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급 해독
후반전이 시작하고 5분 동안 팔레르모는 맹공을 펼쳤다. 그러나 5분 이후에는 다시 빗장을 걸었다. 앞엔 속도만 엄청 빠른 흑인 선수 한 명을 세우고 남은 열 명은 페널티 박스 안에 머물렀다.
- 페어린던의 크로스!
- 팔레르모 수비수가 헤딩합니다.
- 흘러나온 공을 잡은 산체스. 바로 슛!
안에 양 팀 선수로 바글바글하여 슈팅 경로가 마땅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높이 차야 하는데, 조금만 힘 조절이 미숙해도 공이 크로스바 위로 떴다.
'먼저 움직였어. 보고 움직이는 게 아니야.'
도라익은 찰리가 페어린던의 크로스를 잘 받았던 비법을 조금 알 것 같았다. 페어린던이 돌파에 성공함과 동시에 찰리는 몸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페어린던이 크로스를 올리려는 순간 위치를 미리 정했고 점프 시기는 조금 빨랐다.
'찰리가 나보다 동작이 굼뜨다고 리듬이 느린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안 거였어.'
도라익은 왜 클루카스가 찰리의 헤딩이 절대적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크로스에 한정해서 찰리의 리듬은 누구보다 빨랐다. 찰리를 상대하는 수비수들은 아마 도라익의 순발력을 상대할 때처럼 당혹스러울 것이다.
'나도 해보자.'
공격 기회를 잡고 라인을 올렸던 팔레르모는 공을 빼앗기고 차근차근 물러섰다. 그 모습은 마치 잘 훈련된 군대 같았다.
공이 돌고 돌아 다시 페어린던한테 갔다. 상대적으로 느린 맥자넷의 크로스는 수비가 용이하여 스토크시티의 공격은 주로 오른쪽에 집중됐다.
체력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뛰는 제임스가 지원했다. 페어린던은 제임스가 원투 패스로 찔러준 공을 멈추지 않고 바로 크로스를 올렸다.
페어린던이 오른발을 드는 순간, 도라익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빠르게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수비하는 센터백을 엉덩이로 힘껏 밀었다.
공이 페어린던의 발을 떠나는 순간 도라익이 점프했다. 센터백이 앞으로 미는 힘까지 이용하여 여태껏 뛰어본 적 없는 높이로 올라갔다.
빠르고 낮아 평평하게 느껴지는 평소와 달리, 상대의 강한 압박 때문에 서두르느라 다소 높은 페어린던의 크로스가 어느새 눈앞에 왔다. 도라익은 눈을 부릅뜬 채 머리를 세게 털었다.
- 골입니다. 도라익 선수 헤딩으로 득점합니다.
- 놀랍습니다. 크로스바보다 훨씬 높이 점프했죠?
착지한 도라익은 눈을 감고 입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흥분한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달려와서 팔과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지만, 도라익은 여전히 자기만의 세계에 빠졌다.
"뭐 하는 거야?"
"외우고 있어. 페어린던의 리듬을."
크로스 준비를 할 때부터 공을 찰 때까지의 시간, 공이 골대 앞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 크로스가 최고점에 이르는 시간.
방금 도라익은 공이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헤딩했다. 헤딩 기술이 조금 서투르지만, 최고점에 이르러 공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상황이기에 정확히 도라익이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 있었다.
'헤딩은 최고점 이후에 하는 게 좋아.'
최고점으로 향하는 공을 헤딩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걸 쉽게 하기에 찰리의 헤딩 위력이 남다른 것이다. 헤딩이 미숙한 도라익은 최고점을 지난 공을 노리는 게 좋다.
'찰리의 헤딩 타이밍은 수비하는 사람도 괴롭다.'
찰리는 다소 평평한 페어린던의 공을 최고점에 가기도 전에 헤딩한다. 익숙지 않은 타이밍이어서 수비수들이 미리 염두에 두더라도 제때 반응하기 힘들다.
찰리 역시 매번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성공하기만 하면 골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축구 하기 잘했어.'
모르던 걸 알아갈수록 축구가 점점 재밌게 느껴졌다.
1:1 동점이 되자 팔레르모 선수들이 잠깐 혼란을 느꼈다. 그러나 벤치 사인을 받고 언제 그랬나시피 빗장 수비를 고수했다.
팔레르모는 70분 잠그고 마지막 20분에 승부를 보는 전술이다. 70분 이후엔 공격을 잘하는 팀보다는 실수를 덜 하는 팀이 유리하다.
- 페어린던 선수가 공을 잡았습니다.
'아니야.'
도라익은 센터백과 몸싸움을 하다 말고 뒤로 빠졌다. 조금 지쳤는지 페어린던이 발을 휘두르는 속도가 느렸다.
과연, 제대로 차지 못한 크로스는 수비수의 몸에 맞아 밖으로 흘렀다.
'산체스라면 공을 한 번 터치하고 슛이다.'
몸을 뒤로 뺐던 도라익은 산체스가 공을 멈추자 다시 안으로 달렸다. 몇 번이나 허공에 슛을 날렸던 산체스는 이번에 특별히 신경 써서 공을 눌렀다.
강하게 찬 산체스의 슛은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여러 선수의 몸과 다리에 맞으며 제멋대로 굴렀다.
'아씨.'
골대 앞으로 침투한 도라익이 멈추려고 서두르다가 벌러덩 넘어졌다.
그때 공교롭게도 수비수의 정강이에 맞은 공이 도라익 근처로 굴러왔다.
- 도라익 선수 슛!
- 골입니다. 그런데 슛이 맞나요?
