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
알론소의 다소 '괴이한' 전술로 한국은 결승에 진출했다.
한국은 다른 팀의 전술을 확인하고 수비 대책을 세울 수 있지만, 다른 팀은 한국에 똑같이 하지 못했다.
좀 더 많은 경기가 표본이 되면 알론소의 전술도 분석할 수 있겠지만, 고작 서너 경기로 분석되기엔 알론소의 전술이 평범하지 않다. 분석했다고 쳐도 대책을 세우고 전술을 숙지할 시간이 없다.
- 오늘은 정석으로 나오는데요?
결승에서 알론소는 복잡한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도라익을 원톱으로 올리고 4-5-1 포메이션으로 수비에 치중한 반격 전술을 사용했다.
결승은 시상대에 올라갈 때 목에 걸린 메달이 그냥 은인지 아니면 금으로 도금한 은인지의 차이가 아니다.
얇은 금도금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거운 명예의 차이가 있다.
당연히 20대 초반인 선수들의 멘탈로 감당하기 힘들다. 필경 모든 선수가 도라익과 같은 정신 상태를 타고날 수 없다.
그렇기에 알론소는 오히려 간단한 전술을 사용했다. 모든 선수는 수비 시 한 개 롤, 공격 시 한 개 롤을 수행하면 된다.
- 도라익 선수, 공을 잡습니다.
공을 잡은 도라익이 돌파를 시도했다. 그런데 페이크에 속아 넘어진 나이지리아 선수가 긴 다리를 쭉 뻗어 도라익의 진로를 방해했다.
도라익이 실수로 밟기라도 하면 부상으로 실려 나갈 위험한 동작이었다. 도라익으로선 프리미어리그는 물론, 대표팀 경기에서도 처음 닥친 일이었다.
상대가 뻗은 다리를 피하고자 도라익은 왼쪽으로 한 번 더 드리블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선수가 접근했다.
대부분 공격수는 득점 존이 있다. 다른 위치보다 훨씬 높은 확률로 골이 되며, 그 존에 들어서면 심리적 안정으로 다른 곳에서 공을 잡을 때보다 훨씬 훌륭한 모습을 보인다.
도라익에게도 도라익 존이 있다. 도라익 존에서 슈팅이 골이 되는 확률은 다른 공격수들의 득점 존보다 10% 정도 높다.
나이지리아 선수들이 기를 쓰고 도라익을 막는 이유다. 도라익이 드리블로 도라익 존에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게 수비의 첫 단계다.
드리블로 자신의 존에 들어가지 못할 경우, 도라익의 남은 선택은 공 없이 자신의 존에 들어간 다음 패스를 받는 것이다.
수비수 세 명이 자신한테 붙자 도라익은 바로 변경태에게 패스했다. 건장한 체격의 수비수 한 명이 변경태를 수비했다.
공을 빼앗길 것 같다는 생각에 변경태는 바로 가까운 선수에게 패스했다. 그러자 곧 다른 수비수가 공을 잡은 선수에게 가까이 붙어 수비했다.
나이지리아 수비의 두 번째 단계는 바로 공을 잡은 선수가 도라익한테 패스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었다.
도라익에게 전담 마킹을 붙이는 건 어려운 일이다. 프리미어리그 수준의 선수들도 어려워하는 일을 20대 초반의 나이지리아 선수들이 해낼 리 만무하다.
그렇기에 패스 자체가 없도록 공 잡은 선수를 철저히 수비했다.
전술의 귀재 알론소는 나이지리아의 수비 전술을 단번에 알아챘다. 대책도 금방 떠올렸지만, 도라익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해서 바로 알려주지 않았다.
도라익이 고른 건 알론소가 떠올린 대책 중 가장 강경한 수단이었다.
새로운 공격 기회에 공을 잡은 도라익은 간결한 돌파로 자신을 수비하려는 선수를 연신 제쳤다. 가장 처음 돌파한 선수를 두 번째로 제치고 나니 소위 도라익 존으로 불리는 구역에 들어갔다.
