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도라익
오창범은 침대와 의자 중간 그 어디에 있으나 의자라는 이름을 쓰는 과학의 결정체 위에 누워 근육을 이완하며 월드컵 조 추첨을 시청했다.
인간은 여러 이유로 등급을 나누는 걸 정말 좋아한다. 심지어 월드컵 같은 세계적인 축제에도 32개 팀을 4개 등급으로 나눠 사람 서럽게 군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국은 3등급 판정을 받았다. 최소 같은 조에 전문가들이 한국보다 약하다고 판단한 팀이 하나는 있다는 뜻이다.
"젠장. 좋아하기는."
한국을 뽑은 E 그룹의 1티어 스페인과 2티어 멕시코 대표단이 환호했다. 한국을 대표해 추첨식에 간 차 감독과 이혁신 등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라익이한테 일러바쳐야지."
오창범은 화난 마음에 4티어가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도라익의 방으로 갔다. 도라익은 오창범의 시력 보호 안경을 쓰고 패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라익아, 뭐 해?"
"프리킥 연구 중이야. 프리킥만 잘 넣으면 어떤 팀도 이길 수 있잖아. 우리 대표팀이 수비는 그래도 나쁘지 않잖아."
한국의 수비는 나쁘지 않다. 단, 미드필더의 실력이 부족해 두 유형의 팀에 큰 약점을 보인다. 하나는 일본이나 스페인처럼 짧은 패스로 빠르게 밀고 올라오는 팀. 하나는 브라질처럼 개인 능력이 출중한 선수가 많은 팀.
스페인과 멕시코 대표단의 만행을 알려 같이 잘근잘근 씹으려던 오창범의 열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본인도 괜찮다고 그러고 최경호도 문제없다고 그러고 심지어 전문가인 토마슨 박사도 나쁜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누가 봐도 도라익의 열정은 지나친 감이 있다.
"그래. 뭐 연구 성과가 있어?"
"조금 있는데 실전에서 확인해야 해."
"뭔데?"
토마슨 박사는 오창범에게 별 조언을 주지 않았다. 최경호는 도라익이 하려는 일을 최대한 도우라고 했다.
"프리킥이 들어갈 때 키커를 관찰하면 대부분 두 가지 유형이야. 하나는 공만 보는 유형, 하나는 골대와 키퍼만 보는 유형."
"응? 공을 안 보고 찬다고?"
"사실 공만 보는 유형이 대부분이야. 그런데 진짜 멋지게 들어간 프리킥 중 일부는 공을 안 보고 골대만 보는 게 몇 개 있어."
"그래서 네가 얻은 결론은?"
"머리에서 계산을 끝낸 거야. 고명준 선배가 가끔 고개도 안 들고 정확하게 패스하잖아."
"그거 꽤 많이 틀려. 네가 대표팀 오고 나서 경기가 잘 풀리니까 성공률이 높아진 거지."
"어쨌든, 프리킥에 성공하려면 머리에서 공과 골대 그리고 키퍼 위치를 정확히 그려야 해. 그러면 뇌가 알아서 다리를 얼만큼의 힘으로 어떤 각도로 휘두르고 임팩트 순간을 얼마나 길게 줄지 계산하는 거야. 마지막에 그 답을 몸으로 표현하는 거지."
언뜻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론이지만, 프리킥에 일가견이 있는 오창범에겐 마냥 허황하게 들리지 않았다.
"근데 그걸 안다고 프리킥이 절로 들어가는 건 아니잖아."
"아니지. 그러니까 훈련으로 공식을 몸에 새겨야지. 머리로는 정확히 모르지만, 훈련을 통해 데이터를 축적하면 몸이 알고 뇌가 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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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가 걱정이야."
제임스가 말했다. 영국 국적이긴 하지만, 어릴 때 브라질에서 생활하며 애국심 같은 건 별로 없었다.
