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
새 시즌이 열렸다.
개막식에서 맨유가 토트넘을 1:0으로 힘겹게 이겼다. 전반적으로 토트넘이 우위를 차지한 상황에 맨유가 논란 여지가 있는 골을 넣어 온갖 커뮤니티가 시끌벅적한 가운데.
스토크시티가 홈에서 첫 경기 상대인 선덜랜드를 맞이했다.
"이번 시즌 우리 최고 순위를 갱신할 수 있어."
도라익이 연설했다.
"유럽컵 때문에 다들 지쳤어. 그러니 시즌 초반부터 승점을 올리는 데 박차를 가하자. 연승 기록도 세우고."
현재 프리미어리그 연승은 맨시티와 리버풀이 18연승이라는 타이기록으로 공동 1위를 차지하고 있다.
"10경기 연승하자고?"
"아니. 스토크시티 연승 기록 세우자고. 우리가 나이 먹은 다음 심심할 때 팀에 찾아와서 애송이들한테 '연승 그거 별로 안 어렵던데.' 이러면서 꼰대질하면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선수들이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킥킥거리며 웃었다.
"조심할 건 딱 하나. 상대 공격수의 스피드야. 둘 다 빠른 선수니까 반격 기회를 안 주게 조심해."
결의를 다진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대기 통로로 가서 줄을 섰다. 비슷한 시기에 선덜랜드 선수들도 나왔다.
그런데 낯선 얼굴이 한둘이 아니었다. 선덜랜드의 러시아 구단주가 몇 년째 투자를 아끼는 바람에 괜찮은 선수를 몇 명 팔고 젊은 선수를 발탁했다.
서로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에스코트 어린이와 장난도 치면서 시간을 보내니 심판들이 등장했다.
심판의 인솔에 따라 그라운드에 진입하니 팬들이 귀청이 찢어지는 함성으로 선수들을 반겼다. 선덜랜드의 젊은 선수들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걸 본 도라익이 속으로 환호했다.
그런데 경기 진행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채 2분도 안 되어 선덜랜드의 젊은 선수가 중거리 슛으로 득점했다.
"내 탓이야."
페데리치가 자책했다.
"괜찮아. 우리도 골 넣으면 되지."
스테판이 페데리치를 위로했다. 키퍼 출신이었기에 골 먹었을 때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최경호의 노력으로 구단주는 결국 8만 파운드의 주급으로 스테판과 계약하고 보크스를 2부리그의 리즈로 임대 보냈다.
라이언 콜린스라는 아일랜드 출신의 젊은 선수가 두각을 급격히 나타내며 1군에 합류한 탓에 보크스가 설 자리가 사라졌다.
"아담. 팬들도 널 믿어."
도라익이 말했다. 지난 시즌 센터백이 불안한 가운데 실점을 55개로 낮춘 데는 페데리치의 선방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다.
"도우. 나 예전의 그 겁쟁이가 아니야."
페데리치와 데이비스 역시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다행히 페데리치는 지난 시즌 MOM으로 몇 번이나 당선되면서 자신감이 붙은 탓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경기가 재개됐다. 스토크시티는 라인을 잔뜩 올려 원정팀을 압박했다.
'어디서 저런 보물이 절로 굴러들어왔지?'
테일러가 흐뭇한 얼굴로 스테판을 보며 속으로 최경호에게 감사했다.
키퍼 출신이어서 페데리치와 손발이 잘 맞는다. 능력 역시 대표팀에 불려갈 정도다. 세리에 A에 51경기나 출전했고 평점 역시 높다.
게다가 위치 덕분에 루이스보다 수비 지휘가 훨씬 용이하다. 지난 시즌엔 루이스가 팀의 수비 지휘를 맡은 바람에 실수가 잦았는데, 이번 시즌엔 그 걱정을 덜었다.
- 스테판 태클!
- 선덜랜드 공격수가 주심에게 항의하지만, 소용없죠.
- 진짜 깔끔한 태클이었습니다.
측면 태클이긴 하지만, 공이 선수와 거리가 가장 멀 때 건드린 덕분에 주심이 구두 경고조차 주지 않았다.
태클로 흘러나온 공을 잡은 페데리치가 긴 패스로 도라익을 찾았다.
