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구단의 사정
2031년 1월 13일.
영국 어느 구단의 회의실.
"또 실팹니까?"
타일러 윌슨이 말했다. 프리미어리그 첫 미국인 감독에 첫 흑인 감독. 그러나 이번 시즌 중도에 취임한 윌슨의 운은 별로 좋지 못했다.
"선수가 원하는 조건을 구단에서 도저히 맞춰줄 수 없습니다."
"뭐 늘 그렇듯이. 의미는 없지만, 이유나 들어보죠."
"챔피언십으로 강등 시 계약 해지를 조건으로 걸었습니다."
이적료 2천만 파운드나 주고 고작 반 시즌 쓸 선수를 데려온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현재 프리미어리그 30-31시즌은 22라운드 진행했다. 찰턴 애슬레틱과 왓포드가 16점으로 19위와 20위를 차지했고, 윌슨 감독의 팀이 18점으로 17위 팀과는 5점 차이를 보이며 강등권에 머물러있다.
가장 큰 문제는 22라운드 동안의 데이터다. 11골 32실점으로 두 경기당 한 골을 겨우 넣으며 5승 3무 14패의 초라한 성적밖에 내지 못했다.
거기에 박싱데이의 부상까지 겹쳐 남은 공격수가 한 명밖에 없다.
"찰리 아담이 10일 정도면 복귀할 수 있습니다."
"헤딩만 잘하는 선수 둘을 데리고 무슨 전술을 짜란 말입니까."
5승 3무 중 2승 1무는 12월 초에 취임한 윌슨이 따낸 것이다. 그러나 박싱데이에 주전 공격수가 연이어 다치면서 현재 5경기 연패 행진을 하고 있다.
취임하자마자 11점으로 꼴등이던 팀을 18점으로 만들어 강등권 탈출을 이뤄냈었기에 구단 운영위원회는 윌슨의 능력에 꽤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최근 5경기 연속 패배는 두 공격수의 부재로 피할 수 없는 재난이었다.
"1월에 이적 시장이 열리면 바로 제가 원하는 공격수를 반드시 데려온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이대로는 마크 휴즈가 와도 어렵습니다."
마크 휴즈는 일명 구급대원으로 불리는 잔류 전문가다. 아무리 형편없는 팀도 휴즈한테 맡기면 최소 한 시즌은 문제없다는 말이 돌 정도다.
너무 소극적인 경기 운영으로 팬들의 원성이 자자해 요즘 집에서 놀고 있지만, 강등 위기에 놓인 아무 팀에 내일 당장 취임해도 이상하지 않은 감독이다.
"미스터 윌슨. 매우 안타깝게도 우리가 원하던 선수는 아시안컵에서 발목을 심하게 다쳤습니다. 최소 반년이 있어야 그라운드로 복귀할 수 있죠. 이적료에 선수 대우까지 협상이 끝난 시점에 이런 사고가 생겨서 참 안타깝습니다."
"당신들이 한국팀은 8강에서 끝날 거라고 장담하지 않았습니까? 부상이 없었더라도 제가 원하는 시점에 팀에 합류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들이 원했던 선수는 박창식이었다. 득점력보다는 전술적인 쓸모가 훨씬 큰 포워드. 박싱데이에 부상으로 시즌 아웃 된 카메룬 출신의 공격수 블루스를 대체하기에 딱 좋은 인선이었다.
박창식의 부상 소식을 접한 후 이적을 취소하고 급하게 다른 선수를 찾았다. 그러나 다들 팀의 다급한 사정을 알고 주급을 높게 부르지 않으면 선수한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달았다.
"그럼 제가 리스팅한 일곱 선수 중 하나도 데려올 수 없는 겁니까?"
윌슨은 당장 감독직을 사임해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했다. 이대로는 2년 전에 수술한 심장이 또 고장 날 것 같았다.
"토마스. 영상 틀어 봐."
리모컨으로 TV를 켠 토마스가 영상을 틀었다. 어제 끝난 아시안컵 시상식이었다. 우승팀은 2:0의 승리를 일군 한국팀이었고 최우수 골잡이는 5골의 도라익이 되었다.