'그래. 능력이 된다면 뿌리를 잘라야 해.'
나이지리아는 가시덤불을 만들었다. 뿌리는 도라익이 자신의 존에 못 들어가게 방해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파생한 수단이 질척거리는 수비, 공 잡은 선수의 패스를 원천 차단하는 수비, 그리고 아직 확인하지 못한 다른 수비 수단이 있다.
파생된 수비 전술을 파훼하는 건 덤불을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잘린 덤불은 언젠간 자라게 돼 있다.
가장 좋은 건 가시덤불을 뿌리째 뽑는 건데, 그러려면 도라익이 돌파로 자신의 존에 들어가야 한다.
드리블로 존에 들어간 후 지쳐서 골을 못 넣더라도 의미가 매우 크다. 나이지리아의 수비 전술은 뿌리 자체가 부정당했기에 시간이 흐르면 파생된 수비 전술이 뇌리에서 사라지게 된다.
- 도라익 선수, 동료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 벤치에서 뭔가 지시를 내려야 하는 타이밍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쉽게도 해설은 강철민과 박만호의 강박 조합이 아니었다. 만약 강철민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도라익이 공을 혼자 잡고 돌파에 열중한 것에 훌륭한 핑계를 찾아냈을 것이다.
알론소는 선수 넷을 돌파하고 어처구니없는 슛을 때리고 돌아오는 도라익에게 엄지를 내밀었다.
알론소의 엄지를 확인한 도라익이 혀를 쏙 내밀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쉽게도 중계진은 슈팅 장면을 재생하느라 이 화면을 모니터로 송출하지 않았다.
전반 35분.
도라익이 공을 잡자 나이지리아 선수들이 슬슬 움직였다.
둘이 함께 수비하면 한꺼번에 둘이 제쳐진다. 나이지리아 선수들은 일정 간격을 유지한 채 한 명씩 도라익의 앞을 막아섰다.
도라익은 연속으로 선수 두 명을 제쳤다. 그리고 세 번째 선수를 만났을 때 돌파 대신 패스했다.
도라익의 패스를 받은 건 변경태였다. 변경태 주변엔 한국팀 선수가 두 명 더 있었다.
나이지리아 수비수는 두 명밖에 없었다.
패스한 도라익이 페널티 박스 안으로 달렸다. 도라익을 수비하던 선수들이 당황했다.
2단계 전술대로라면 변경태를 비롯한 세 명의 선수를 철저히 수비해야 한다. 그런데 도라익한테 너무 많은 수비 역량을 투입해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공 잡은 선수를 제쳐두고 도라익만 수비하자니 누가 뭘 해야 할지 헷갈렸다.
도라익이 혼자 힘으로 자신의 존에 거듭 들어가면서 나이지리아 수비 전술의 뿌리를 흔든 덕분이었다.
변경태는 두 선수와 패스를 주고받으며 수비수 두 명을 가볍게 벗겨내고 아무런 방해도 안 받는 상황에 편한 크로스를 올렸다.
- 로켓 도라익입니다.
인간의 몸은 태어날 때부터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오른손잡이는 오른쪽으로, 왼손잡이는 왼쪽으로 균형이 틀어질 수밖에 없다.
어려서부터 양발 훈련을 한 도라익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몸의 균형이 틀어져서 프로로 뛰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은 도라익은 뼈가 갈리고 이가 부서지는 훈련을 했다.
손상한 근육은 물론, 거듭된 자극으로 신경도 회복했다. 몸이 사고 전보다 더 균형 잡혔다.
덕분에 점프력이 향상했고, 순발력은 그대로나 스피드도 조금 빨라졌다.
- 골! 멋진 골입니다.
도라익의 골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다른 선수의 도움으로 골을 넣었다는 것. 더 중요한 하나는 소위 도라익 존으로 불리는 지역이 아닌 위치에서 발이 아닌 머리로 골을 넣었다.
