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전
지루한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됐다.
한국팀 선축이다.
도라익은 공을 뒤로 넘긴 후 빠르게 앞으로 달렸다. 일본전 후반과 똑같은 시작이다.
중간 휴식 시간에 뭔가 지시받은 게 있는지 중국팀 공격수들이 공을 잡은 선수한테 득달같이 달려든다.
한국팀은 공을 빠르게 돌렸다. 세 번의 패스로 중국팀의 압박을 손쉽게 벗겨낸 한국팀은 긴 패스로 도라익을 찾았다.
일본전과 달리 도라익은 중국팀 오른쪽 풀백과 경합했다. 레알 마드리드 유스 출신인 중국팀 풀백은 포르투갈 2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다.
'중심 낮추고 엉덩이로 민다.'
도라익은 최경호 덕분에 쉽게 접하기 힘든 귀한 교육자료를 많이 탐독했다. 머리도 나쁘지 않아 거기에 나오는 내용을 다 외울 지경이다.
그러나 훈련 상대가 최경호밖에 없어 그저 머리로 아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에 경험이 풍부한 감독과 코치 그리고 선배들의 가르침은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선수나 코치들도 알려주는 족족 쏙쏙 빨아들이는 도라익 덕분에 가르치는 맛이 난다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오른쪽 풀백인 오창범의 도움이 컸다. 정석적인 수비가 부족한 대신 손장난에 능숙한 오창범 덕분에 도라익은 수비수를 상대하는 법을 빠르게 몸에 새겼다.
중국팀 풀백은 오창범보다 훨씬 건장한 체격이다. 그런데 몸싸움 기술이 부족해 오히려 오창범보다 훨씬 상대하기 쉬웠다.
'중국 선수 대부분이 하체 근력은 충분하나 상체가 빈약하다고 했지.'
그나마 강한 하체를 완전히 제압당한 풀백은 도라익 상대로 꼼짝도 못 했다.
풀백이 몸싸움에서 열세에 처하자 중앙수비수가 백업하러 다가왔다. 그러나 중앙수비수가 채 다가오기도 전에 도라익이 공을 잡고 풀백을 뿌리쳤다.
풀백이 도라익의 허리를 감았던 손을 풀며 유니폼을 잡으려 했으나, 신소재로 만든 유니폼은 아주 미끄러웠다.
중앙수비수가 재빨리 도라익의 전진을 막고 풀백은 중앙수비수 위치로 달려갔다.
도라익은 골라인 쪽으로 공을 툭 친 다음 폭발적인 가속도로 달려가 크로스 올리는 시늉을 했다. 반응이 반 박자 늦은 중앙수비수가 슬라이딩으로 패스 경로를 막았다.
도라익은 크로스를 올리는 대신 굴러가는 공을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그리고 재빨리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공을 쳐서 패스 경로를 확보했다.
중앙수비수 자리로 갔던 풀백이 황급히 달려오고, 중국팀 왼쪽 중앙수비수가 가운데로 이동했다.
중국팀의 수비진 이동은 교과서처럼 모범적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도라익은 크로스를 올리는 대신 땅볼을 굴려 사선으로 백 패스했다.
공미로 출전했지만 하는 일은 수미나 다름없는 한국팀 10번 고명준이 달려와서 공을 잡고 보지도 않은 채 반대편으로 띄웠다.
얍삽하게 중국팀 왼쪽 풀백 뒤에 숨었던 이혁신이 어깨로 상대 선수를 툭 치고 앞으로 달렸다. 미처 주의하지 못한 중국팀 풀백은 이혁신의 어깨빵에 비칠대느라 마킹에 실패했다.
