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도라익
"도우, 벌써 가?"
팀 훈련이 끝나자 도라익은 바로 편한 신발로 갈아 신었다.
"응. 집에 가서 아기 봐야지."
"저녁엔?"
"미안. 당분간 휴식이 더 필요해."
칼퇴근을 한 도라익은 시속 30KM로 달린 최경호의 차로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형, 오바하지 좀 마."
"내가 무슨 오바를 했다고."
도라익이 벗은 헬멧을 트렁크에 보관한 최경호는 셔츠를 펄럭여 땀을 식혔다. 오는 내내 눈으로 전후좌우를 살피고 귀로 온갖 소음을 듣느라 아직 선선한 날씨에도 땀으로 몸이 절었다.
"헬멧까지는 그렇다고 쳐. 유리는 왜 방탄유리야?"
"이거 내 돈으로 한 거라니까."
"돈 때문에 하는 얘기 아니잖아."
"에밀리아가 방탄 좋아해서."
도라익은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플 뿐임을 깨닫고 논쟁을 끝냈다. 드물게 1승을 거둔 최경호는 우쭐거리며 50M 밖에 있는 오창범과 함께 사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철이 안 들었어."
이상하게 진 기분이 든 도라익이 툴툴거렸다.
"여보, 신 벗지 말고 거기 쓰레기 버리고 와."
엘은 분리수거를 잘 못 했다.
도라익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가서 분리수거를 꼼꼼히 한 다음 마당의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씻고 집에 들어갔다.
"아빠!"
아들이 엉금엉금 기어 왔다. 돌이 되기도 전부터 서서 걷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까진 네발걸음이 훨씬 빠르다.
도라익도 바로 엎드려 아들한테 기어갔다.
거실 중앙에서 만난 둘은 머리를 마주 대고 비볐다. 둘만의 특별한 접선 암호였다.
"뭐 하구 놀까?"
잠깐 고민한 도라익은 자동차 경주를 하기로 했다.
1번 자동차는 벤츠 로고를 박은 RC카였다. RC카 중에서 마력이 가장 강한 놈으로, 아들 명의를 빌려서 산 도라익의 최애 장난감이었다.
2번 자동차는 아들이었다. 지능이 높아서 가끔 경쟁자를 발로 걷어차기도 하는 트랙의 무법자이자 도라익의 최애.
"시작!"
도라익의 외침과 함께 아들이 RC카를 걷어찼다. 잘 만든 RC카는 용케 쓰러지지 않았으나 틀린 방향으로 달렸다.
도라익은 후진으로 방향을 잡고 결승선을 향해 RC카를 돌진시켰다.
영리한 아들이 왼쪽으로 움직여 RC카의 진로를 방해했다. 도라익은 미리 짐작했다는 듯이 RC카의 속도를 늦춰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아들이 기다 말고 오른쪽으로 몸을 굴렀다. 도라익이 조종간을 분주하게 컨트롤했다. RC카가 화려한 720도 턴을 하며 육탄공격을 피했다.
"여보! 바닥에 자국 생기잖아."
실물과 똑같은 비율로 만든 RC카는 고무바퀴를 사용했다. 장사꾼들이 다 그렇듯이 부품 장사로 돈 벌어먹으려고 잘 닳는 고무를 썼다.
도라익이 꾸중 듣는 사이 아들은 어느새 결승선을 넘었다. 데굴데굴 구르면서 승리를 자축하는 아들을 보며 도라익은 1:2는 늘 어렵다고 생각했다.
"지우면 되잖아."
낮게 툴툴거린 도라익은 세제와 걸레를 들고 스키드 마크를 지웠다. 아빠가 하는 일이 재밌어 보였는지 아들도 엉금엉금 기어 와서 바닥을 손으로 문질렀다.
#
4월 5일.
스토크시티는 원정에서 아스톤 빌라를 만났다.
