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범
급히 모신 게스트들이 속속 착석했다.
"여기 이분은 만인평등당 비례 대표 최영실 의원님이십니다. 이분은 경찰청 여청특별팀 소속 이혜인 경위님입니다. 이분은 T 대학교 젠더 문화 전문가인 김영한 교수님입니다."
축구와 무관한 사회적 이슈이기에 오태범과 김상현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났다.
"먼저 이 경위님의 의견부터 묻겠습니다."
"경찰청 여청특별팀 소속 이혜인 경위입니다. 비록 대한민국의 국토가 아닌 머나먼 영국에서 발생한 사건이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큰 도라익 선수가 연루되었기에 저희 여청팀은 각별히 주시하고 있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여청특별팀이 어떤 사건을 담당하는 부서인지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여청특별팀은 여성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를 전문적으로 수사합니다. 범인을 잡아 죄를 묻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피해자의 후속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도 경찰과 우리 사회의 책임입니다. 범죄자를 잡는 것으로 경찰의 역할을 끝내지 말고 피해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보듬어 주자는 취지로 설립되었습니다."
"그렇군요. 다른 부서들과 업무가 다소 겹칠 수도 있는 특별한 부서로 보이는데요. 특수한 입장에 놓인 여청팀 소속으로서 이 경위님은 이번 사건에 어떤 독특한 견해를 갖는지 궁금합니다."
이혜인 경위는 속으로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부담인데 심지어 이건 생방송이다. 쏟은 물은 수건에 묻혀 어느 정도 회수할 수 있지만, 뱉은 말은 그럴 기회조차 없다.
게다가 진행자인 오연화가 교묘하게 말로 엮어서 상투적인 답변을 미리 차단했다.
이혜인이 심지가 곧은 사람이라면 덫에 걸리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발언했겠지만, 분위기에 눌려 머리가 굳은 나머지 오연화의 말장난에 휘둘리고 말았다.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젠더 기반 범죄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권력 기반 범죄입니다. 입증도 어렵고 처벌도 어렵죠."
"왜 처벌이 어려운가요?"
오연화가 차분하게 물었다.
"입증 자체도 어렵지만, 권력 기반 범죄는 합의를 쉽게 끌어낸다는 점에서 처벌이 어렵습니다."
"왜 합의가 쉬울까요?"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재력과 지위 등 모든 면에서 월등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죄가 인정되어 처벌을 받아도 가해자에게 별 피해가 없습니다. 그런데 피해자는 오히려 신상이 털리거나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는 등 2차 가해를 받게 됩니다."
"법이 엄격하지 못하다는 뜻인가요?"
"가해자에게 더 중한 벌을, 피해자에겐 더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성에 관련한 범죄에서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더 관대한 사회적 풍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잠시만요."
자리를 구석으로 옮기고 가만히 듣기만 하던 오태범이 볼멘소리로 외쳤다.
"경찰 맞습니까? 무죄 추정의 원칙은 키우는 애완견한테 밥으로 줬나요?"
'또 실수했구나. 하필 내가 당직일 때 이런 일이 터져가지곤.'
오연화가 맞장구를 쳐주자 신나서 말을 풀던 이혜인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무슨 소립니까? 사건이 특별하잖아요."
이혜인에겐 다행스럽게도 최영실 의원이 끼어들었다.
"일반인이 노상 방뇨한 것과 대통령이 노상 방뇨한 게 영향력이 같습니까?"
"그게 무죄 추정의 원칙을 무시하는 거랑 뭔 상관입니까? 영향력이 어떻든 간에 법은 공평하고 공정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오태범도 꽤 화가 난 상태여서 평소처럼 그냥 참지 않았다.
"지금 이 계기를 빌어 젠더 기반 범죄에 관해 토론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무죄 추정의 원칙이 나옵니까?"
최영실 의원이 목청을 키워 외쳤다.
"아닌데요?"
오태범도 지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키웠다.
"두 분 다 진정하시고요. 현재 도라익 선수는 성추행 신고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중입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도라익 선수는 아직 범죄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젠더 기반 범죄에 관해 전방위적인 토론을 하려는 자리가 아니고, 도라익 선수의 이번 사건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분석하고 토론하는 자립니다. 최 의원님이 평소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관심이 지대하다 보니 주제를 너무 크게 잡으신 것 같습니다."
오태범은 상대가 국회의원이라 조금 쫄리는 부분이 있어서 냉큼 입을 다물었다. 최영실 의원 역시 보좌관이 그새 준비한 자료를 읽느라 논쟁을 멈췄다.
"김영한 교수님 의견을 청해 듣겠습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면 전 할 말이 없습니다. 아직 죄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뭘 분석하고 말고 합니까."
"그럼 이런 가설을 세우죠. 만약 도라익 선수가 유죄로 판명 난다면 어떤 사회적 파장이 있을까요?"
'멍청한 년. 이대로 나가 죽어.'
이혜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자책했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운 좋게 여청팀에 들어가 앞날이 창창한 상황인데 잠깐의 말실수로 위기에 놓였다.