그리고 대회 MVP 역시 도라익이었다.
이는 호날두와 메시 은퇴 이후 우상의 부재 때문이었다. 잘하는 선수가 많긴 한데 다른 선수를 압도하는 절대적 우상의 부재로 축구의 화제성이 13% 하락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아시아 지역 역시 손 선수의 은퇴로 우상의 부재를 겪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 대체 선수로 혜성 같이 나타나서 5골 1도움으로 8강 수준으로 평가받던 한국팀을 우승에 이끈 도라익에게 관심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러한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로 가장 공헌도가 높은 김춘호 대신 도라익이 대회 MVP로 선정되었다.
"저 선수는 프리미어리그 레벨이 아닙니다."
아시아 최고 레벨 대회의 준결승과 결승에서 2경기 5골 1도움. 카드 유도 7장, 2명이 카드 누적으로 퇴장.
데이터만 보면 참으로 대단한 선수다. 그러나 경기 과정을 5분만 지켜보면 누구라도 도라익이 빅리그에 적합한 선수가 아니라는 데 백 퍼센트 동의할 것이다.
"미스터 윌슨. 길게 봅시다. 저 선수는 이제 16살입니다."
구단주의 의미심장한 말에 윌슨은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금 발언은 사실상 이번 시즌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현재 아스널 그리고 토트넘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저 선수와 계약하려면 우리도 서둘러 협상을 시작해야 합니다."
토마스가 적절하게 끼어들어 분위기가 더 경직되는 걸 막았다.
"잠재력이 큰 선수임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빅클럽들이 움직이는데 우리한테 기회나 오겠습니까?"
윌슨이 원하는 건 일정 득점력을 갖춘 전술적 움직임이 되는 즉시 전력감이다. 도라익은 윌슨이 원하는 세 조건에 하나도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2경기에서 공격 포인트를 6개나 올린 거로 득점력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하나 득점력이 아무리 좋아도 팀이 득점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면 총알 없는 총이나 다름없다.
매우 안타깝게도 윌슨의 팀은 22경기에 고작 11골을 넣을 정도로 득점 기회를 창조하는 데 인색하다.
"저 선수는 우리 구단에 와서 테스트를 받은 적 있습니다. 계약 협상까지 진행했었죠. 미스터 윌슨이 취임하기 전에 말입니다."
"그땐 왜 계약을 안 했습니까?"
"그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정확한 의사전달을 위해 제 표현이 조금 상스럽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에이전트가 개 잡놈의 사이코패스입니다."
토마스한테서 도라익의 계약 조건을 들은 윌슨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구단주만 묵묵히 바라봤다. 구단주는 이불에 지도 그린 걸 들킨 아이처럼 어색한 얼굴로 윌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임으로 충분히 전달된 미안함에 윌슨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계약 협상은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구단과 최대한 멀어지고 싶은 마음에 윌슨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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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영국 런던.
아스널의 계약 담당 직원이 책상을 탕 내리쳤다.
"미스터 최. 당신은 도대체 계약 의사가 있긴 있습니까?"
"아니. 이 조항만 맞춰주면 그쪽이 말한 계약금과 주급을 다 받아들인다니까."
"이 조항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모릅니까? 그 정도 상식은 유치원 다니는 제 아들도 있습니다."
최경호도 책상을 탕 내리쳤다.
"내 선수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선순지 모릅니까? 아시안컵 골든 슈즈에 대회 MVP입니다. 내 선수는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두 번째 만남이지만, 여전히 불쾌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만 협상을 종료하겠습니다. 나가는 길은 알아서 잘 찾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최경호는 패드를 가방에 넣고 서류도 꼼꼼하게 챙긴 후 작별 인사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아스널 계약 담당은 최경호가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씩씩거리며 화를 가라앉혔다.
밖으로 나간 최경호는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도라익을 도쿄로 보내느라 몰고 다니던 차를 팔았다. 그러고도 뮐러한테 손을 벌려서 겨우 왕복 티켓을 마련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최경호는 자아가 확고한 걸 넘어서 금강불괴 수준이다. 그러나 한두 사람도 아니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또라이로 취급하니 굳건한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낙심하여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때 전화기가 울렸다. 최경호는 이어폰을 귀에 장착한 후 버튼을 눌렀다.
