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암화명
3월 18일. 빌라 파크.
아스톤 빌라는 시즌 초반에 선두를 달리기도 했지만, 결국엔 뒷심 부족으로 리그 10위까지 떨어졌다. 아스널과 더불어 박싱 데이 전후 성적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팀으로도 꼽힌다.
찰리 아담의 부상 때문에 도라익은 포워드로 출전했다. 캠벨이 새도우 스트라이커 자리로 가며 전술도 변화했다. 그리고 매일 저녁 도라익과 함께 훈련하던 쇠렌센이 벤치에 앉았다.
경기는 아스톤 빌라의 선축으로 시작했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도라익과 제임스는 앞으로 달렸다. 속도나 체력은 부족하지만, 몸싸움이 되는 캠벨은 일단 뒤에 남았다.
제임스의 공백을 메우기도 하고, 나쁘지 않은 몸싸움과 헤딩 능력으로 높은 공을 따내기 위함이다.
샘 앨런과 산체스도 압박에 참여하자 아스톤 빌라는 공을 키퍼한테 돌렸다. 공을 받은 키퍼가 앞으로 강하게 찼다. 상대를 4명이나 자기 진영으로 깊숙이 끌어왔기에 반격하기 딱 좋은 기회다.
그러나 스토크시티도 바보는 아니다. 수비진이 과감하게 라인을 올려 키퍼가 찬 공을 먼저 따냈다.
캠벨이 따낸 공을 잡은 샘 클루카스가 지체하지 않고 샘 앨런한테 패스했다.
샘 앨런은 간단한 페이크로 아스톤 빌라의 풀백을 제치고 골라인으로 돌진했다. 아스톤 빌라의 오른쪽 풀백은 주전들이 연이은 부상으로 빠지며 리저브 팀에서 급히 발탁된 선수로 기량이 부족했다.
물론, 아스톤 빌라도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수비 태세를 단단히 갖췄다. 샘 앨런은 상대가 수비 위치를 빠르게 잡는 것을 보고 급히 크로스를 올렸다.
서두르는 바람에 공이 살짝 빗맞아 크로스가 조금 낮았다.
도라익은 급히 가까운 포스트로 달려 가슴으로 공을 트래핑했다. 가슴이나 머리로 슬쩍 튕겨 뒤로 보내기엔 공이 너무 낮았다.
가슴으로 공을 멈춘 도라익은 바로 몸을 뒤로 눕히며 오버헤드킥 자세로 크로스를 올렸다. 미리 계획한 일은 아니고, 공을 뺏길 것 같아 무작정 달려갔다가 임기응변으로 한 행동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전개를 전혀 예상치 못한 세 수비수와 키퍼는 뒤늦게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페널티킥 포인트에 매복하고 있던 제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라익의 기상천외한 패스는 조금 늦게 페널티킥 박스에 침투한 산체스가 잡았다. 벌떡 일어난 도라익이 골대 앞으로 달리며 패스를 요구했고 제임스 역시 뒷걸음으로 물러나며 손을 들어 공을 달라고 신호했다.
산체스는 오른발로 공을 툭 건드려 왼쪽에 보냈다. 제임스한테로 향하는 패스 경로를 확보한 것이긴 하지만, 한 번 더 꼬아서 도라익한테 보내도 된다.
산체스가 누구한테 패스할지 판단이 어려웠던 수비수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산체스는 왼발로 공을 강하게 때렸다.
- 골입니다. 도라익 선수 1도움 기록합니다.
- 이로써 리그 6경기 4골 4도움으로 공격 포인트 8 올리게 되었습니다.
아스톤 빌라 키퍼는 오른발 선수인 산체스가 공을 왼발로 보내자 살짝 방심하며 슈팅보다는 패스를 염두에 뒀다.
그 작은 방심의 틈을 비집고 산체스의 과감한 왼발 슈팅이 득점에 성공했다.
골을 넣은 산체스가 미친 듯이 달리며 유니폼을 벗으려 했다. 다행히 함께 달리던 도라익이 팔을 누르며 안간힘을 다해 방해했다.
