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널티킥
제임스가 교체되며 도라익은 사실상 중앙 미드필더로 뛰어야 했다. 다행히 전반전에 불가사의한 첫 골을 넣은 다음부터 위치 선정이 일취월장하여 자기 몫을 톡톡히 해냈다.
그러나 찰리가 여전히 몸싸움에서 열세에 처하는 바람에 반격 기회는 잘 나오지 않았다.
맨유는 전혀 급한 티를 안 내고 적당한 리듬으로 패스하며 자기 축구를 했다. 반면, 모든 면에서 부족한 스토크시티는 그저 휘둘리기만 했다.
맨유 역시 체력과 집중력이 크게 저하됐지만, 수비 상황이 많고 개인 실력도 부족한 스토크시티의 소모가 훨씬 컸다.
- 안타깝습니다.
삑 소리와 함께 주심이 또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교체로 출전한 조쉬가 박스 안에서 핸드볼 파울을 했다.
고의가 아니었고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피할 겨를조차 없었지만, 주심은 단호하게 페널티킥 판정을 내렸다.
약 2분이 걸린 VAR 판정은 주심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역시 래시포드가 공을 들고 페널티킥 포인트에 섰다.
"도우, 이리 와봐."
감독의 부름에 도라익이 빠르게 달려갔다.
"몸은 어때? 체력이 넉넉하지?"
"숨은 가쁜데 몸은 가벼워요."
"좋아. 나랑 대화하다가 신호 받으면 맨유 골대로 뛰는 거야."
"왜요?"
"데이비스가 또 안 움직일 거야. 만약 상대가 가운데로 차면 바로 속공을 발동할 거고. 넌 골을 넣어야 해."
"물 좀 마실게요."
도라익은 물을 입에 물고 삼키지 않았다. 입안이 시원해질 때까지 물고 있다가 뱉어버린 후 감독에게 질문했다.
"생각대로 될까요?"
"아까 데이비스가 안 움직인 것도 내 뜻이었어."
감독은 데이비스한테 가운데를 노리라고 조언했다. 덕분에 페널티킥 수비에 실패하고도 데이비스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감독 지시를 따르다가 실점한 것이기에 심적 부담이 적었다.
첫 페널티킥 상황에선 버틀랜드의 부상까지 있어 윌슨도 경황이 없었지만, 또 페널티킥 상황이 되니 반격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이에요?"
"급해?"
"뛰고 싶어요."
할 말이 끝났는데도 계속 대화하는 척 연기하는 게 쉽지 않았다. 도라익은 표정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자신 때문에 맨유에 작전이 들킬까 봐 조바심이 났다.
아까와 달리 도움닫기를 열 걸음 이상 뛴 래시포드가 공 밑을 톡 찼다. 고운 포물선을 그린 공은 가만히 있는 데이비스 품에 쏙 들어갔다.
데이비스는 짧은 도움닫기로 축하하러 달려오는 선수들을 피해 공을 강하게 찼다.
동시에 감독의 신호를 받은 도라익이 출발했다.
데이비스의 패스는 생각보다 멀었다. 도라익이 공을 잡았을 땐 이미 지쳐서 더는 가속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경기 내내 찰리를 마킹했던 센터백이 도라익에게 접근하고 다른 센터백은 돌파를 대비하여 뒤에 백업했다.
원체 느린 찰리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달려오곤 있지만, 도라익에게 도움을 줄 만한 위치를 잡기엔 5초 이상 시간이 걸린다.
다른 선수들도 중앙선을 넘어 빠르게 돌아오고 있기에 찰리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왼발로 플립플랩을 연속 세 번 펼친 도라익은 상대 센터백이 살짝 굳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돌파했다. 그러나 곧 백업하고 있던 센터백이 달려와 도라익 앞을 막아섰다.
'돌파도 어렵고 슈팅도 어렵다.'
도라익은 너무 지쳤다. 괜히 드리블하다가 힘 조절에 실패하면 골라인 밖으로 공이 나갈지도 모른다. 가운데로 돌파하는 가능성은 이미 다른 센터백이 확실히 차단했다.
