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경험
레바논은 필사의 수비로 전반전을 버텼다. 박창식이 괜찮은 슈팅을 몇 번 날렸지만, 번번이 수비수 혹은 키퍼가 몸으로 막아냈다.
"라익이 후반전에 미드필더로 뛰어."
"제가요?"
차 감독의 말에 도라익이 깜짝 놀랐다.
"왜? 팀에서 미드필더로 한 번 뛰었잖아."
"뭘 해야죠?"
"뭘 하긴. 쿠웨이트랑 경기할 때 하던 거 하면 되지."
도라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 저는 뭘 할까요?"
오창범이 질문했다.
"도 선배가 불편하지 않게 잘 보좌해."
선수들이 킥킥거렸다. 오창범은 말이 좀 많아도 심성이 착해서 아무도 귀찮게 생각지 않는 선수다. 선배들한테 깍듯하면서도 후배들한테 위세를 안 부려 두루두루 인기가 좋다.
- 후반전에 도라익 선수 출전했습니다.
- 박창식 선수도 그대로 있고요.
- 투톱일까요? 도라익 선수가 소속팀에서 새도우 스트라이커로 뛰잖아요.
해설들의 예상과 달리 도라익은 미드필더로 뛰었다. 그리고 바로 효과가 났다.
도라익이 공을 잡자 레바논 선수들이 접근했다. 쿠웨이트 전에서 원거리 슈팅을 두 개나 넣은 도라익이다. 하나는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둘은 실력이다.
둘 다 운이라고 쳐도, 운 역시 실력이다.
그리고 키퍼도 뒤로 물러나야 했다.
- 도라익 선수 가볍게 찌릅니다.
- 박창식 선수가 공을 잡고 기다립니다.
- 이혁신 선수와 오창범 선수가 공 받으러 달립니다.
이혁신은 중앙으로 컷하여 공을 받으려 했고 오창범은 터치라인을 타고 달렸다. 박창식은 이혁신 대신 오창범을 선택했다.
- 오창범 선수 현란합니다.
도라익한테 배운 대로 일정 리듬으로 움직이다가 갑자기 동작을 빠르게 했다. 이때 주의할 점은 발이 빨라진다고 이동 속도도 빨라지는 게 아니라는 점을 꼭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설픈 선수들은 갑자기 리듬을 끌어올리며 자기도 빨라진 줄로 착각하는 탓에 스스로 실수하여 공 제어권을 잃어버린다.
'나는 빠르지 않다'를 거듭 되뇌며 상대 풀백을 제친 오창범이 크로스를 올렸다. 고개도 들지 않았지만, 선수들이 어디쯤 위치를 잡을지 감으로 알기에 꽤 괜찮은 크로스가 올라갔다.
- 골키퍼 펀칭.
- 고명준 선수 공 잡습니다.
- 공을 뒤로 돌립니다.
- 보던 장면이죠?
- 슛!
- 골! 골입니다!
도라익은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헤딩하러 달려가지 않았다. 미드필더답게 흘러나오는 공을 노렸고, 공을 잡은 후 기회가 보이자 슛을 때렸다.
- 레바논 골치 아픕니다.
- 도라익 선수 때문에 라인을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 일부 선수는 내리고 일부 선수는 올리며 진영이 망가졌죠.
- 벤치에서 빨리 오더를 내려야 하는데, 벤치도 망연자실한 것 같습니다.
- 신조어로는 멘붕이라고 하죠.
- 그거 구조언데요. 나온 지 20년도 더 되었습니다.
라인을 내리면 도라익이 슛을 때린다. 올리면 박창식과 이혁신은 물론, 자칭 유로파리거 오창범까지 기웃거린다.
그렇다고 진영을 넓게 펼치면 고명준을 비롯한 미드필더들이 마음껏 날뛴다.
도라익에게 전담 마크를 붙이자니 쿠웨이트 전에서 수비수 세 명과 몸싸움하여 이긴 선수다. 설사 몸싸움을 무시한다고 해도 순발력과 드리블 기술만으로도 한두 명은 쉽게 제친다.