잘 풀리면 본전이고 경찰 이미지에 조금이라도 타격이 오면 윗분들의 눈 밖에 나서 평생 본청에 발을 못 들일지도 모른다.
"그건 상상하기도 싫네요."
미리 면죄부를 마련한 김영한 교수가 그제야 말 보따리를 풀었다.
"비록 데뷔한 지 만 3년도 안 된 선수지만, 누군가는 평생 이룩하지 못한 성과를 이미 이뤘습니다. 사회적 영향력만 따지면 아마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에 당당히 들지 싶고요. 청소년과 축구 팬들에겐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축구에 관심이 없고 축구 경기를 안 보는 사람도 도라익의 하이라이트 영상은 찾아볼 정도로 현재 도라익은 모든 사람의 관심사 중 높은 순위에 있다.
"차라리 이 일로 사람들이 실망해서 등을 돌린다면 그건 도라익 선수 개인의 피해로 끝납니다. 그러나 도라익을 좋아한 나머지 오히려 옹호하고 응원하면 사람들의 법적 도덕적 잣대가 비틀리지요. 간단한 예를 들어 아주 크고 단단한 팬덤을 보유한 연예인이 음주운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팬들이 '음주운전이야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실수 아니냐'는 식으로 물타기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분별력이 부족한 청소년들이 음주운전의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음주운전을 범죄가 아닌 그저 실수로 인식할지도 모릅니다."
"되게 공감이 가는 발언입니다."
"아까도 잠깐 언급이 있었지만, 일반인이든 대통령이든 노상 방뇨를 하면 똑같은 처벌을 받는 게 법입니다. 그러나 처벌 이후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완전히 다르죠. 일반인이 노상 방뇨를 하든 말든 무관심한 게 대부분 사람이지만, 대통령이 노상 방뇨를 했다면 누구나 관심을 갖습니다. 유명인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법적으로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건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도덕과 국민 정서적으론 똑같은 잣대를 들이밀 수 없죠."
오태범은 도라익을 위해 뭐라도 항변하고 싶지만, 김영한 교수의 말엔 잡을 꼬투리가 없었다.
"교수님이 제 속에 있는 말을 다 해주셨군요."
자료를 다 읽은 최 의원이 기세등등하게 등판했다.
"법으로 하는 처벌은 더 엄해서도 경해서도 안 되겠죠. 그러나 이 사건을 대하는 데 있어 우리는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젠더 기반 범죄를 줄이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저기요. 무죄 추정의 원칙을 모릅니까?"
오태범이 만만한 최 의원을 물고 늘어졌다. 정치하는 인간이어서 그런지 말을 아주 자극적으로 하는 버릇이 있었다.
"범죄가 사실이라는 전제로 얘기하는 거 아닙니까?"
"의원님은 전제가 아니라 사실로 알고 말하는 것 같아서요."
"아닙니다. 전제를 두고 하는 얘기였습니다."
"그럼 의원님이 말씀하신 이번 일은 어떤 일을 말하는 겁니까? 일어났다는 게 확인되지도 않은 상상 속의 일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는 말입니까?"
궁지에 몰린 최 의원은 김영한에게 도움의 눈빛을 쐈다. 그러나 김영한은 똑똑한 사람이다. 성추행 사건은 흐지부지 끝날 가능성이 크기에 괜히 자극적인 말을 했다간 역풍을 맞기 십상이다. 설사 죄가 확인되었다고 해도 현재 도라익의 인기로 볼 때 금세 잊힐 가능성이 크니 말을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잠시만요.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다."
궁지에 몰린 최 의원을 구한 건 오연화였다.
"여성분의 신분이 밝혀졌습니다. 보아스의 비서가 아니라 유럽에서 아주 유명한 슈퍼모델이라고 합니다. 이 경위께선 이 일을 어떻게 봅니까?"
"피해자의 신상을 캐는 자체가 2차 가해입니다. 피해자가 유명인이라고 해서 신상을 공개해도 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아니. 무죄 추정의 원칙! 원칙! 지키라고 있는 게 원칙 아닙니까? 왜 아까부터 무죄 추정의 원칙을 무시하고 자꾸 피해자 타령을 합니까? 도라익 선수도 실명이 다 공개됐는데, 그럼 도라익 선수는 2차 가해를 받아도 쌉니까?"
오태범의 태클에 이혜인 경위가 울상을 지었다. 자신은 그저 배우고 외운 대로 말하는 것뿐인데 왜 자꾸 나한테만 이러는지 너무 원통했다.
"여자가 가짜 신분을 만들어 일부러 접근했는데도 이번 사건이 기획된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하는 겁니까?"
오태범의 말에 이혜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맞습니다. 당연히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그럼 왜 굳이 성추행이 사실이란 가정으로만 토론하는 겁니까? 여자가 일부러 접근해서 도라익 선수를 모함한다는 가정을 하고, 최 의원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새로 온 게스트들에게 중앙 자리를 양보하고 구석으로 밀려난 분을 풀려는 듯이 오태범이 폭주했다.
'라익아, 너 그런 놈 아니라는 데 내 인생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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