'제임스처럼 해야 해.'
도라익은 공을 발바닥으로 끌며 뒤로 물러났다. 센터백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괜히 앞으로 움직이다가 도라익이 갑자기 치고 달리면 역동작이 걸려 완전히 제쳐질 수 있다.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 도라익은 슈팅을 선택했다. 그것도 강슛 말고 공 밑을 차서 포물선을 그리는 칩슛이었다.
살짝 아웃사이드에 맞은 공은 큰 포물선을 그렸다.
도라익 앞을 막은 센터백은 전혀 반응하지 못했고, 꽤 앞으로 나와 도라익이 골라인 쪽으로 돌파하는 걸 막던 키퍼는 황급히 뒷걸음질 치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도라익은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환호했다. 예상 이상으로 훌륭한 슛은 공을 정확히 골대 안으로 보냈다.
"우씨."
기대를 잔뜩 안고 공을 바라보던 도라익이 억울한 표정으로 외쳤다. 스토크시티 벤치 모두 벌떡 일어섰고 맨유 벤치는 의자에 주저앉아 단체로 얼굴을 감쌌다.
골대로 들어가는 공을 손으로 쳐낸 센터백은 주심의 판정을 기다리지 않고 벤치 쪽으로 걸었다. 레드카드가 분명하기에 남은 경기는 대기실로 가서 TV로 지켜봐야 한다.
도라익은 느리게 걸어가서 수비수가 쳐낸 공을 잡았다. 맨유 수비수한테 레드카드를 제시한 주심이 걸어와서 질문했다.
"네가 찰 거야?"
고민하던 도라익의 눈에 풀이 잔뜩 죽은 찰리가 들어왔다. 두 번째 실점은 찰리가 섣부르게 슈팅하는 바람에 상대에게 반격 기회를 주면서 생긴 일이다.
비록 비기기만 하면 되는 경기지만, 스토크시티로선 맨유의 공격을 반드시 막아낸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기에 실점을 초래한 후 찰리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경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어렵게 결정을 내린 도라익은 공을 들고 찰리한테 다가갔다.
"꼭 넣어."
찰리는 도라익이 건네는 공을 받으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맨유 상대로 해트트릭을 할 기회를 앞두고 페널티킥을 양보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 잠시만요. 눈물 좀 닦고 올게요.
- 정말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11골을 넣은 도라익 선수가 10골을 넣은 찰리 선수한테 페널티킥을 양보합니다.
- 도라익이 주제넘게 페널티킥을 뺏으려 했다고 채팅창에서 절 괴롭히던 분들 어서 사과하세요.
- 8일 동안 뜨겁던 논쟁을 단숨에 불식시키는 장면입니다. 도라익 선수가 해트트릭 기회를 포기했습니다.
- 리그 1위의 맨유 상대로 해트트릭. 얼마나 많은 공격수가 꿈꾸던 상황일까요. 그러나 팀의 승리를 위해 도라익 선수는 확실한 키커인 찰리한테 양보합니다.
- 스토크시티 팬들도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다가와 도라익과 찰리를 얼싸안았다. TV를 갓 켠 사람이라면 이미 페널티킥을 성공한 줄 알았을 것이다.
찰리는 도라익이 넘긴 공에 진하게 키스했다. 그리고 결연한 눈빛으로 공을 그라운드에 놨다.
7만6천 명에 달하는 관중이 모두 일어섰다. 아무리 맨유가 강팀이고 스토크시티가 약팀이라고 해도 한 명이 퇴장한 상황엔 얘기가 달라진다.
삑 소리와 함께 찰리가 달렸다. 찰리의 커다란 발이 공을 톡 찼다. 고운 포물선을 그린 공이 골대로 느릿느릿 날아갔다.
오른쪽으로 힘껏 몸을 날린 키퍼가 황급히 왼쪽 다리를 들었다. 그러나 찰리의 공은 꽤 높아 키퍼가 건드리기 어려웠다.
찰리는 래시포드가 실패했던 방식으로 페널티킥을 성공시켰다.
- 도라익 선수와 찰리 선수가 부둥켜안습니다.