공을 가슴으로 트래핑해 잡은 도라익은 발제르를 확인했다. 발제르와 도라익은 4-4-2에서 공격수의 2를 맡았지만, 한 명씩 번갈아 위치를 내려 미드필더를 돕기에 4-4-1-1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도라익이 가장 앞에 있기에 발제르가 공격 방식을 결정했다.
발제르의 신호를 확인한 도라익은 바로 패스로 토미를 찾았다. 도라익의 패스를 받은 토미가 드리블했다.
그에 맞춰 맥자넷이 오버래핑했고, 도라익이 중앙으로, 발제르가 오른쪽으로 갔다.
선덜랜드의 수비진은 도라익과 발제르, 토미와 맥자넷의 움직임 때문에 양쪽으로 찢겼다. 수비진이 갈라지며 생긴 틈은 제임스가 찔렀다.
공을 맥자넷에게 줬다가 다시 받은 토미가 혼자 있는 제임스한테 패스했다.
선덜랜드의 젊은 센터백이 제임스를 향해 달렸다.
제임스가 히죽 웃으면서 앞으로 패스를 찔렀다. 가끔 멋진 골을 넣긴 하지만, 슈팅을 잘하는 선수가 아니다. 아무리 제임스가 공을 잡은 곳이 위험한 구역이라고 해도 센터백이 나와서 수비할 정도의 선수는 아니었다.
선덜랜드 센터백이 움직임과 동시에 도라익과 발제르가 찢어졌다. 양쪽으로 찢어진 둘 중 제임스의 패스를 받은 건 도라익이었다.
발제르 대신 도라익을 쫓은 선덜랜드의 남은 센터백이 자신의 정확한 선택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나 숨이 끝나기도 전에 안색이 변했다.
공을 잡은 도라익이 센터백의 가랑이로 공을 빼며 돌파했다. 3미터도 안 되는 곳에 키퍼가 있어 센터백으로선 장난삼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 돌파!
키퍼가 가랑이로 빠진 공을 노리고 출격했다. 그러나 놀라운 순발력으로 공을 먼저 잡은 도라익이 오른발 발끝으로 공을 왼쪽으로 끌어왔다.
먹이를 덮치는 범처럼 공을 향해 몸을 날린 키퍼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도라익은 어느새 눈 감고 차도 골이 될 위치를 잡았고, 눈 뜨고 공을 찼다.
- 골입니다.
- 너무 당연하게 들어갔습니다.
- 채팅에서 텐션이 왜 그 모양이냐고 하시는데, 저 정도 골론 이젠 감흥이 없습니다.
강철민과 박만호가 거만한 컨셉으로 중계했다. 근묵자흑이라고, 박만호도 슬슬 강철민화 되고 있었다.
- 대규모 스위칭이 발생했습니다.
센터백으로 출전한 줄리엔이 포워드 자리로 갔다. 그에 맞춰 루이스가 센터백으로 위치를 내리고, 도라익이 미드필더로 위치를 내렸다. 토미와 산체스는 양쪽 윙 자리로 갔다.
중앙에 몰린 다이아몬드 미드필드가 양쪽 윙을 앞세운 U형 포메이션이 되었다.
- 4-4-2의 매력이죠.
다른 포맷과 비교해 4-4-2는 스위칭이 좀 더 자유롭다. 3-5-2 같은 경우엔 역할 분담이 훨씬 명확해 스위칭으로 얻을 이득이 상대적으로 적다.
스토크시티가 양쪽 측면에 선수를 총 4명 투입한 바람에 선덜랜드의 수비 진형이 좌우로 퍼졌다. 그러자 도라익과 제임스가 중앙을 공략했다.
헤딩 잘하는 줄리엔과 다양한 크로스에 모두 장점을 보이는 발제르가 있기에 선덜랜드는 측면 수비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 탓에 미드필더 두 명이 중앙과 측면을 끊임없이 오가야 했다.
- 산체스 크로스!
빠른 패스로 공간을 만들어 편하게 공을 잡은 산체스가 크로스를 올렸다. 정말 잘 올린 크로스지만, 골라인과 거리가 꽤 되는 상황에 올린 45도 크로스여서 슈팅은 어려웠다.
발제르는 슈팅 대신 공을 뒤로 헤딩했다.
제임스가 공을 잡았다. 아까의 기억 때문에 선덜랜드 선수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제임스는 공을 오른쪽으로 살짝 굴려 슈팅하기 좋은 자세를 잡았다. 선덜랜드 센터백이 결국 못 참고 달려 나왔다.
