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옵션
[페널티킥 양보엔 이유가 있었다.]
[계약서 유출. 법적 책임 물을 수 있나.]
[팀을 위한 것인가 돈을 노린 것인가.]
[아직은 피카추 배를 만질 시간. 계약서 진위 먼저 검증해야.]
새벽부터 최경호의 전화기가 쉬지 않고 울렸다. 도라익의 계약서 일부가 외부에 노출되어 대한민국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 최경호 씨. 유출된 계약서 내용이 진실인지만 말씀해 주세요.
- 아니. 그걸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니깐요.
- 계약 내용을 얘기하라는 게 아니고요. 이미 폭로된 계약서 내용이 진짠지 확인해 달라는 겁니다.
- 그게 그거잖아요.
- 그러니까 인터넷에 오른 계약서 내용이 진짜라는 거네요?
- 이만 끊겠습니다.
"형, 배고파."
새벽 일찍 일어나 운동하러 갔던 도라익이 돌아왔다. 최경호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려놓고 밥상을 차렸다. 배불리 먹은 도라익은 바로 2층으로 자러 갔다.
도라익의 6월 일과는 코어 운동과 전술 공부가 전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달린 후 돌아와 밥 먹고 잔다. 10시에 깨 코어 운동을 한 후 점심 먹고 잔다. 오후에 비디오를 보며 전술을 공부한 후 잔다.
저녁을 먹고 배가 꺼진 후 또 코어 운동을 하고 각종 즙을 마신다.
최경호라면 하루도 못 버틸 스케줄을 도라익은 성실히 해내고 있다.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마친 최경호는 한국 포털에 접속했다.
[인터넷에 유출된 도라익 선수의 계약서는 원본으로 보인다. 진위는 구단과 도라익의 에이전트 모두 함구하고 있기에 밝혀지지 않았으나, 진실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계약서로 도라익이 맨유와 펼친 프리미어리그 38라운드에서 페널티킥을 양보한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
출전 수당 : 선발 1만 파운드, 교체 6천 파운드.
득점 수당 : 1골당 1만 파운드.
도움 수당 : 1도움당 1만 파운드.
여기까진 오히려 우리가 도라익 선수를 위해 불평해야 하는 부분이다. 아무리 어린 선수라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 주전의 위상에 맞지 않는 적은 금액이다. 일례로 도라익과 마찬가지로 11골을 넣은 맨유의 그린우드 선수는 1골을 넣을 때마다 15만 파운드의 득점 수당을 받는다.
특별 수당.
10골 달성 시 100만 파운드 지급.
10도움 달성 시 100만 파운드 지급.
10골 10도움 동시 달성 시 200만 파운드 추가 지급.
리그 잔류 성공 시 100만 파운드 지급.
30-31시즌 도라익 선수가 내놓은 성적표는 리그 13경기 11골 10도움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성적이 아닐 수 없다. 선수들 피로도가 높은 후반기에 투입되어 이득을 봤다는 평가도 드물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박수를 보낼 만한 성적이다.
그러나 환호는 우선 접어두고, 두 번의 페널티킥을 돌이켜보자.
첫 페널티킥 당시 도라익 선수는 9골 9도움 상황이었다. 도라익이 페널티킥을 넣으면 10골을 달성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도라익 선수는 특별 수당 100만 파운드를 수령할 수 있다.
두 번째 페널티킥 당시 도라익 선수는 맨유 상대로 멀티 골을 넣으며 시즌 11골 9도움을 기록했다. 그리고 페널티킥을 얻었다. 본인이 직접 넣으면 맨유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엄청난 명예를 얻는다. 시즌을 12골 9도움으로 마무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도라익은 찰리한테 양보했고, 찰리가 페널티킥에 성공하면서 11골 10도움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특별 수당이 존재한다면 도라익의 계좌엔 총 500만 파운드가 입금됐을 것이다. 만약 페널티킥을 직접 넣었다면 200만 파운드가 입금됐을 것이고.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팀 상대로 해트트릭을 하는 명예와 300만 파운드. 이 글을 읽고 있는 네티즌은 어떤 선택을 할까?
필자는 속물이다. 아파트 대출도 갚아야 하고 남자로서 더 멋진 차로 바꾸고 싶다. 반드시라곤 할 수 없지만, 아마 99.99%는 페널티킥을 양보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상대는 페널티킥에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 아무리 밉고 싫은 상대라고 해도 300만 파운드라면 눈 질끈 감고 양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인터넷에 유출된 도라익 선수의 계약서 내용이 진실이라는 가정 아래 이뤄진 추측이다.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명확히 밝힌다.
그리고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우린 도라익 선수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성숙한 성인이라고 자부하는 필자도 300만 파운드의 거금 앞에선 버틸 도리가 없다. 다만, 대한민국 축구의 새 희망으로 부상하는 선수가 돈이 아닌 국가와 국민을 위한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을 뿐이다. 16세에 맨유 상대로 해트트릭한 선수는 전에도 없었고 아마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 거짓 기사 신고합니다.
└ 첫댓 실화냐? 팩트를 보고도 인정 안 해?
└ 팩트? 추측이라고 본문에 적혔는데.
└ 그렇게 행복 회로 돌리다가 팍하고 멈추지. 뇌가.