- 도라익 선수가 기쁘게 웃습니다. 개인 욕심보다 팀의 승리가 더 중요한 선수. 저 선수가 바로 우리 선숩니다.
- 경기가 이대로 끝나고 빨리 인터뷰 듣고 싶군요.
- 그간 너무 모범적인 인터뷰만 해서 조금 답답했는데요. 오늘은 시원하게 질러줬으면 합니다.
- 아시안컵 결승전이 끝나고 한 인터뷰가 참 인상적이었죠. 우리는 팀이었고 저들은 11명이었습니다.
- 캬. 소주 생각나게 하는 멘트네요.
맨유는 페널티킥 실축으로 컨디션이 망가진 래시포드를 내리고 다른 공격수를 올렸다. 스토크시티는 도라익을 내리고 쇠렌센을 올렸다.
쇠렌센은 당연히 수미로 뛰었다.
산체스와 샘 앨런이 번갈아 찰리를 도와 반격에 가담하고 남은 사람은 수비에만 집중했다.
페널티킥 실패 이후 바로 페널티킥 실점을 한 맨유 선수들은 멘탈이 적잖이 흔들렸다. 남은 기간에 두 골을 넣어야 하는데 퇴장으로 머릿수 하나 부족하다.
게다가 몸싸움에 능한 센터백의 퇴장으로 찰리 아담이 살아나며 스토크시티의 반격 효율이 엄청나게 올랐다.
시간은 1분 1초 정직하게 흘렀다.
교체된 도라익은 제임스와 도란도란 정겹게 대화하며 편하게 경기를 관람했다. 외계인이 UFO를 타고 와서 개입해도 경기 결과는 바뀔 것 같지 않았다.
- 첼시가 2:0으로 경기를 마무리했습니다. 맨유가 남은 5분 동안 2골을 넣지 못하면 첼시가 우승합니다.
부상과 VAR 판정 때문에 추가 시간이 좀 길었다.
- 위건이 89분에 페널티킥에 성공하며 2:1로 셰필드를 이겼습니다. 이대로는 셰필드가 강등합니다.
- 리버풀이 2:2로 경기를 마감하며 리그 3위가 되었습니다.
- 아스널은 역시 4위죠? 2:1로 승리했지만 말입니다.
- 토트넘이 4:0으로 맨시티를 이기고 5위 지켜냅니다.
- 맨시티는 6위지만, FA컵 우승 여부와 무관하게 유로파리그로 직행합니다.
마지막 5분은 처절함밖에 없었다. 양 팀 모두 체력이 바닥을 보여 패스나 크로스 실수가 잦았다. 한쪽은 어떻게든 골을 만들려고 애썼고 한쪽은 비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몸을 던졌다.
- 휘슬이 울렸습니다. 30-31시즌 프리미어리그가 폐막합니다.
- 도라익 선수 축하드립니다. 스토크시티는 41점으로 리그 15위가 되며 잔류에 성공하였습니다.
- 16위는 놀랍게도 시즌 중반까지 중상위권이던 풀럼이고 17위는 마지막 순간 기사회생한 위건입니다.
- 강등팀은 셰필드와 찰턴 그리고 왓포드입니다.
- 잠시 후 맨 오브 매치 인터뷰가 있을 예정인데요. 아주 기대됩니다.
데뷔전인 뉴캐슬과의 경기에서 3골 1도움을 달성했지만, MOM은 시종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준 뉴캐슬 공격수가 선정되었다. 위건과 벌인 경기에서 첫 MOM이 되고 볼튼과 벌인 경기에도 MOM이 되었다.
오늘 경기까지 하면 3경기 연속 MOM으로 선정된 셈이다.
기대하던 인터뷰가 시작됐다.
안타깝게도 도라익의 인터뷰는 모범답안 그 자체였다.
- 마지막으로 소감 부탁합니다.
- 버틀랜드가 무사했으면 좋겠고요. 베르딩요 선수도 빨리 회복하여 그라운드에 복귀했으면 합니다.
- 작가의말
제임스처럼 = 정상적이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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