- 든든합니다. 이렇게 든든한 경기 참 오랜만입니다.
- 도라익 선수가 딱 버티고 있으니 걱정이 전혀 없습니다.
- 날카로운 비수라고 생각했던 선수가 알고 보니 묵직한 망치였고 든든한 방패였고 날렵한 창이며 명궁 손에 들린 활이기까지 했습니다.
경기는 레바논 입장에서만 치열했다. 한국팀은 박창식을 앞에 두고 도라익을 뒤에 둔 채 편하게 경기를 펼쳤다.
높은 공은 속도도 빠르고 점프도 좋은 도라익이 다 따냈다. 깊숙이 찌르는 공도 김춘호 아니면 수비수가 처리했고, 조금 애매한 공은 도라익이 잽싸게 달려갔다.
도라익이 공을 잡으면 레바논 선수들은 슈팅할지 패스할지 돌파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기 일쑤였고, 한국팀 남은 선수들이 마음껏 상대 진영을 누비며 재주를 뽐냈다.
- 도라익 선수 찌릅니다.
- 박창식, 박창식!
- 골, 박창식 선수가 발끝으로 공을 건드려 방향을 바꿨습니다.
도라익의 강한 찌르기를 용케 쫓아간 박창식이 몸을 던져 발끝으로 공을 건드렸다. 너무 가까운 거리여서 키퍼는 반응도 못 하고 자기 발목 옆으로 흘러가는 공을 눈알을 굴려 지켜봐야 했다.
- 삼국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공략하는 게 최고의 전술이다.
- 도라익 선수는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거로 레바논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습니다.
- 자중지란이 일고 있죠. 선수들 생각이 제각각이어서 힘을 곱으로 빼고 효과는 반으로 줄었습니다.
박창식과 도라익 덕분에 이혁신이나 오창범 그리고 고명준 등도 완전히 살아났다.
"우리 대표팀이 축구 이렇게 잘했어?"
현장에서 관람하던 팬들이 감탄했다.
'경기 운영에 관해 공부 많이 해야겠다. 내가 지금껏 익힌 건 다 죽은 지식이야. 그리고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만 생각하면서 공부했어. 실제로 경기 중에 어떤 전술을 사용했고 여러 선수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도라익이 한가하게 생각했다. 활동량이 가장 많은 미드필더 자리에 있건만 다른 선수들이 활발하게 뛰어준 덕분에 도라익의 활동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경기는 골을 넣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킬패스를 하려고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된다.
상대를 제압하니 경기가 절로 승리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
"회장님, 오셨습니까."
축협 고위 관계자들이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뉴스에 간간이 얼굴을 비추는 대한민국 재계의 거물이다.
"도라익 선수 어디 있지?"
도라익은 축구에만 집중한다는 이유로 모든 광고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데 덜컥 패션 광고 모델이 되었다. 그 탓에 광고 컨택을 시도했던 직원들이 상사한테 억울하게 깨졌고, 어떻게든 도라익의 광고 수락 이유를 알아내려고 애썼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도라익을 먼저 잡는 자가 한국 및 아시아 시장을 얻는다. 조던과 계약한 나이키의 비상을 생각하면 과장된 얘기가 아니다. 현재 시장 상황에서 조던을 얻은 나이키만큼 성장하는 건 어렵더라도, 최소 국내의 다른 그룹을 누르는 건 일도 아니라는 분석이 있다.
"아까 화장실로 가는 걸 본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로 사람을 보냈으니 상석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바로 볼 수 있으실 겁니다."
대표팀 경기를 마친 도라익과 오창범은 축협에서 기획한 3라운드 진출 축하연에 얼굴을 비췄다. 수많은 사람과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눈 도라익은 경기를 뛸 때보다 더 지쳤다.
"라익아, 얘기 좀 하자."
장거리 비행에 두 경기를 풀타임으로 뛴 탓에 관종 오창범 선생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차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자 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감독님 언제 오셨어요?"