게다가 대표팀으로 가서 월드컵에 출전하고 싶다는 대부분 축구 선수가 갖는 포부도 없어서 만사태평인 인간이다.
"왜?"
"내가 누구야. 열정의 나라 브라질에서 온 제임스잖아. 브라질의 열정은 진짜 대단해. 큰 장작처럼 뜨겁고 또 오래 가지. 근데 그게 꼭 좋은 건 아니야."
"그게 왜?"
"큰 장작이 다 타면 재가 한 줌밖에 안 남는 거 알아? 잘 타는 장작일수록 재가 적어. 도우의 저 열정이 월드컵까지 갈지, 혹시 월드컵까지 가더라도 얼마나 지속할지 걱정이야. 큰 열정일수록 사라질 때 더 허무하거든."
"내가 널 알고 들은 중에 가장 철학적인 얘기야."
"예전에 잠깐 사귄 여자가 말해준 거야. 어디 대학교수라고 그랬는데."
"그럼 넌 이젠 여자 만나는 게 지겹겠네?"
"그렇진 않아. 다만 예전처럼 찾아 나서지 않고 오는 여자만 받아줄 뿐이야."
오창범은 속으로 온갖 상욕을 퍼부었다.
"도우가 어제 나한테 찾아와서 흥분하면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 묻더라. 가끔 내가 정말 아닌 상황에 킬 패스를 하거나 골을 넣잖아. 그때 어떤 느낌인지 묻는데, 조금 무서웠어."
"뭐가?"
"나라면 그런 거 고민할 시간에 여자나 만날 텐데. 저놈은 도대체 뭘 바라보고 어린 나이에 저리 힘들게 사는지 걱정되더라고."
'훈련이랑 경기 때만 보는 너도 그런데, 같이 사는 난 어떻겠어.'
오창범은 프리킥에 성공하고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는 도라익을 바라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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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범은 라미스의 크로스 훈련을 도왔다. 스토크시티는 예전부터 선수끼리 단합이 잘 되는 팀이었다. 그러한 전통은 버틀랜드나 샘 클루카스를 비롯한 노장들이 은퇴한다고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엔 오창범의 도움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라미스도 이젠 당연하게 여겼고, 마찬가지로 오창범이 주전 자리를 확고히 차지했음에도 질투하지 않고 수비 훈련을 자주 도왔다.
단, 오창범의 플레이에 이렇다 저렇다 평가나 참견은 절대 안 했다.
"라미스, 형. 와서 날 좀 도와줘."
"도우, 나 훈련 중이야."
"알아. 근데 그냥 크로스 올리기보다 받는 사람이 있는 게 더 낫잖아."
이미 맥자넷과 토미 그리고 우디르가 왼쪽 크로스 도우미로 대기하고 있었다. 라미스도 도라익을 도우며 함께 훈련하는 게 효과도 좋고 더 오래 훈련할 것 같아서 바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런데 다른 선수가 크로스 올리는 동안 쉬면서 더 오래 훈련할 것 같다던 라미스의 예상은 오산이었다.
도라익은 최소 3명의 선수가 동시에 크로스를 올릴 것을 요청했다.
"무슨 훈련인데?"
"공이 여러 개 동시에 올 때 어느 공이 헤딩하기 가장 편한지 판단하고 그걸 골대에 넣는 훈련이야. 판단력이랑 순간 집중력 그리고 헤딩 기술까지 동시에 훈련할 수 있잖아."
"천재와 사이코는 동의어가 아닐까?"
라미스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중얼거렸다.
"아니야. 쟤는 그냥 우연히 둘 다 타고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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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봉구야. 나 왔다."
고등학교 동창 몇 명이 도라익의 할아버지 도봉구 씨의 집에 모였다. 저녁 8시에 스토크시티가 홈에서 맨시티와 대결하는 23라운드 마지막 경기가 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운전해 왔어? 네 나이에 참 쉽지 않았을 텐데."