└ 나라면 해트트릭 선택했다. 그럼 광고료로만 300만 쉽게 벌겠다.
└ 아직 애잖아. 그냥 확실한 300만이 어른거렸겠지.
└ 이름은 또라인데 하는 짓은 완전 정상이잖아. 나라도 300만 챙긴다.
└ 저게 정상이라고? 맨유 상대로 두 골 넣은 놈이 흥분 안 하고 수당 생각하며 페널티킥 양보하는 것부터 사이코패스 아니야?
└ 소시오패스면 몰라도 사이코패스는 해당 사항 없는데.
└ 오빠가 그럴 리 없어.
└ 초중딩 벌써 방학인가? 오빠 소리 왜 나와.
비난이 대부분이고, 칭찬도 300만 파운드를 챙긴 게 잘했다는 칭찬이었다. 언론은 이미 기정사실로 하여 도라익 때리기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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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범 평론은 요새 도라익 선수 소식이 없나 보네요."
김상현이 기름기 번지르르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누가 그래요? 도라익 선수 훈련 스케줄도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오태범이 발끈했다.
"멘탈이 대단한 선수네요. 이 상황에도 훈련에 몰두하다니."
진행자가 시의적절하게 끼어들었다.
"훈련과 식사와 휴식으로 일과를 보낸다고 합니다. 에이전트한테 부탁하여 영상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모레쯤 제 채널에 올릴 겁니다."
"오태범 평론은 지금 인터넷에 일고 있는 논란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미 한 번 겪지 않았습니까? 일주일 동안 신나게 까다가 다들 꼬무룩 했잖아요. 붕어도 아니고, 고작 얼마 전 일이라고 벌써 잊고 기고만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을 거란 얘긴가요?"
"에이전트는 독일인입니다. 한국말이 유창하지만, 한국 사정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현재 어떻게 대처하는 게 맞는지 고민하고 있죠."
"만약 인터넷에 기사로 도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도라익 선수한테 어떤 타격이 있을까요?"
"그건 제가 대답할게요."
김상현이 끼어들었다. 이번은 오태범도 대답하기 싫은 질문이었기에 반대하지 않았다.
"도라익 선수의 이미지는 그간 아주 좋았어요. 중국에서 유니폼이 벌써 10만 장 이상 판매되었고 한국에서도 6만 장이나 돼요. 일본에서도 3만 장이 팔렸고요. 맨유를 이긴 경기 이후 첼시 팬들이 단체로 도라익 선수 유니폼을 3천 장 구매했다고 해요."
중국은 사실 한국에 관심을 주는 사람은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원체 머릿수가 대단하다 보니 그 일부 중 호감을 느끼는 사람만 해도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래서 도라익의 유니폼이 많이 팔려도 딱히 이상하지 않다.
일본이 조금 의외긴 하지만, 축구 팬이 중국과 한국보다 많고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아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유니폼 최고가가 13만 원이고 최저가는 2만3천 원이죠. 유니폼 판매 수익만 해도 백억 되겠네요?"
"유니폼 마진이 얼만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미지 장사라는 게 다 그렇잖아요. 아마 도라익 선수의 유니폼 판매 수익만으로도 특별 수당을 지급하고 남을 거예요. 지난 논란 때 유니폼 일일 판매량이 급락했다가 맨유전 이후를 기점으로 급상승했어요. 그리고 이번 논란 때문에 또 판매량이 줄고 있죠."
"유니폼이 뭐 생필품도 아니고. 그저 살 만한 사람이 다 사서 판매량이 줄어든 걸 갖고 아무 데나 갖다 붙이네요?"
"오태범 평론은 주장을 펼치지 않고 반론만 하네요?"
김상현의 깐죽거림에 오태범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주먹을 애타게 부르는 얼굴에 한 대 꽂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유니폼에서만 보다시피. 도라익 선수의 가치는 고작 300만 파운드가 아니에요. 혁신 기술을 연구하는 미래지향 기업들이 광고모델 1순위로 생각하는 게 도라익 선수였어요. 젊고 파격적인 이미지."
"300만 파운드 스캔들이 터지고 유니폼 판매가 저조해지며 스토크시티 구단이 손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도라익 선수 본인도 거액의 광고 기회를 잃었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모든 건 인터넷에 유출된 계약서 내용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하는 추측입니다."
진행자가 추임새처럼 멘트를 끼워 넣었다.
"벌써 며칠 됐는데 구단도 선수 에이전트도 침묵을 지키고 있어요. 아니면 아니라고 시원하게 말하면 되는데 말이죠."
"혹시 유출자를 찾으려고 침묵하는 게 아닐까요?"
"축구 선수 계약은 유출되어도 법적 책임을 안 진대요."
"김상현 평론은 어떻게 그리 잘 압니까?"
오태범이 눈을 흘겨 뜨며 말했다. 계약서 내용을 유출한 언론사 부장이 김상현과 친하다. 첫 기사를 올린 건 인턴 기자지만, 아무래도 냄새가 좀 구리다.
- 작가의말
사실 기레기만큼 편한 직업이 없습니다. 위에서 정해주는 논조대로 글을 쓰면 되니깐요. 굳이 진실이 뭔지 고민하고 탐구하는 수고가 전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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