"산체스. 정신 차려. 옐로카드 받고 싶어?"
정당한 이유가 없는 옐로카드는 구단에 벌금을 물어야 한다. 리그컵 결승전 91분에 받은 옐로카드로 도라익은 800파운드를 벌금으로 냈다.
주급이 훨씬 높은 산체스라면 만 파운드 이상의 벌금을 내야 할 것이다.
돈 얘기에 정신을 차린 산체스가 흥분을 눌렀다. 나이는 이제 24살이지만, 아이가 벌써 넷인 가장이다.
"고마워, 도우."
산체스는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벌금이 아까운 건 둘째 치고, 마누라한테 긁힐 바가지가 훨씬 걱정이었다.
재개된 경기에서 스토크시티는 똑같은 전술을 펼쳤다. 도라익과 제임스 그리고 산체스와 앨런이 압박하고 수비 라인을 중앙선 근처까지 올렸다. 캠벨은 상황에 따라 압박에 참여하기도 하고 수비진을 돕기도 했다.
이는 빠른 선수가 없는 아스톤 빌라의 약점을 겨냥한 윌슨의 전략이었다. 아스톤 빌라는 1월 말에 속도가 빠른 양쪽 윙이 한 경기 차이를 두고 나란히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아스톤 빌라의 벤치에 빠른 선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속도 빼고는 부족한 부분이 많은 선수다. 경기 후반에 짧게 출전하는 건 가능해도 긴 시간 경기를 소화하는 건 무리다.
덕분에 경기는 스토크시티의 페이스로 진행됐다. 홈에서 경기를 진행하는 아스톤 빌라는 어떻게든 상황을 뒤집으려고 애썼지만, 패스로 공을 돌리며 느리게 전진하는 방식 외에는 해결책이 없었다.
그리고 이 방식은 커다란 약점이 있었다. 주전의 부상으로 선발 자리를 차지한 선수들이 팀 리듬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해 실수가 잦았다.
"쉣!"
패스를 받으러 달려가던 아스톤 빌라 미드필더가 욕설을 뱉었다. 공을 받아줄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데 패스 방향이 엉뚱했다.
패스 미스로 굴러온 공을 잡은 클루카스는 바로 도라익한테 길게 패스했다.
- 이번엔 도라익 선수가 공을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 포워드 자리가 익숙하지 않은지 오늘 실수가 꽤 있었거든요.
공을 잡은 도라익은 어느새 앞으로 달리는 산체스한테 공을 밀어준 다음 몸을 돌려 빠르게 달렸다.
센터백이 도라익을 따라가면서 생긴 공간은 제임스가 차지했다.
산체스가 먼저 출발했지만, 공을 받은 후 드리블하느라 속도가 느려졌다. 풀백이 산체스를 거의 따라잡았다.
산체스는 풀백이 방해할 기회도 안 주고 바로 공을 찼다. 도라익의 위치가 산체스보다 앞이고 그 사이에 수비수가 두 명이나 있어 패스하기 적합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산체스의 낮은 크로스는 굴곡이 심한 곡선을 그리며 두 센터백의 블로킹을 완벽하게 피했다.
그리고 공이 잔디에 닿는 순간, 도라익이 도착했다. 도라익이 공을 찾아온 거라고 하기보단 공이 도라익 앞에 배달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도라익은 달리던 그대로 템포도 조절하지 않고 왼발에 공을 맞혔다. 강하게 휘두르진 않았지만, 산체스가 패스하던 힘까지 있어 발등에 맞은 공이 빠른 속도로 곧게 날았다.
양쪽 포스트 어디도 포기하지 못한 키퍼가 뒤늦게 몸을 날렸지만, 이미 공이 골대로 들어간 후였다.
골을 넣은 도라익은 산체스한테 달려가 와락 안겼다. 산체스는 평소와 달리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자신의 첫 도움을 자축했다.
후반전 60분에 도라익이 교체되었다. 1골 1도움을 기록했지만, 포워드로선 불합격이었다. 미드필더처럼 뛰면서 체력을 비축한 캠벨이 포워드 자리로 가고 샘 앨런이 새도우 스트라이커 위치로 갔다.