골키퍼가 달려 나오며 각을 좁혔다. 이혁신은 고개를 돌려 패스 경로를 찾는 척하다가 왼발로 공 밑을 툭 찼다. 달려 나오던 키퍼가 급히 점프했지만, 미처 공을 건드리지 못했다. 높이 뜬 공은 키퍼를 넘어 골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왼쪽 윙어인 이혁신을 오른쪽으로 보낸 이유다. 차 감독은 패스는 생각지 말고 이혁신이 직접 마무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일본전에서 기습 골을 넣은 도라익 덕분에 이혁신이 덜 관심받을 거란 추측으로 세운 전술이고, 딱 한 번 쓸 수 있는 전술이다.
안타깝게도 전반전에 선축을 빼앗긴 탓에 후반전에야 시도하게 되었다.
이혁신은 느릿느릿 날아가는 공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경기를 뛰다 보면 갑자기 시야가 좁아지며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보통은 슈팅 후에 생기는 현상인데,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열에 여덟은 골이다.
아쉽지만, 이번엔 둘 상황이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칩슛으로 찬 공의 궤적은 골대 안이 아닌 밖을 향하고 있다.
그때.
시커먼 그림자가 이혁신의 시야를 침범했다. 윤곽이 모호한 흐릿한 그림자는 크로스바보다 높이 점프하여 헤딩으로 공을 골대 안에 넣어버렸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이혁신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터치라인으로 달려가는 도라익을 쫓아갔다.
- 방금 골이 들어갔는데 선수들이 눈치 봤죠?
- 그렇습니다. 선배들이 세리머니를 할지 말지 골 넣은 후배 눈치부터 보는 모습.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젠 도라익 세리머니로 이름을 바꾼 침묵 세리머니. 도라익이 골을 넣자 선수들은 움찔하며 서로 눈치를 봤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착지 실패로 잔디에 넘어졌던 도라익이 벌떡 일어나 골대에서 공을 주운 뒤 미친놈처럼 벤치가 있는 터치라인 방향으로 뛰었고, 이혁신도 팔을 마구 휘두르며 쫓아갔다.
주춤거리던 선수들도 그제야 환호를 지르며 도라익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 음. 도라익 선수 설마 저 세리머니의 의미를 모르는 건가요?
축구공을 유니폼 안에 넣어 배를 불룩하게 한 도라익이 엄지를 물고 젖병 빠는 세리머니를 했다.
이는 축구선수들이 와이프가 임신했거나 출산했을 때 하는 세리머니로, 보통은 같은 팀 선수들이 아기를 안고 흔드는 동작을 함께 해준다.
그러나 들은 바가 전혀 없는 한국팀 선수들은 신나서 세리머니를 하는 도라익 주변에 어정쩡하게 서 있기만 했다.
- 심판이 중국팀 주장한테 옐로카드를 내밉니다.
- 혹시 심한 욕을 했을까요?
- 욕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건 중국 선수가 네모를 그리며 VAR을 언급했다는 것이죠.
FIFA 규정상 선수가 VAR로 심판을 압박하는 건 파울이다. EPL을 비롯한 몇몇 리그는 주장과 감독에게 VAR을 봐달라고 요청할 권한을 주지만, 국제경기에선 무조건 파울이다.
물론, 대부분 심판은 손으로 네모를 그렸다고 카드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심판의 국적은 카타르.
한국팀에도 우호적이진 않지만, 중국팀엔 증오의 감정을 품은 게 아닌지 의심되는 게 이란과 카타르 심판들이다. 굳이 우열을 따지면 이란 심판의 승리겠지만, 카타르 심판들도 별 다섯 개 박힌 붉은기에 알러지가 있는 게 분명하다.
보통은 구두 경고로 끝나지만, 카드를 줘도 어디 하소연할 데 없는 상황이다.
한국팀 벤치도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도 도라익의 세리머니가 궁금했지만, 의문을 접고 대형 전광판을 주시했다.
중국팀 벤치는 대기심에게 도라익의 오프사이드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압박했다.
골 장면이 느리게 재생됐다. 이혁신이 찬 공이 떠오르는 순간, 도라익의 어깨를 기준으로 선이 그어졌다.