도라익이 반갑게 맞이했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지만, 오늘 만난 사람들이 진심을 가리려고 얼굴에 쓴 가식의 가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둔감하지도 않다.
그래서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차 감독을 보니 반가움이 절로 일었다.
"5월 A매치 데이에 친선경기 2개 있다. 두 경기에서 너한테 새로운 위치를 뛰게 해보고 싶은데 네 생각이 궁금해서."
"저는 좋아요. 그간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정작 경기에서 써먹질 못하고 있어요. 창범이 형보다 배우는 게 더 느리다니깐요."
오창범은 하늘 같은 차 감독 앞이라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초등학교부터 축구부 생활을 해온 오창범이고 원래 머리를 쓰는 타입이어서 배움이 무척 빨랐다. 도라익이 언감생심 축구 경력 15년의 자신과 비교하려고 들자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창범이 너. 다음 경기에서 윙으로 뛰어 봐."
"네? 저는 왜요?"
수비가 엉망이지만, 오창범은 윙백 혹은 풀백 자리가 편하다. 최대한 많은 선수를 시야에 둬야 심리적 안정이 느껴진달까.
"다양한 경험을 하면 좋지 뭐. 그리고 내가 너한테 이유까지 시시콜콜 설명해야 해?"
"아닙니다. 열심히 뛰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차 감독이 떠났다.
"형, 우리 튈까?"
"응? 그래도 돼?"
"친한 형들이 서울에 있거든. 소고기 산다고 했으니 우리 가자."
오창범은 관종 치고는 소심한 편이다. 그러나 하늘 같은 대스타 도라익이 함께 한다는 생각에 간이 두 배로 팽창했다.
"까짓거. 무려 소고긴데 이딴 행사 따위가 대수냐."
둘은 화장실로 가서 도라익이 가방에 넣고 온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마스크까지 썼다.
"처음부터 튈 생각이었어?"
"행사 끝나면 좀 달리려고 준비했지.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나도 몰랐어."
편한 운동복 차림에 야구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한 둘은 사람들의 시선을 잔뜩 끌었다. 특히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도둑고양이처럼 걷는 오창범 때문에 더욱 이목이 쏠렸다.
그러나 누구도 오늘 행사의 거물인 도라익과 오창범이 옷을 갈아입고 튈 거란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기에 그저 신기하게 바라볼 뿐 다가가진 않았다.
"후, 쫄려서 뒤지는 줄 알았네."
밖으로 나온 둘은 바로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도라익을 찾는 회장님의 점점 시퍼레지는 안색 때문에 축협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비지땀을 흘리며 화장실은 물론 옥상까지 샅샅이 뒤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어디 가는 거야?"
"야구 선수 형들이랑 고기 먹기로 했거든. 다 착하고 재밌는 형들이야. 형보다는 다 동생이고."
"고기 내가 사야 하는 거 아니야?"
"형 주급이 그 형들 연봉이야. 얻어먹고 싶어?"
'맨날 당하네.'
영국에서도 오창범이 지갑을 여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도라익이 그만큼 자신을 편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니 또 기분이 좋았다.
"까짓거. 오늘 내가 끝까지 쏜다."
"잘됐네. 영국 시간에 맞춰서 오늘 저녁 안 잘 생각이었거든."
"너 진짜 징하다."
입으로는 징하다고 했지만, 벌써 시차 적응을 준비하는 도라익 덕분에 크게 반성했다.
속도 빼고는 큰 장점이 없는 선수였던 오창범은 프로가 되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자신이 윙이 되기엔 감각이 부족함을 일찍 깨닫고 풀백으로 전환했고, 부족한 수비를 보완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방법을 다 동원했다.
다행히 포르투의 6번처럼 선을 넘는 짓은 하지 않아 무탈하게 프로 선수가 되었고 J리그 주전까지 되었다. 대표팀에서도 공격력을 인정받아 약팀 상대로 주전이었다.
그런데 도라익을 보니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 보였다.
- 작가의말
3시간 뒤.
회장님 : 내가 기다린 시간 1분에 한 대씩이다. 모두 꿇어!
Commen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