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의 정체
"저기, 인형 탈 아저씨."
도라익이 구단 마스코트 꿈꿈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따 쉬는 시간에 구속 겨루기해서 일등한테 꿈꿈이 인형 준다는데 맞아요?"
꿈꿈이는 인형 탈의 입을 크게 벌리고 말했다.
"맞아요. 도라익 선수도 참가하게?"
"네, 동생이 꿈꿈이 인형 모으는 게 취미거든요. 오늘 한정판 나온다면서요?"
구단 직원이 시구를 마친 도라익을 VIP 룸으로 안내했다. 거기엔 세 남녀가 있었다.
"반가워요. 도라익 선수. 구단주 대행 노규태입니다."
"드림즈 단장 백승수입니다. 도라익 선수 아버지랑 친해요."
"안녕하세요. 아버지 아들 도라익입니다."
"동백 씨, 손님도 왔는데 어서 땅콩 좀 내와요."
"구단주 대행님. 저 땅콩 알레르기 있다고 몇 번 말씀드려요. 드시고 싶으면 직접 사드세요."
"동백 씨 내 비서 아니었어?"
"제가 땅콩 심부름하자고 공부 열심히 한 거 아니 거든요. 맘에 안 들면 그냥 자르시든가."
기세에 밀린 노규태가 투덜거리며 땅콩 사러 밖으로 나갔다.
"도라익 선수가 이해해요. 어릴 때 처음 해외여행 가려고 비행기 탔는데 갑자기 이륙한 비행기가 돌아왔지 뭐예요. 그 이유가 땅콩 때문이라고 해서 그때부터 땅콩에 엄청나게 집착해요. 일종의 트라우마죠."
잠시 지나고 노규태가 땅콩 한 바구니 들고 우쭐거리며 돌아왔다.
"동백 씨. 나 동백 씨 안 자를 거야. 왜냐면 난 대인배거든. 그런데 땅콩 알레르기 있다면서 동백 씨는 왜 안 그만둬?"
"저 야구선수랑 사귀잖아요. 구단주 대행님은 도대체 아는 게 뭐 있어요?"
톡 쏘아붙인 비서가 밖으로 나갔다.
"도라익 선수. 작년에 광고 하나 찍었죠?"
"네."
"나랑도 찍읍시다. 우리 민준 씨 얼굴 봐서 대우는 섭섭지 않게 해드릴게."
도라익이 명함 하나 꺼내서 노규태한테 건넸다.
"제 에이전트 명함이에요."
"우리 사이에 무슨 중간에 누굴 껴요. 그냥 다이렉트로 정하면 되지."
"저기, 구단주 대행님, 귀 좀 빌립시다."
백 단장이 노규태 귀에 속삭였다.
"데뷔 일 년 반에 세후 수익이 백억 넘는 선수예요. 광고 달랑 하나 찍은 상황에서. 그러니 애송이 다루듯 하지 마세요. 큰코다칩니다."
###
"저 일정 있어서 구속 겨루기 끝나고 바로 떠나야 해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라익이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내내 긴장을 늦추지 못했던 노규태가 후 하고 편하게 숨을 쉬었다.
"우리 팀은 돈을 까먹기만 하는데 저 선수는 혼자서 일 년에 백억씩 벌고 그런단 말이지?"
"저 선수가 바로 우리 같은 구단의 돈을 법니다."
"그만큼 구단에 벌어주는 게 있겠지. 그러니까 저 선수 가치가 실질적으로 백억 이상이라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더 뜨기 전에 빨리 회장님께 제대로 보고하고 정식으로 컨택하세요. 저라면 도민준 씨까지 엮어서 모델로 채용하겠습니다. 도라익 선수는 유럽에서 활동하니까 국내 모델 활동은 도민준 씨가 하면 되잖아요."