그 선과 골라인 사이에는 중국팀 키퍼와 오른쪽 중앙수비수가 있었다.
도라익의 크로스를 막으려고 몸을 날린 수비수가 그때야 일어나 밖으로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DECISION GOAL]
전광판에는 골을 인정한다는 문구가 커다랗게 떴다.
"쟤네 싸우는 거 봐."
키퍼 그리고 두 풀백이 실책을 저지른 중앙수비수와 같은 편이 되어 귀화 선수들과 말다툼을 벌였다. 미드필더를 맡은 선수가 중간에서 열심히 말렸다.
중국팀 감독 우레이가 나서서 중재한 후 분쟁이 일단락됐지만, 팀 분열이 눈에 보이는 수준이다.
"쟤네 우승상금만 300억이 넘어. 세금 빼도 두당 10억이야. 한 골 먹었으니 이제부터 더 거칠어질 거야. 안 다치게 주의해."
"형도 조심해요. 다치면 절대 안 돼요."
데뷔전에서 도라익은 3골 1도움에 카드 5장을 유발하며 데이터로는 엄청 훌륭했지만,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팀에 큰 공헌을 하지 못했다.
골이 최고의 공헌이긴 한데, 도라익은 팀과 따로 노는 느낌을 받았다.
방금만 해도 10번 고명준은 이혁신의 위치를 확인하지도 않고 패스했다. 그러나 도라익한테 패스하기 전엔 늘 고개를 들어 한 번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번 경기에서 도라익은 이혁신의 지시를 성실히 따르며 팀에 좀 더 녹아든 느낌을 받았다. 그간 든 정도 있고 해서 이혁신이 절대 다치지 말고 자신과 함께 풀타임을 뛰어주길 바랐다.
중국팀의 선축으로 경기를 재개한 후, 파울이 잦아지고 몸싸움도 훨씬 거칠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 귀화 선수들의 개인기가 빛을 발했다.
오른쪽 윙어 코투가 연속 세 선수를 비껴낸 후 왼발로 슈팅을 날렸다. 엄청 잘 찬 슈팅이 골키퍼 김춘호의 손가락 끝에 맞은 후 포스트를 강타하고 골라인 밖으로 나갔다.
[중국 공격수들은 서로 패스 잘 안 할 거다. 골든 슈즈 상금이 무려 30억이거든. 지금 3골을 넣은 선수가 셋이고, 이들은 서로 경쟁자야.]
차 감독의 말이 귀에 울렸다. 방금 코투가 반대편 공간을 침투하는 에릭슨한테 패스했다면 훨씬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축구라는 게 그냥 공 차는 스포츠가 아니었어.'
할아버지가 구한 책과 인터넷에서 찾은 동영상을 보며 홀로 훈련했고, 유럽에 간 후 역시 무시해도 좋을 최경호의 도움만 받으며 혼자 훈련했던 도라익한테 대표팀의 두 경기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코투한테 손가락질하며 F가 들어간 욕을 하는 에릭슨과 그런 에릭슨을 못 본 척 무시하는 코투를 보며 도라익은 축구가 단순히 공을 골대에 넣는 스포츠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제일 신기한 건, 감독님이 시킨 대로 했더니 감독님이 말한 대로 경기가 흘렀다. 한국팀은 점점 더 강하게 뭉치고 중국팀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 작가의말
이 글은 작년 5월부터 준비하던 글입니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귀화를 대대적으로 하면서 축구에 여전히 돈을 쏟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갑자기 연봉 제한이랑 이적료 제한 등 새 정책을 출시하고 구단명 및 팀명에 스폰서 이름을 빼도록 강제한 바람에 작년 우승팀이 해체 위기에 놓인 상태입니다.
이 글은 중국의 금원 축구가 계속 진행되어 귀화 선수들로 강해진 미래를 가정하여 썼습니다. 그렇기에 괴리감이 있더라도 수용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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