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와 이타
"윌슨 때문인 거 같구나."
토마슨 박사가 말했다. 구단주 친구의 친구로, 소정의 금액을 받고 도라익을 포함한 스토크시티 선수들의 멘탈을 케어하고 있다.
사실 멘탈을 케어한다기보다 도라익의 뇌에 생긴 점이 궁금해서 연구 목적으로 승낙했던 거고, 하다 보니 재밌어서 점이 사라진 지금도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 팀엔 찰리나 맥자넷처럼 흔한 케이스도 많고, 제임스나 줄리엔 그리고 오창범 같은 특이한 케이스도 있다. 그러나 토마슨 박사에게 가장 흥미로운 건 역시 도라익이다.
한 사람과 일정량 이상의 대화를 나누면 성향을 파악할 수 있고,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일관되게 특이한 오창범 등과 달리 도라익은 종잡기 어려웠고, 그래서 재밌었다.
"제 문제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야."
윌슨은 팀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조한다. 그리고 재능이 많고 능력이 강할수록 더 큰 희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인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신념이 확고하다.
그래서 팀보다는 자신이 우선인 스토크시티 최고의 스타 톰 인스를 이적시키기까지 했다. 비록 윌슨이 노리고 한 건 아니지만, 톰 인스를 이적시키고 나서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윌슨의 지시에 더욱 고분고분해졌다.
일례로 지금은 사라진 정당한 사유 없이 카드를 받았을 때 큰 금액을 벌금으로 내는 제도에 대한 불만이 1년이 넘어서야 터졌다.
"그래선지 넌 네 플레이를 제대로 못 하는 거 같아. 비록 내가 축구를 잘 모르지만."
"그럼 이기적인 플레이와 이타적인 플레이를 어떻게 구분하나요?"
"네 선택이 무엇에 기초했는지가 중요하지."
토마슨 박사는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했다.
"네가 10골을 넣으려고 찰리한테서 페널티킥을 달라고 했던 건 이기적인 거야. 물론 팀을 승리로 이끌겠단 생각도 있었겠지만, 골을 넣고 싶은 욕심이 분명히 있었잖아. 맨유전에서 네가 페널티킥을 찰리한테 양보한 건 이타적인 거야. 해트트릭보다 팀의 확실한 승리 그리고 잔류를 원했으니까."
"제가 슛하면 골이 들어갈 확률이 반반이고, 패스해도 반반이에요. 그럴 땐 뭐가 이기적인 거고 뭐가 이타적인 건가요?"
도라익의 질문에 토마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단순한 사람이라면 패스가 이타적이고 슛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아이는 대부분 사람이 선입견을 품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제에 오히려 단순하지 않은 면모를 보인다.
"이기적인 건 내 이익을 우선에 놓는 거야. 이타적인 건 타인의 이익을 우선에 놓는다는 뜻인데,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야. 부모가 맛있는 음식을 자식에게 양보하는 건 이타적이어서가 아니야. 자식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자신이 먹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니까 그런 거야."
"결국 모든 행동이 이기적이라는 말씀인가요? 그럼 이타적인 플레이라는 건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겠네요?"
"그렇진 않지. 내가 골을 넣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보다 팀이 이겨 승점 3점을 따내는 게 더 기쁘다. 그러면 네 플레이는 이타적인 플레이로 평가받을 거야. 사실상 그 본질은 이기적인 거라고 해도."
"그럼 이타적인 플레이보단 헌신적인 플레이가 더 맞겠네요?"
"그렇지. 한 경기 승리를 생각하고 헌신적으로 플레이하면 넌 헌신적인 선수가 될 거야. 한 시즌을 고민하며 플레이하면 넌 위대한 선수가 될 거고."
토마슨 박사는 격동한 심정을 누르느라 잠시 말을 멈춰야 했다.
"네 선수 인생은 물론 네 남은 인생까지 고민하며 플레이하면 넌 역사적인 선수가 될 거야. 재능은 이미 충분하고 노력도 넘치니까. 네게 필요한 건 정확한 목표를 정하고 옳은 생각을 하는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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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더 스카이 스타디움.