현재 리그 16위로, 17위인 헐 시티, 18위인 QPR, 19위인 번리를 비롯해 스토크시티가 반드시 이겨야 하는 상대였다.
도라익은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센터백이 문제야.'
오늘 경기는 줄리엔과 네이선이 선발로 출전했다. 예상 밖으로 줄리엔이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고 실수는 주로 네이선이 했다.
'측면 수비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고 있어.'
센터백이 불안하기에 토미와 산체스는 측면 수비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다. 덕분에 중앙이 탄탄해졌지만, 오창범과 맥자넷이 자주 돌파당해 위기를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줄리엔이나 네이선 모두 헤딩을 잘하는 센터백이라는 건데, 문제는 낮은 크로스였다.
동작이 느린 줄리엔이나 경험이 부족한 네이선 모두 낮은 크로스는 잘 수비하지 못했다. 그나마 줄리엔은 몸을 던져서라도 공을 골라인 밖으로 보내는데, 네이선은 공을 뒤로 흘리기 일쑤였다.
이럴 땐 차라리 보크스가 나은데, 멘탈이 약한 보크스는 아직도 지난 경기의 실책 때문에 자책으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 아, 네이선 선수 자책골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네이선이 멘탈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강해서 자책골을 넣었다고 급격히 무너지거나 하진 않았다.
#
- 도라익 선수 출전합니다.
후반전이 되자 도라익이 우디르를 교체해 출전했다.
"발제르, 수비 상황엔 가장 앞에 있어."
도라익의 말에 발제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 선수 한 명 바뀌었는데 분위기가 반대됐습니다.
도라익은 열심히 뛰며 중앙 수비를 단단히 했다. 덕분에 토미와 산체스가 시름 놓고 측면 수비를 도왔고, 전반전에 잘 먹히던 공격 수단이 꽉 막혔다.
그러나 아스톤 빌라는 전반전의 좋았던 기억 때문에 여전히 측면 공격에 중심을 뒀다.
"젬."
억지로 올린 크로스를 줄리엔이 헤딩으로 쳐 냈다. 줄리엔이 헤당한 공을 어렵게 잡은 토미가 제임스에게 패스했다.
토미가 공을 잡은 순간 앞으로 달린 도라익이 고개를 돌려 제임스를 바라보며 외쳤다. 제임스는 지체 없이 공을 앞으로 찔렀다.
아스톤 빌라 수비수 두 명이 도라익을 향해 달렸다. 한 명은 앞을 막고 한 명은 도라익이 중앙으로 향하는 경로를 몸으로 막으며 달렸다.
- 마르세유 턴.
도라익이 갑자기 마르세유 턴으로 속도를 줄였다. 턴을 한 방향이 왼쪽이어서 두 선수와 거리도 멀어졌다.
거리를 벌린 도라익은 바로 오른발 아웃 사이드로 공을 찼다. 공은 두 선수 사이를 지나고 남은 센터백도 피해서 오른쪽에서 열심히 달리던 발제르를 찾았다.
- 슛!
- 원더골!
아웃 사이드로 차서 꽤 강한 스핀이 걸린 공을 발제르는 첫 터치로 슛을 때렸다. 순간 집중력이 뛰어난 덕분에 발제르는 공을 정확히 맞혔고, 마음의 준비가 미흡했던 키퍼는 골이 되고서도 몸을 날리지 못했다.
- 이러면 아스톤 빌라 머리가 복잡해지죠.
- 도라익은 중거리 패스를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거든요.
- 예전이었다면 본인이 돌파하거나 좀 더 확실한 패스 경로를 만들었을 거예요.
- 아스톤 빌라 입장에선 완전히 새로운 선수를 만난 기분입니다.
- 문제는 이 선수가 실력까지 새롭진 않아요.
1:1이 되자 아스톤 빌라 벤치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아직 교체하기엔 시기가 이르다고 판단했는지 곧 잠잠해졌다.