"미스터 최. 윌슨 감독입니다."
"혹시 제게 용건이 있습니까?"
"도라익 선수와 계약 협상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최대한 빨리 만나려고 합니다."
"어디로 갈까요?"
효율을 중시하는 미국인은 바로 본론에 들어갔고 실용적인 성격의 독일인은 용건에 관해서만 대화했다. 거기에 최경호의 유전자 배열에 새겨진 8282번 염색체까지 작용하여 둘은 바로 런던의 한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 2시간 뒤. 최경호는 런던 외곽의 커피숍에서 윌슨과 대면했다.
250km쯤 되는 길을 고작 2시간 만에 주파했다는 건 통화 당시 윌슨이 이미 출발했다는 뜻이다. 최경호는 전에 없던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무 개가 넘은 구단과 접촉했는데 계약을 성사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최경호의 당당한 대답에 윌슨은 작은 희망의 불씨가 튀었다. 혹시 진짜 뭔가 대단한 선수가 아니면 에이전트가 이렇게까지 당당할 수 없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이쪽도 조건이 있습니다."
말하고 나서 윌슨은 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그간 받은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최근 약간 충동적인 경향이 심해졌다.
반면, 최경호는 꽉 쥔 주먹을 테이블 밑에 숨겼다. 그간 협상에 실패할 때마다 느꼈던 서글픔이 한꺼번에 치고 올라와 몸이 덜덜 떨렸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느린 호흡으로 떨림을 겨우 멈춘 최경호는 최대한 평이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갔다.
"조건부터 들어보죠."
"주급은 2천 파운드. 출전 수당 역시 2천 파운드입니다. 출전 수당이 주급보다 많으면 안 된다고 리그운영위원회의 멍청이들이 규정했거든요."
끝을 모르는 금전 경쟁을 조금이라도 식히기 위해 리그운영위원회는 최근 새로운 규정을 여럿 내놓았다. 문제는 돈을 펑펑 쓰는 구단보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약체팀들이 규정으로 손해 본다는 것이다.
"끝입니까?"
"팀이 강등해도 계약 해지가 없는 계약을 제안합니다. 대신 강등 시 주급을 디스카운트하는 일이 없도록 다음 시즌 재계약으로 올리겠습니다."
팀이 강등하면 주급을 최소 20%에서 최대 50%까지 깎는다. 이는 계약서에 반드시 삽입해야 하는 조항으로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감독과 코치도 예외는 아니다.
윌슨은 재계약을 언급하면서 강등 시 계약 해지라는 조항을 넣는 걸 미리 차단했다.
"잠시만요."
최경호는 도라익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비행 중인지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음성 안내만 들려왔다.
"계약 해지는 없더라도 이적은 가능한 거겠죠?"
"그럼요. 계약 해지를 하면 선수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일부러 강등팀에 와서 몸값을 올리고 대형 계약을 노리는 투기꾼이 가끔 있습니다. 우리 팀도 최근 몇 명 만났죠."
"계약금은요?"
"계약금 최대치가 주급의 50배입니다. 10만 파운드로 할 거고, 구단주가 소유한 저택 중 하나를 무료로 임대합니다."
저택 임대는 윌슨이 부린 작은 심술이다. 문자로 받은 협상 조건에는 저택 공여에 관한 조항이 아예 없었다.
"좋네요."
최경호든 도라익이든 애초에 주급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구단 측에서 원하는 조건을 맞춰주자 남은 문제는 일사천리로 타결했다.
"그럼 득점과 도움 수당 그리고 팀 승리 수당에 관해 얘기해 보죠."
윌슨은 어이가 없어 너털웃음을 지었다. 운이 맞아 한두 골이 가능할지는 모른다. 그런데 이 젊은 에이전트는 자신의 선수가 리그 최우수 골잡이가 될 거라고 착각하는 듯 자신감이 넘쳤다.
"그 부분은 계약 담당 직원과 연결 드리죠."
- 작가의말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죠. 최경호는 원래부터 용감한데 무식 버프로 더 용감해진 케이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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