공을 잡은 도라익은 몸을 왼쪽으로 돌리며 맥자넷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맥자넷이 앞으로 달렸다.
맥자넷이 달림과 동시에 도라익은 공을 짧게 치고 터치라인으로 달렸다. 맥자넷을 수비해야 할 에버턴 풀백이 잠깐 망설였다.
도라익을 막을지 맥자넷을 따라갈지 망설이던 풀백은 곧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려 뛰었다. 도라익의 패스를 받은 맥자넷은 안으로 컷인하며 단단한 몸으로 뒤늦게 쫓아 온 에버턴 풀백을 막아 공을 보호했다.
고개를 들어 찰리를 확인한 맥자넷은 크로스 대신 사선으로 백 패스했다. 사전에 약속된 거로, 찰리가 왼손을 들면 크로스고 오른손을 들면 백 패스다.
약속대로 토미가 맥자넷의 패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약속과 다른 부분은 토미가 공을 잡지 않고 가랑이로 흘렸다는 것이다.
토미가 흘린 공은 어느새 중앙으로 달린 도라익이 잡았다. 가까운 포스트엔 이미 루이스가 자리를 잡았고, 먼 포스트엔 찰리가 몸싸움을 이기고 좋은 위치를 잡고 있었다.
공을 한 번 건드려 왼발로 크로스 올리기 좋은 위치에 뒀던 도라익은 페이크로 수비수를 속인 후 공을 오른쪽으로 굴렸다. 그리고 차기 좋은 먼 포스트 대신 가까운 포스트를 노려 오른발 슛을 때렸다.
슛 경로에 있던 루이스가 제때 피한 덕분에 도라익의 강슛은 골이 되었다.
전반전 17분에 스토크시티는 도라익의 선제골로 앞서며 홈팬들을 흥분케 했다.
전반 29분. 도라익이 오른쪽에서 공을 잡았다. 오창범이 맥자넷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버래핑해 달렸다.
아까 실점한 기억 때문에 에버턴의 왼쪽 풀백은 오창범을 쫓아갔다.
도라익은 패스 대신 드리블로 오창범의 위치를 차지했다. 오창범을 쫓아갔던 풀백은 어쩔 수 없이 도로 달려와서 도라익을 수비했다.
에버턴의 수비에는 하나의 큰 원칙이 있다. 바로 센터백은 풀백의 수비를 돕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중볼 수비에 꽤 자신 있는 에버턴이고, 두 수미의 수비 가담이 적극적이기에 컷인도 두렵지 않아 터치라인의 수비는 풀백 혼자서 감당하는 전술이다.
오창범이 손을 흔들며 공을 요구했다. 그러나 도라익은 오창범에게 주는 대신 컷인했다. 오창범에게 향하는 패스 차단을 염두에 뒀던 풀백은 미처 도라익의 컷인에 반응하지 못했다.
에버턴의 왼쪽 수미가 적당한 속도로 달려와 도라익을 수비했다. 도라익은 드리블을 멈추고 어느새 가까운 포스트로 달리는 루이스한테 패스했다.
에버턴의 센터백도 도라익의 패스에 반응했지만, 이미 달리고 있는 루이스보다 빠를 수 없었다.
공을 먼저 잡은 루이스는 센터백을 등진 채 공을 지켰다. 오창범이 오프사이드를 조심하면서 루이스를 향해 달렸고, 풀백은 그런 오창범을 방해하러 달렸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루이스는 골라인과 반대되는 쪽으로 몸을 돌려 뒤로 패스했다. 루이스의 공을 잡은 건 최근 활약이 두드러진 토미였다.
루이스의 패스를 받은 토미는 미처 상대 수미가 접근하기도 전에 왼발로 공을 톡 쳐서 오른쪽으로 짧게 패스했다.
순발력을 이용해 자신을 수비하는 수미를 완전히 제친 도라익이 어느새 패스 지점에 도착했다. 찰리가 왼손을 올려 크로스를 요구했다.
오른발로 크로스 올리기 편한 자세를 잡은 도라익이 갑자기 무게 중심을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뒤늦게 온 수미가 방해하기 전에 왼발 아웃사이드로 슛을 때렸다.