도라익이 구속 겨루기 이벤트에 모습을 드러내자 참가자들이 웅성거렸다. 아까 편하게 93마일을 던진 걸 봤기에 2등 겨루기가 목표로 변했다.
"부탁인데 도라익 선수는 마지막에 던져주세요."
이벤트 진행자가 속삭였다.
- 자, 드디어 도라익 선수가 마운드에 섰습니다.
- 강 해설이 티켓값하고 여기까지 오느라 태운 휘발윳값이 아깝다면서 경기 다 보고 가자고 한 게 호재로 작용했네요.
- 잠시만요. 어디 이상하지 않아요?
- 그러게요. 뭔가 이상합니다. 근데 뭐가 이상할까요?
키킹으로 다리를 뻗는 동시에 팔이 부드럽게 휘둘러졌다. 어느 순간 도라익의 손에서 벗어난 공이 강한 회전을 품은 채 과녁의 중심과 충돌했다.
"150, 구속이 150 나왔습니다."
치어리더들이 치어리딩 수술을 흔들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나 전광판에 찍힌 150이란 숫자 덕분에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프로 선수의 구속도 140 초반으로 찍히는 마당에 불쑥 튀어나온 150의 구속에 야잘알이든 야알못이든 가리지 않고 술렁였다.
"허리에서 힘 빼고, 그리고 공을 조금 늦게 놔줘."
어느새 다가온 도민준이 훈수했다. 고개를 끄덕인 도라익은 눈을 감고 시뮬레이션을 마친 후 두 번째 공을 던졌다.
- 151, 151이 나왔습니다. 근데 뭔가 이상합니다.
- 그래요. 뭐가 이상해요. 근데 이상하게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어요.
"뒷다리에서 힘 빼지 마. 다리는 10센티 정도 더 벌리고. 어깨는 버티는 거지 힘주는 곳이 아니야."
공 없이 키킹 동작을 하며 보폭을 조정한 도라익이 마지막 투구를 했다.
- 153! 그리고 뭐가 이상한지 알아냈습니다.
- 뭔데요?
- 오른손. 오른손으로 던졌어요.
"이거 몸에 부담이 너무 큰데요?"
세 번의 투구를 마친 도라익이 투덜거렸다.
"구속만 잘 나오면 되는 거 아니야? 너 야구선수도 아니잖아. 이 폼으로 계속 훈련할 것도 아닌데 뭐가 걱정이야."
이벤트 진행자가 순위를 발표하고 노규태가 직접 상품을 나눠줬다. 원래 야구선수들이 하기로 한 절차인데 노규태가 갑자기 고집을 부렸다.
"도라익 선수, 전화기를 두고 갔더라고요."
인형 하나 더 얹어준 노규태가 전화기를 건넸다. 확인하니 받지 않은 전화가 열 통이 넘었다.
"감사합니다."
"에이전트한테 곧 연락이 갈 거예요. 우리 사이 인연을 봐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세요."
상품을 받은 도라익은 경기 다 못 보고 간다고 아버지한테 양해를 구한 후 구장을 떠났다. 팬 미팅 관련하여 회의가 잡힌 탓이다.
"도라익 선수, 저 기억하죠?"
"철민 삼촌?"
"봤지? 나 기억할 거라니까."
"박만홉니다."
"알아요. 늘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경기장 밖에서 팬 미팅 주최 업체가 보낸다는 차를 기다리는데 강철민과 박만호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지금 생방송 중이라. 사석에서야 조카처럼 편하게 대하겠지만, 지금은 해설 입장이에요."
"도라익 선수가 스케줄이 있는 거 같은데 질질 끌지 않고 단도직입으로 묻겠습니다. 오늘 투구 오른손으로 하신 거 맞죠?"
"네."
"왜 오른손으로 하셨어요?"
"저 원래 오른손잡이거든요."
###
함부르크 구단.
