대부분 남자는 대화 중에 은연히 자기 가문이나 능력 혹은 재력을 자랑하느라 바쁘거든요."
최경호라고 속물이 아닌 건 아니다. 그러나 가문이나 능력 혹은 재력이 자랑할 만한 수준이 안된다.
'이번 겨울에 이적했으면 나도 부자가 되는 건데.'
몇몇 구단이 도라익의 영입을 도우면 2천만 유로를 일시불로 준다고 약속했다. 다행히 여름에 이적하는 게 더 큰 돈이 된다는 뮐러의 설득이 먹힌 것과 도라익을 위하는 마음이 커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런던에 삽니까?"
최경호는 한번 식사하고 싶다는 DM을 받고 바로 답장으로 시간과 장소를 약속한 뒤 달리는 벤틀리에 채찍질해 런던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아니요. 일 때문에 런던에 왔어요. 집은 마드리드에 있답니다."
'뭐지? 마드리드에선 요즘 나 같은 얼굴이 먹히는 건가?'
앞서 만난 두 모델도 집이 마드리드에 있다고 했다.
최경호는 모델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첫 모델보단 두 번째 모델이 훨씬 말이 통했고, 세 번째 모델은 소꿉친구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둘째 이름은 뭐로 하지?'
모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최경호는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미안해요. 새벽 비행기로 떠나야 해서 짐 정리하러 호텔로 가야 해요."
화장실에서 돌아온 모델이 급하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렇군요. 제 차로 태워다 드릴까요?"
"아닙니다. 매니저가 차 갖고 왔어요."
최경호는 아쉬운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모델이 우아한 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강한 남자의 상징인 방광 크기를 강조하느라 식사 내내 자리에서 단 한 번도 일어서지 않은 탓이다.
고급 식당이라 좌변기밖에 없었다. 최경호는 문이 열린 곳으로 뛰어 들어간 후, 바로 변기에 앉았다.
꾹꾹 억눌렸던 것이 폭포수처럼 시원하게 분출되었다.
"보스. 매리가 실패했습니다."
갑자기 옆 칸에서 통화가 들렸다.
"아니요. 그 에이전트가 싫다고 한 건 아니고, 매리가 싫답니다."
최경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최경호의 직업도 에이전트지만, 에이전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킹스맨이나 007과 같은 세계 평화를 수호하는 영웅이다.
갑자기 나타난 복면의 사내들이 글록을 뽑아 007을 향해 사격한다. 멋지게 몸을 날려 탁자 뒤로 몸을 숨긴 007이 어디선가 꺼낸 총으로 응사한다.
백발백중, 일발일살. 검은 복면의 사내를 모조리 제거한 007은 아름다운 식사 상대에게 윙크한 후, 창문을 깨고 현장을 이탈한다.
늘 그렇듯이 뒤늦게 AK 47을 들고 나타난 영국 경찰. 그러나 이번엔 반전이 있었다. 검은 복면과 한 통속인 영국 경찰들이 목격자를 제거한다며 AK 47로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다.
퍼뜩 정신을 차린 최경호는 황급히 전화기를 매너 모드로 전환했다. 괜히 엿들은 게 들키면 살인멸구 당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볼일이 끝났음에도 감히 일어서지 못했다. 일어서면 변기가 자동으로 물을 내릴 것이고, 바로 옆칸에서 통화하는 수상한 남자한테 들켜버린다.
"얼굴이 정말 별로라고 합니다. 매리가 동양인이랑 사귄 적이 있다고 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잠깐. 방금 나랑 만났던 모델 이름도 매리였던 거 같은데?'
여자 이름 매리, 동양인, 에이전트. 얼굴이 별로.
'에이, 아니겠지. 매리가 얼마나 흔한 이름인데.'
"켄티도 그렇고 이바나도 그렇고. 다들 얼굴 때문에 싫다고 합니다. 돈을 아무리 더 준다고 해도 거절합니다."
그때, 최경호의 전화기에 알람이 떴다.
[생각할수록 미안해서 이렇게 용기 내서 말씀드립니다. 사실 저는 의뢰를 받고 의도적으로 당신에게 접근했습니다. 대화 중에 당신이 정말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는 속일 수 없었습니다.]
매리가 보낸 DM이었다.
[사실 전 당신 앨범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제가 한 대부분 얘기는 당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당신을 마드리드에서 살고 싶게 하라는 의뢰를 받았고, 구체적인 의도가 뭔지는 전혀 모릅니다.]
최경호는 더는 부정하지 못하고 소리를 죽여 흐느꼈다.
그때 전화기가 또 부르르 떨렸다. 최경호는 눈물을 훔치고 DM을 확인했다. 그런데 새로운 내용은 없고 대신 기존에 남긴 DM이 어느새 삭제됐다.
'뭐지?'
이번 DM은 매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최경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화면을 클릭했다.
[최경호 씨. 안녕하세요. 제가 이틀 뒤에 런던에 가는데 시간 되시면 식사 한 끼 괜찮을까요?]
'이것들이 선을 넘네?'
화가 난 최경호는 답장에 욕을 잔뜩 썼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욕설을 다 지운 다음, 내용을 정중하게 꾸몄다.
[최근 일이 많아 몸을 빼기 어렵습니다. 미안합니다.]
답장을 보낸 최경호는 전화기 화면을 끄고 품에 넣었다. 상심한 나머지 상대가 한글로 DM을 보냈다는 사실, 그리고 상대 SNS 이름이 오연화라는 실명을 사용했음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 작가의말
이번 편은 최경호에 관한 정보가 조금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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