찰리의 헤딩을 염두에 두고 먼 포스트 쪽으로 치우쳤던 키퍼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몸을 날렸으나 역시 짧았다.
구속은 느리나 정확했던 도라익의 슛은 가까운 포스트를 스치며 골이 되었다.
- 도라익 선수의 플레이가 놀랍습니다.
- 허를 연속 찌르는 바람에 수비 측의 움직임이 통일되지 않아 금이 생긴 겁니다.
사실 해설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오창범한테 공을 주지 않은 건, 오창범이 아직도 심리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중볼 수비에 일가견이 있는 에버턴이기에 아무리 오창범이 크로스를 잘 올려도 노골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오창범은 또 자기 탓을 하며 경기 내내 위축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공격 내내 공 한 번 못 만져봤지만, 골에 자기 지분이 꽤 있다고 생각하며 엄청나게 기뻐하는 오창범의 모습을 보면 정말 훌륭한 선택이다.
찰리는 좋은 기회를 놓치면 자신한테 화풀이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가 에버턴이 아니었으면 도라익은 두 번 다 슛 대신 크로스를 선택했을 것이다. 여전히 슈팅에 더 자신 있지만, 크로스도 꽤 정확한 편이니까.
그러나 상대가 에버턴이기에 도라익은 억지로 슛을 때렸다. 공격이 무산되더라도 자신이 원망을 받으면 되니까.
도라익의 이러한 속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도라익이 허를 찌르는 플레이를 했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도라익의 이러한 생각을 알 만한 토마슨 박사는 축구를 너무 몰랐다.
- 도라익 선수 지쳤습니다.
체력이 뛰어나고 신체 회복력도 뛰어난 도라익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태국으로, 태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갔다가 영국까지 오는 여정은 그런 도라익에게도 엄청난 피로를 선사했다.
후반 60분에 도라익과 오창범이 동시에 교체되었다.
그리고 스토크시티는 3골을 연속으로 먹으면서 2:3 패배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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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크시티는 아주 훌륭한 팀입니다. 도라익 선수가 내려가기 전까지만 해도 우린 스토크시티를 이길 방법을 전혀 찾지 못했습니다."
에버턴 감독이 스토크시티를 극찬했다.
"다행히 선수 교체가 일어난 시점에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우린 6분 사이에 세 번이나 기회를 잡아 경기를 역전했습니다."
"도라익 선수의 부재가 스토크시티에 그렇게 영향이 큰가요?"
인터뷰 받는 사람은 에버턴 감독인데 온통 스토크시티와 도라익에 관한 얘기뿐이었다.
"아닙니다. 알론소 감독은 선수 교체와 함께 전술도 바꾸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걸 알기에 선수들이 원래 전술에서 새 전술로 바꾸느라 혼란한 틈을 타서 우리가 득점한 겁니다."
"저 감독은 왜 우리 약점을 대놓고 인터뷰에서 말할까? 다음 경기 때 또 써먹으면 좋잖아."
오창범이 인터뷰 영상을 보며 툴툴거렸다. 대표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돌아오자마자 푹 쉰 라미스를 제치고 선발로 출전해서 기뻤는데, 2:0으로 앞선 경기가 뒤집혀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였다.
"우릴 상대로 안 보는 거야."
스트레칭하며 어제 경기를 복기한 도라익이 말했다.
"어차피 어제 경기는 이겼고, 다음 경기는 에버턴 홈이야. 그리고 다음에 붙기 전에 어쩌면 우리가 저 약점을 이미 찾아냈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이야?"
도라익을 따라 스트레칭하다가 어느새 지쳐버린 오창범이 바닥에 벌러덩 누우며 말했다.
"우리더러 빨리 약점을 보완해서 다른 팀들 상대로 좋은 결과 내라는 거잖아. 서로 경쟁하는 입장인데, 내게 진 팀이 다른 팀을 이기면 좋은 일이니까."
"시발. 무슨 축구를 007처럼 하냐."
도라익도 아는 걸 못 알아채서 무안했던 오창범이 툴툴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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