"시발, 좀 그만해. 빠른 생일이라고 노땅 취급하는 놈은 내가 세상에 니들밖에 못 봤다."
"봉구 얼굴 봐라. 우리가 동갑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냐."
원래부터 동안인데 요즘 집안에 좋은 일만 가득해서 주름이 오히려 사라지는 도봉구 씨다.
"자식, 축하한다. 어린 나이에 독립도 하고."
원래 살던 집은 도민준에게 팔고 노부부 둘이 따로 나왔다.
"요즘 제수씨 밤마다 괴롭겠네. 우리 봉구 힘이 약해도 체력은 짱이잖아."
"너 그러다 제수씨한테 맞고 운다?"
"에이. 내가 이래도 해병대 수색대 나왔다. 군 면제 봉구 씨랑 같을까?"
"여보. 상길이가 당신이랑 맞짱 뜨겠대."
"제수씨, 농담입니다. 제가 제수씨 진짜 존경하는 거 아시죠?"
김상길의 너스레에 친구들이 즐겁게 웃었다.
"장 보러 나갔어. 반 시간 정도 있어야 올 거야."
"어휴. 괜히 쫄았네."
꽤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은 시원한 맥주에 마른오징어랑 기름에 닦은 땅콩과 고등학교 때 추억까지 안주 삼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근데 봉구 넌 어떻게 라익이를 축구 선수로 키웠어? 난 민준이처럼 야구 할 줄 알았는데."
"상길이 넌 봉구랑 제수씨 러브 스토리 아직 모르지?"
"알아. 고등학교 졸업식 날 봉구가 술 처먹구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러고 바로 모텔 끌고 갔잖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 너두 아는 줄 알았는데."
"뭔데?"
김상길이 귀를 쫑긋 세웠다.
"사실 그날 이 새끼가 다른 여자한테 고백했어. 마침 둘 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게 됐고 그래서 용기를 낸 거지."
"그런데?"
"거절당했어. 얼굴도 잘생겼겠다. 키도 이만하면 작지 않겠다. 공부도 꽤 했겠다. 자신만만해서 고백했는데 차인 거지."
"왜? 봉구가 이름 빼면 완벽하잖아."
"그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 따로 있대. 지금부터 하이라이트야."
김상길은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집중했다.
"그 여자가 좋아한 남자가 바로 월드컵에 골든골 넣고 반지 세리머니 한 걔야."
"응? 근데 와이프가 우리 학교 출신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우리 봉구 씨가 열 받은 거지. 결혼하지도 못할 남자 때문에 자길 찼다는 거 아냐."
"고백 실패하고 술 처먹고 제수씨한테 고백했던 거야?"
"사실 제수씨가 그 전부터 우리 봉구 좋아했어. 근데 이 새낀 다른 여자 때문에 제수씨가 보내는 시그널을 무시했던 거지."
"그래. 뭐 그건 알겠는데, 왜 하필 라익이야? 왜 훈련도 안 하고 150 던지는 우리 라익이를 축구 선수로 만들었냐고. 이 빌어먹을 새끼야."
야구팬인 김상길 씨가 진심으로 화냈다.
"원래는 민준이를 축구 선수 시키려고 그랬지. 그런데 민준이가 8살 때 천솔이 만났잖아. 그때 천솔이가 어린이 야구단 주장이었어. 민준이가 글쎄 두 끼나 굶으면서 야구 하겠다고 떼를 썼다니까."
그때, 북풍과 얼음의 여왕도 못 만들 으스스한 한기가 거실을 스산하게 덮쳤다.
"우리 봉구 씨. 내가 첫사랑이라고 그러지 않았어?"
고등학교 동창들 안줏거리 장만하러 나갔던 태권도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 도민준을 출산하고 고작 사흘 만에 경기에 나가서 1라운드 승을 일궈낸 여걸, 도민준과 도민준의 아이들에게 훌륭한 스포츠 유전자를 제공한 최연희 씨가 등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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