제임스는 슈팅하지 않고 공을 뒤로 굴렸다.
- 슛!
도라익이 왼발로 슛을 때렸다. 키퍼 왼손 편의 야신 존으로 향하던 공이 마지막 순간 뚝 떨어졌다. 미처 드롭킥을 예상치 못한 키퍼는 자신의 손바닥 아래를 스치며 들어가는 공에 욕설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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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 체력이 어때?"
"15분에서 20분이 한계인 거 같습니다."
올림픽에서 6경기 모두 풀타임을 소화한 도라익이다. 상대가 주는 압박이 크지 않아 여유가 있었다.
프리미어리그는 달랐다. 객관적 실력이 스토크시티보다 아래인 선덜랜드고 경험이 부족한 젊은 선수를 많이 기용했지만, 드리블 하나 패스 하나 쉽지 않았다.
"몇 경기 더 뛰면 예전 감각을 찾아 체력 문제도 해결될 겁니다."
테일러는 스토크시티 감독직을 2번이나 수행했다. 감독 앞에 대리 혹은 임시라는 글자를 달고.
지난 시즌 강등이 확실시되던 팀을 8연승으로 구렁텅이에서 끌어내며 구단과 팬들의 신임을 듬뿍 받은 테일러다.
예전에 유로파리그 우승을 따낸 공도 있다.
테일러는 정식 감독이 되고 여름에 진행한 유럽컵과 남미컵 때문에 많은 선수가 지친 김에 뭔가 하고 싶었다. 그래서 도라익의 체력 문제가 큰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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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전 51분.
"내가 찰 거야."
느낌이 온 도라익이 크로스가 훨씬 어울리는 페널티 박스 오른쪽 위치의 프리킥을 차겠다고 나섰다.
"페이크 해줘?"
오창범이 말했다.
"아니. 형도 안으로 들어가."
스토크시티는 가까운 포스트 쪽에 줄리엔, 먼 포스트 쪽에 스테판을 배치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상대적으로 작고 헤딩 기술이 평범한 선수를 잔뜩 몰아넣었다.
선덜랜드는 2명이 장벽을 서고 남은 선수들은 일대일 대인 수비를 했다.
도라익은 골대를 한참 바라보다가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고개를 숙여 공만 바라봤다. 약 5초 동안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던 도라익이 갑자기 달렸다.
- 골! 원더골!
- 슛이었습니다!
- 예전에 분데스리가에서 한 라운드에 저런 프리킥이 2개 나와서 화제인 적이 있는데요.
- 훨씬 어려운 골입니다. 거리가 더 가깝거든요.
도라익이 왼발로 때린 공은 쏘아진 포알처럼 일직선을 그리며 가까운 포스트의 야신존에 들어갔다.
너무 의외의 전개여서 키퍼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 시즌 첫 경기에서 도라익 선수가 습관적으로 해트트릭을 하네요.
- 세 살 때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은퇴할 때까지 고칠지 모르겠습니다.
- 해트트릭 말고 포트트릭으로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아쉽게도 후반 60분에 도라익은 우디르로 교체되며 포트트릭 가능성이 사라졌다.
- 저희가 지금까지 도라익 선수 위주로 중계를 했습니다.
- 일본이나 중국 선수가 도라익만큼 하면 저희도 어쩔 수 없이 그 선수 위주로 중계할 겁니다.
-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다른 얘깁니다. 도라익 선수의 활약에 묻힌 감이 있는데, 스토크시티의 다른 선수들도 지난 시즌보다 훨씬 나은 모습입니다.
알론소는 선수를 시험대에 올리기 좋아한다. 그건 선수 본인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다.
테일러 역시 전술을 꼼꼼하게 짜는 스타일이지만, 알론소처럼 물음표를 던지는 게 아니라 확실한 요구를 한다.
전술 익히는 게 힘들긴 하지만, 본인이 덜 고민해도 되기에 스트레스는 훨씬 적다.
덕분에 선수들 마음이 가볍고, 덩달아 몸도 가벼웠다.
거기에 도라익이 선수들 멘탈을 꽉 잡고 제임스가 세심하게 케어한 덕분에 스토크시티의 컨디션은 여느 시즌보다 좋았다.
비록 경기 마감에 한 골 실점했지만, 1분도 안 되어 우디르가 한 골 추가하며 드높은 사기를 그대로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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