오히려 스토크시티 벤치가 먼저 움직였다.
'상대의 선택지를 좁혀야 한다.'
도라익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바뀌었지만, 객관적 실력은 아스톤 빌라가 우위다.
리그는 전쟁이고 38라운드의 경기는 전투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전략이 중요하지만, 전투에서 이기려면 전술이 중요하다.
상대가 선택할 수 있는 전술 숫자를 줄이면 대응하기 편하다.
급한 건 스토크시티뿐이 아니다. 아스톤 빌라도 강등할까 봐 걱정이 태산이다.
전문가는 물론 팬들도 이미 포기한 스토크시티와 달리, 아스톤 빌라는 아직 희망이 있다. 그렇기에 오늘 경기의 승리가 훨씬 간절하다.
결단을 내린 테일러는 전원 수비를 지시했다.
스토크시티가 도라익까지 깊이 내려 수비에 전념하자 아스톤 빌라 벤치가 당황했다. 동점 골을 넣고 기세가 오른 스토크시티를 살살 꼬드겨서 공격에 치중하게 하고, 속도가 출중한 두 윙을 이용해 반격으로 득점하려 했는데 상대의 대처가 예상 밖이었다.
'교체해라. 교체해라.'
이기고 싶은 마음은 스토크시티도 마찬가지다. 지금 테일러의 대응은 치킨 게임이다. 아스톤 빌라가 끝까지 버티면 1점이 무의미한 스토크시티에도 큰 타격이다.
다행히 인내심이 먼저 바닥을 보인 건 아스톤 빌라였다. 아스톤 빌라는 밀집 수비를 깨려고 헤딩 잘하는 선수를 올렸다.
헤딩을 잘하는 네이선과 줄리엔을 보유한 스토크시티엔 희소식이다. 테일러는 바로 선수들에게 중앙 수비를 강화하고 라인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 아, 스토크시티 또 실점합니다.
문제는 축구 경기가 계산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거다. 교체로 올라온 헤딩만 잘하는 선수가 운 좋게 크로스를 발에 맞춰 골을 넣었다.
"쇠렌센. 수비 맡겨도 되지?"
쇠렌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이선을 교체한다."
네이선을 교체한 쇠렌센은 수미 자리로 갔고, 루이스가 위치를 내려 센터백처럼 뛰었다.
동시에 스토크시티는 라인을 잔뜩 올려 아스톤 빌라를 압박했다.
아스톤 빌라는 후반전에 교체한 공격수에게 줄리엔을 마킹하게 하고, 두 윙의 위치를 안으로 좁혀 속도로 반격하려 했다.
"형!"
중앙에서 상대의 집중 마크를 받으며 별 활약을 못 한 도라익이 오른쪽으로 도망갔다. 진형이 흐트러질 것을 걱정한 아스톤 빌라 선수들이 도라익을 따라가지 않았다.
컷 인하여 중앙으로 드리블하던 오창범이 왼발로 도라익에게 패스했다. 맥자넷이 크로스로 상대를 위협한다면 오창범은 크로스와 컷인에 슈팅까지 다양한 기술로 상대 수비진을 흔드는 역할이었다.
공을 잡은 도라익은 여유 있게 몸을 돌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발끝으로 끊임없이 공을 굴리며 수비수가 함부로 못 움직이게 강제했다.
"어!"
도라익이 경탄을 지르며 왼팔을 들어 중앙을 가리켰다. 수비수가 움찔했다.
고개를 돌리려는 본능적인 반응은 겨우 참았으나,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진 수비수는 순발력을 이용한 도라익의 돌파를 방해하지 못했다.
도라익은 수비수가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게 중앙으로 사선을 그리며 달렸다. 몸을 돌려 쫓는 수비수는 도라익의 몸에 막혀 아무 짓도 못 했다.
"움직여!"