교체로 투입된 쇠렌센의 실책으로 골 하나 먹었지만, 2:1로 소중한 3점을 획득했다.
3월 31일.
FA컵 조기 탈락으로 충분한 휴식과 훈련을 한 스토크시티는 홈에서 미들즈브러를 맞이했다. 영국 기술 축구의 선구자인 미들즈브러는 유로파 리그를 노리기엔 부족하고 강등하고도 거리가 멀었다.
정신적으로 느슨할 수밖에 없는 원정팀 상대로 도라익은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2:0으로 승리한 스토크시티는 26점으로 19위에 머물렀지만, 17위인 셰필드와의 점수 차이를 5점으로 줄였다.
도라익의 패스로 골을 넣은 제임스는 경기 후 감사의 의미로 도라익한테 축구화를 선물했다.
그러나 도라익은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이번 경기는 지난 경기보다 좀 더 이른 55분에 교체되었다.
포워드는 전방에서 공을 잡고 다른 선수들이 투입될 때까지 지켜야 한다. 찰리 아담과 비교하면 꽤 부족하지만, 도라익은 제공권도 나쁘지 않고 키핑 능력도 괜찮았다.
그러나 패스 시기가 빠르거나 느려 팀의 공격 리듬을 깨부수기 일쑤였다. 그 탓에 속공이 무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4월 7일.
원정 경기에서 아스널 상대로 1:0 승리를 거뒀다. 이 경기에서 캠벨과 제임스 대신 라세 쇠렌센과 조쉬 타이먼이 출전했다.
라세 쇠렌센은 클루카스와 함께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고 조쉬 타이먼은 스리백 중 중앙 센테백으로 뛰었다.
키퍼까지 열 명이 수비하고 공격수 한 명만 앞에 둔 전술로 경기 88분에 도라익이 넣은 골이 온사이드 판정을 받으며 극적으로 스토크시티의 승리가 되었다.
공 점유율이 80:20의 극단적인 형태를 보였으며 유효 슈팅도 겨우 도라익이 때린 2개밖에 없었다.
이로써 스토크시티는 29점으로 17위인 찰턴과 2점 차이만 두게 되었다.
[스토크시티 파죽의 3연승, 최대 공신은 도라익.]
[3경기 3골 2도움. 득점력이 폭발한다.]
[도라익의 조건을 거부한 아스널, 연속으로 쓴 열매를 삼키다.]
최근 스토크시티 상대로 2경기 연속 진 아스널 팬들의 불만도 컸다. 리그컵에서 비수를 꽂은 건 아스널 유스 출신 찰리 아담이었고, 리그에서 그 상처를 다시 헤집은 건 아스널과 2번이나 계약 협상을 진행한 도라익이다.
[인기 고공행진. 도라익 유니폼 판매량 급상승.]
[3월 판매량만 10만 장 돌파. 주문량 역시 폭주 중.]
그리고 프리미어 리그에서 7골 5도움을 기록한 도라익의 유니폼이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놀랍게도 일본에서도 1만 장에 가까운 유니폼이 팔렸다. 중국이 5만 장으로 4만 장의 한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제길, 나 같은 놈은 그냥 죽어야 해."
최경호는 유니폼 판매 수익을 계약에 넣지 않은 걸 땅을 치며 후회했다.
- 작가의말
소제목 유암화명은 2가지 의도로 사용했습니다.
유암화명은 절망에서 희망을 보는 극적인 상황을 뜻합니다. 찰리 아담의 부상으로 절망에 빠진 스토크시티가 도라익의 폭발로 3연승을 거뒀습니다.또 하나는 그늘을 만든 버들과 환하게 핀 꽃을 비교하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부상으로 빠진 찰리 아담이 그늘이고 3연승의 최대 공신 도라익이 환하게 핀 꽃이죠. 그러나 환하게 핀 도라익도 포워드 자리에 적응하지 못해 골 빼고는 잘하는 게 없는 암울한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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