새로 함부르크의 식구가 된 아르센은 자료 백업의 중임을 명받았다. 하드디스크의 노화에 따른 자료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전자 파일로 된 자료들을 백업하는 동시에 중복 자료를 확인해 삭제하는 꽤 무미건조한 일거리다.
그러나 축구 광팬인 아르센은 구단의 자료와 영상들을 확인하며 즐겁게 일했다.
"두라이크? 설마 스토크시티의 도우?"
파일명을 확인한 아르센이 흥분했다.
"우리 구단에서 첫 테스트를 했다고 하더니, 사실이었어."
아르센은 냉장고에서 가장 좋아하는 꿀 음료를 꺼내고 컴퓨터 앞에 정좌했다. 그리고 영상 파일의 등급을 확인했다.
"좋았어. 봐도 되는 파일이야."
캔을 따고 한 모금 마신 아르센은 떨리는 손으로 영상을 클릭했다. 지금보다 왜소하고 어려 보이는 도우가 화면에 나타났다.
리프팅, 드리블, 슈팅, 트래핑. 영상 속의 어린 도우가 공을 신체의 일부분이 된 듯 갖고 놀았다.
"대박. 훈련 방식은 원시적인데 저 나이에 벌써 저런 테크닉을 보유했다니."
영상이 끝나자 아르센은 재생 버튼을 누르고 한 번 더 감상했다. 그러다 갑자기 이마를 찌푸렸다.
"확인해 봐야겠어."
전화기를 꺼낸 아르센은 호프만의 번호를 눌렀다. 가끔 기분이 좋으면 아르센한테 공짜로 밥도 사는 친절한 아저씨다.
"꼬맹이, 저녁에 한잔 어때?"
전화를 받은 호프만이 다짜고짜 저녁 약속을 잡으려 했다.
"아저씨,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요. 도우가 우리 구단에 와서 테스트받았잖아요."
"그럼. 내가 직접 했지. 저녁도 사주면서 잘 구슬렸는데 구단의 숫자만 아는 멍청이들이 다 망쳤다니까."
"그때 도우가 귀한 왼발이라고 반응이 긍정적이었다면서요."
"그래. 그런데 주전 자리를 보장하라는 부분에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어. 구단은 2년 동안 제대로 키워서 쏜을 능가하는 선수로 만들려고 했거든. 섣부른 경기 출전은 독이라고 생각했지. 지금 생각하면 다 개소리지만."
"제가 방금 도우가 구단에 보낸 훈련 영상을 확인했는데요."
"응."
"도우가 오른발만 쓰던데요?"
"응?"
###
6월 5일.
스포츠 게임 제작 회사 FM의 고객센터 전화기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고객님. FM 코리아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도라익인데요. 프리미어리그 소속 스토크시티의 18번 선수 도라익입니다."
"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게임에 제가 왼발 선수로 나왔는데요. 사실 저 오른손잡이거든요. 주발이 오른발이에요."
"네. 고객님. 그래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수정 좀 해주시면 안 돼요? 주발은 오른발이고, 왼발은 오른발보다 조금 약해요. 그러니까 양발 선수로 해주세요."
"네, 고객님. 그러니까 프리미어리그 스토크시티 구단의 18번 도라익 선수의 스탯 중 주발 왼발을 주발 오른발, 그리고 양발 선수로 수정해달라고 요청하신 거죠?"
"맞습니다. 빠른 패치 부탁드려요."
"이미 기록했구요. 관련 부서에 전달하겠습니다."
"언제 수정되나요?"
"구단 및 본인에게 확인한 후 다음 패치 때 일괄 수정될 겁니다."
"제가 본인인데요. 그리고 구단에서도 제가 오른발이 주발인 거 몰라요."
- 작가의말
노규태는 땅콩 회항 피해자였습니다.
혹시 동백꽃 필 무렵, 스토브리그 두 드라마 안 보신 분이라면 이제라도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제가 평가가 박한 편인데, 두 드라마 다 진짜 재밌게 봤습니다.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