도라익을 막으러 줄리엔을 수비하던 공격수가 달려왔다. 도라익은 간단한 페이크로 멀대 공격수를 가볍게 제쳤다.
어쩔 수 없이 줄리엔을 수비하러 움직인 아스톤 빌라 센터백이 나왔다. 그에 맞춰 남은 수비수들도 급히 움직였다.
연속 두 번 수비 위치를 조정하느라 불가피하게 틈이 생겼다. 도라익의 패스는 정확히 그 틈을 찔렀다.
절묘한 위치를 잡은 발제르가 도라익의 패스를 받았다. 모두가 발제르의 슛에 대비할 때, 발제르는 오른발 인사이드로 공을 밀어 왼쪽으로 보냈다.
어느새 달려 온 토미가 공을 멈추지 않고 바로 슛을 때렸다. 먼 포스트를 노린 토미의 슛은 몸을 날린 센터백의 발에 맞아 가까운 포스트를 때리며 골이 되었다.
미친 듯이 달려간 도라익이 토미를 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그간 벌크업을 해 토미도 가벼운 몸이 아닌데, 도라익은 가볍게 들었다.
"한 골 더 넣자."
토미가 속삭였다.
주심의 휘슬과 함께 경기가 재개됐다. 아스톤 빌라는 여전히 수비에 전념했다. 당장 공격으로 전환하기엔 선수 구성이 아스톤 빌라에 불리하다.
5분 정도 수비하다가 선수를 교체하면서 전술도 공격적으로 바꿀 예정이었다.
- 토미 선수, 돌파합니다.
- 지난 경기보다 토미 선수의 돌파 횟수가 부쩍 늘었는데요.
- 팀의 최고 득점자로 견제를 많이 받았는데 도라익 선수가 등장하면서 부담이 덜해진 거죠.
왼쪽엔 맥자넷, 오른쪽에 도라익. 패스 경로를 두 개나 확보한 덕분에 토미의 돌파가 훨씬 위력적이었다.
- 반칙입니다.
스토크시티는 페닐티킥 박스 왼쪽에서 프리킥을 얻었다. 슈팅하기엔 각이 너무 안 나오고, 백패스로 공을 밖으로 돌려 중거리 슛을 때리기에도 애매한 위치다.
스토크시티에 남은 선택지는 크로스를 올려 헤딩하는 방법밖에 없는 듯했다.
- 도라익 선수 오른발 키커로 서고, 토미 선수가 왼발 키커로 섰습니다.
- 상식으로 판단할 때, 도라익 선수는 들러리죠. 저 위치는 왼발 크로스 빼고 다른 전술이 없거든요.
- 그러나 도라익 선수라면 모릅니다. 오른발로 가까운 포스트를 노려 슈팅할지도 모릅니다.
아스톤 빌라도 해설들과 비슷한 생각인지 장벽에 3명이나 세웠다.
복잡한 수신호가 오갔다. 발제르, 산체스, 제임스, 오창범 등이 가까운 포스트로 슬금슬금 움직이고, 먼 포스트엔 줄리엔만 대기했다.
루이스는 쇠렌센과 함께 뒤에 대기했고, 맥자넷은 흘러나오는 공을 잡으러 수미처럼 위치를 잡았다.
토미가 달렸다.
페이크였다.
공을 지나친 토미가 상대 장벽을 향해 달릴 때, 도라익이 오른발로 공 밑을 톡 찼다. 역회전이 걸린 공이 고운 포물선을 그리며 적당한 속도로 먼 포스트로 향했다.
동시에 줄리엔이 자신을 마킹하는 상대 공격수를 가슴으로 밀었다. 밀린 공격수는 중심을 잡으려고 휘청거렸고, 불운하게도 키퍼의 진로를 방해하고 말았다.
공을 편하게 옆머리에 맞춘 줄리엔은 굳이 확인하지 않고 주먹을 쥐어 자축했다.
그런 줄리엔을 향해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환호하며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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