그냥 가시덤불을 뿌리째 뽑은 게 아니라, 아예 그 지역의 땅을 다 갈아엎은 셈이다.
전반 36분.
경기가 끝났다. 한국팀이 승리했다.
#
"라유가 잘못했네."
"삼촌이 조카 울리면 안 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장난감 갖고 논 게 죄야?"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라유는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했고 거기에 푹 빠졌다. 그때 무지가 와서 자기 장난감이니 돌려달라고 했다.
문제는 무지가 영어로 말했고, 라유는 영어를 모른다. 언어의 벽은 38선의 철조망처럼 둘의 소통을 완벽히 차단했다.
결국, 말이 안 통해 답답했던 무지가 울어버렸다.
"그럼 라유 영어 학교 보내야겠다."
라진이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싫어!"
라유는 병원보다 학교를 더 싫어했다. 제일 좋아하는 형과 누나들이 맨날 사라지는데, 그 이유가 학교다.
"학교 가면 이 다 빠진 사감 선생이 회초리로 다리 때리는데."
라진의 말에 라유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에그. 철 좀 들어라."
보다 못한 라연이 나서 중재했다.
#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나 싶었는데, 일이 크게 번졌다.
"형수님, 라유 영국 가서 영어 배우고 싶어요."
학교 가기 싫었던 라유가 가출을 결심했다. 그러나 냉장고 안의 우유 꺼내는 데도 형과 누나들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임을 자각하고 꾀를 냈다.
"영국에도 학교 있는데."
라진이 킥킥거리며 동생을 놀렸다. 라희 일이라면 소매 걷고 발 벗고 나서는 라진이지만, 라유한테는 짓궂은 장난을 일삼았다.
"나 학교 안 가. 큰형처럼 축구 할 거야."
"큰형도 학교 다니다가 축구 했는데. 학교 안 가면 축구 안 시켜줘."
라유가 또 울먹였다. 힘으로도 안 되고 말로도 안 되니 설움만 늘었다.
"라진이 그만해."
어머니의 말에 라진이 바로 찌그러졌다.
"라유야. 영국 가면 엄마아빠랑 형이랑 누나랑 자주 못 보는데 괜찮겠어?"
"영상통화로 보면 되잖아."
"하루에 한 번만 볼 수 있어."
어머니의 말에 라유가 망설였다.
"이참에 함께 영국 가서 좀 놀아요.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가족 모두요."
엘이 제안했다.
"난 훈련해야 해."
미래의 조선 4번 타자, 홈런 때리는 도깨비방망이 도라현이 말했다.
"아빠도 시간 안 날 거야."
어머니가 말했다.
"아빠는 예전에 스페인에 간 적 있잖아."
도라익이 말했다. 여행이 아니라 훈련하러 간 거긴 하지만, 가족 중 도라익 빼고 유일하게 유럽 다녀온 사람이다.
"닷새 정도 쉬는 건 가능해."
도라현이 말을 바꿨다. 생각해 보니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기 전에 유럽에 가서 이국타향의 정취를 잠깐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라진은 유럽 여행이라는 말에 당연히 좋아했고, 라희 역시 비행기 탄다는 말에 기뻐했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라유도 덩달아 즐거웠다.
'진즉에 이럴걸.'
가족들의 즐거운 모습을 보며 도라익이 반성했다.
도민준은 야구를 열심히 했다. 팔을 다쳐 타자로 전환했고, 2군 붙박이가 됐음에도 게으름을 전혀 피우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도라익 역시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빠를 보고 자란 내가 아빠를 닮듯이, 아들도 날 닮을 수 있다. 축구는 생활의 일부일 뿐이다. 언젠간 은퇴해야 하고, 감독이나 코치를 하더라도 역시 언젠간 그만둬야 한다. 늘 내 곁을 지키는 건 소중한 가족밖에 없어.'
"이번 여행 내가 풀코스로 쏜다."
금메달을 따며 연금을 타게 된 도라익이 배에 힘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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