도라익은 바닥에 누운 자세 그대로 양발로 공을 끼운 후 골대 안으로 던졌다.
- 굳이 따지자면 오버헤드킥인데.
머리가 골대 방향으로 향했고 누운 자세였기에 굳이 따지면 오버헤드는 맞다. 그러나 발로 공을 끼워 던진 거여서 킥이라고 하기 애매했다.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세리머니를 하지 않고 VAR 판정을 기다렸다.
[DECISION GOAL]
산체스가 슈팅할 당시 도라익은 온 사이드였다. 그 뒤로 여러 번 굴절이 있었지만, 고의로 한 터치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마지막 터치도 팔레르모 선수이기에 유효 판정이 났다.
"도우. 잠깐 이리 와봐."
토미로 제임스를 교체하며 윌슨이 도라익을 불렀다.
"원래 이쯤에서 널 교체하는 게 맞아. A매치 브레이크 전에 한 경기 더 있으니까."
스토크시티는 4일 뒤에 원정에서 리그 꼴찌 더비 카운티와 대결한다.
"다음 경기에 넌 벤치다. 그러니 오늘 마음껏 날뛰어도 된다."
아무리 시즌 전체를 고민해야 하는 감독이지만, 4경기 연속 해트트릭의 기록을 외면하면서까지 도라익을 교체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질 것 같은 경기에서 주전을 일찍 교체하는 것과 유로파리그 예선 당시 원정에 주전 몇 명을 아예 데리고 가지 않았던 거로 구설에 올랐던 윌슨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경기는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 벌써 85분입니다. 도라익 선수의 세 번째 골이 아직도 안 터지네요.
- 팔레르모 키퍼의 컨디션이 너무 좋습니다.
-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대놓고 도라익 선수를 밀어줍니다. 그런데 상대도 그걸 알고 있단 말이죠.
도라익이 해트트릭에 성공하면 축구사에 굵직하게 한 줄 남긴다. 이제 16세인 선수니, 언론들이 조용히 지나칠 리 없다.
도라익의 해트트릭 피해자 셋 중에 팔레르모가 가장 불쌍하다. 2번이나 해트트릭 당한 것도 있지만, 네 번째로 상대한 팀이기 때문이다.
도라익의 업적이 거론될 때마다 팔레르모와 팔레르모 골키퍼는 전리품처럼 전시 당한다.
'리듬이 느렸어.'
도라익의 슈팅 타이밍이 너무 뻔했고 누구나 예상할 만한 슈팅이었다. 아무리 빠르고 강하게 찼다고 하더라도 세리에 A 주전 키퍼를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토미가 슈팅 페이크를 준 다음 안으로 공을 찔렀다. 토미의 패스 타이밍을 정확히 알기에 도라익은 제때 달려가 공을 잡았다.
공을 잡은 도라익이 몸을 돌리는 사이 키퍼에 세 명의 수비수가 도라익 앞을 막았다.
도라익으로선 뒤로 후퇴하는 길밖에 없었다. 슈팅은 물론 패스할 경로조차 꼭꼭 막혔다.
- 도라익 선수 움직입니다.
오른발 플립플랩으로 오른쪽으로 갈 것처럼 하다가 왼쪽으로 갔다. 키퍼가 몸을 포스트에 바짝 붙여 슈팅 각도를 완전히 죽였다. 그리고 수비수 한 명이 키퍼와 가깝게 서서 패스할 틈을 막아버렸다.
도라익은 다시 공을 오른쪽으로 보냈다. 팔레르모 수비수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은 경기에서 이기거나 비기려는 것보다 도라익의 세 번째 골을 막을 생각에 몰두했다.
도라익은 고개를 들어 세 수비수 너머를 바라봤다. 찰리와 산체스와 토미와 페어린던은 물론 루이스까지 있어 공이 넘어가기만 하면 골이 될 확률이 높다.
도라익이 패스를 노리는 듯하여 보이자 세 수비수가 몸을 가까이해 벽을 세워버렸다.
- 현란합니다.
상황이 너무 긴박해 해설도 구체적인 설명이 어려웠다. 도라익은 오른발로 플립플랩을 펼쳐 공을 왼쪽에 보냈다. 그리고 바로 왼발로 플립플랩을 펼쳐 골라인 쪽으로 공을 먼저 보낸 후 다시 오른발 쪽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슛을 때렸다.
- 골, 골입니다.
- VAR 판독 들어갑니다. 도라익 선수의 골로 인정할지 자책골로 인정할지 궁금합니다.
도라익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오른발 슈팅을 날렸다. 먼 포스트를 노린 도라익의 슈팅은 키퍼의 왼팔에 맞아 골이 되었다.
득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자책골인지 도라익의 해트트릭인지를 가려야 한다.
- 골입니다. 도라익 선수 해트트릭입니다.
- 87% 확률로 유효 슈팅이라고 합니다.
컴퓨터는 도라익의 슈팅이 골대로 향했을 가능성을 87%로 점쳤다. 이 데이터를 참조한 주심이 도라익의 골로 인정하며 유로파리그 4경기 연속 해트트릭 기록이 세워졌다.
- 12골이면 득점왕 아닙니까?
- 10-11시즌에 팔카오 선수가 17골을 넣긴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시즌에 갖다 놓으면 이미 득점왕입니다.
- 어디서 저런 선수가 갑자기 나타났을까요?
- 제가 저런 선수와 사적으로 통화하는 사람입니다.
- 도라익 선수님께 충고합니다. 이 사람이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세요.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자주 부끄러운 분이거든요.
- 작가의말
??? : 저건 분명히 자책골이에요. 주심이 기록에 눈이 멀어 봐준 거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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