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
리그 28라운드.
스토크시티는 홈에서 웨스트 브로미치와 2:2 무승부를 냈다. 도라익이 2골을 넣어 자신의 리그 득점을 31개로 올리는 기쁜 일이 있었지만, 도라익이 78분에 교체로 내려간 뒤 연속 2실점을 하며 아쉬운 무승부를 냈다.
"괜찮아. 어차피 토트넘이 이겨도 우리가 1점 앞서."
스토크시티가 58점, 토트넘이 54점. 토트넘이 이긴다고 쳐도 스토크시티는 단독 1위다.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긴장한 마음으로 웨스트햄을 응원했다.
시즌 초반에 아스널, 리버풀, 맨시티, 크리스털 팰리스, 첼시를 이겼던 웨스트햄이다. 여기서 리버풀과 맨시티를 뺀 남은 셋은 런던 팀이다.
비록 첫 대결에서 토트넘에 졌지만, 올해 런던 팀들끼리 펼친 대결에서 가장 많은 점수를 딴 팀이기에,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웨스트햄의 선전을 응원했다.
"언론이 우릴 아주 짓밟으려고 하는데?"
도라익이 SNS에 언론들이 낸 허위 기사를 찍어 올렸고, 도라익과 계약한 광고주들이 단체로 언론들에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그 탓에 스토크시티가 주춤하자 언론들이 뼈다귀를 본 개처럼 물고 놓지 않았다.
[도라익 원맨 팀의 한계.]
[빈집털이로 우승할 순 없다.]
[3라운드 내로 프리미어리그 왕좌가 바뀔 것.]
[전문가들, 토트넘 우승 가능성 88%라고 호언장담.]
"마지막 3라운드에 스토크시티는 맨유와 에버턴 및 첼시 등 강팀과 만난다. 반면 토트넘은 첼시, 사우샘프턴, 뉴캐슬과 대결한다. 스토크시티는 마지막 3라운드에 1점에서 2점의 승점을 올릴 거로 예상하고, 토트넘은 7점에서 9점으로 예상한다. 스토크시티가 35라운드까지 토트넘을 5점 이상으로 따돌리지 못할 경우, 토트넘의 우승이 확실하다."
토미가 읽은 기사 내용에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킥킥거렸다.
"얘네 이럴수록 힘이 나."
제임스가 말했다.
차라리 스토크시티가 우승 가능성이 크다고. 창단 200년이 되기 전에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춰주면 오히려 부담된다.
호의에는 악의로 받아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죽으라고 욕하면 오히려 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원체 승부욕 없이는 되기 힘든 스포츠 선수고, 이미 몇 번이나 마음 졸이는 고생을 해서 어느 정도 면역까지 생겼다.
"지금까지 꾸준히 잘한 팀이 끝까지 잘할 가능성이 훨씬 크지. 갑자기 잘하는 팀은 어딘가 탈이 나기 마련이야."
토트넘은 후반기에 갑자기 폭발해서 6연승을 거뒀다. 상대한 팀 중에 맨시티 빼고는 강팀이 없었지만, 6연승이 얼마나 어렵고 부담이 되는지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지난 시즌 말미에 경험했다.
그땐 강등이 확실하다고 낙심하다가 갑자기 큰 희망이 생긴 탓에 압박이 매우 심했다. 토트넘이 받는 압박이 그때만큼 되는지는 몰라도, 결코 편한 마음이 아닐 거라고 자신할 수 있다.
"골이다!"
경기 7분에 수비수와 키퍼의 연이은 실수로 토트넘이 실점했다.
"찰리가 훌륭한 선수는 맞는데, 주장은 좀 아니지."
선수로서는 만점에 가깝지만, 주장으로선 합격 점수도 간당간당하다.
"그러니까 도우가 대단한 거야."
도라익은 호승심이 강하다. 여러 종류의 공포와 싸워 이길 정도로 강하다.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승리에 대한 갈망이 두려움을 훨씬 넘었다. 지면 어떡하지 걱정하는 것보단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 고민하는 현실적인 면이 두드러진 성격이다.
매우 솔직하지만, 확신이 없이 구호를 남발하지 않는다. 도라익이 컨디션이 좋으니 이길 것 같다고 하면 보통은 승리한다.
게다가 긍정적이다. 안타깝게 지거나 아쉽게 비긴 경기에서도 늘 배울 것을 찾으며 다음 경기를 대비한다.
누가 가르친 적도 없으니 도라익은 타고난 리더다.
"만세!"
90분 경기가 끝나고 웨스트햄이 1:0으로 승리했다. 패배한 토트넘은 스토크시티와 4점 차이로 점수가 벌어졌고, 승리한 웨스트햄은 리그 6위에 랭크되며 유로파리그를 노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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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 29라운드.
하루 먼저 진행한 경기에서 토트넘과 아스널이 2:2로 비겼다. 토트넘은 물론 아스널 역시 올 시즌 가장 훌륭한 컨디션을 보였다.
우승은 스토크시티나 줘라. 넌 죽어도 못 준다.
백 년이 넘은 두 앙숙, 런던 더비 중에서 최고로 불리는 북런던 더비에 임한 두 팀은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상대를 이기려 했다.
그 결과는 바로 양패구상. 스토크시티는 어부지리를 얻었다.
"오늘 이기면 우리가 6점으로 앞서. 언론들이 뭐라고 하는지 궁금하네."
"6점으로 부족하다고 하겠지."
"빨리 우승하고 어떤 기사가 나오는지 보고 싶어."
경기 전, 선수들이 웃음꽃을 피웠다.
"발제르, 오늘 패스 위주로 경기할 거야."
도라익이 발제르에게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왜, 컨디션이 별로야?"
"아니, 도움왕 하려고."
말문이 막힌 발제르가 입만 뻐끔거렸다.
"너랑 토미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그러니까 득점을 염두에 두고 위치 선정을 하라고."
"그러다 우리가 골 못 넣으면?"
"그럼 내가 넣어야지 어쩌겠어."
발제르는 도라익의 근거 있는 자신감이 너무 부러웠다.
'난 시즌 15골이라도 넣었으면 좋겠다.'
28라운드 31골은 상상만으로도 부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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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포드는 홈임에도 불구하고 초반부터 라인을 확 내려 수비에 전념했다. 홈팀을 응원하는 팬들도 그런 선수들한테 뭐라고 하지 않았다.
- 왓포드가 정정당당하게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잘하면 프리미어리그 34골의 저주를 깰 것도 같은데 말이죠.
베르딩요가 34골로 골든 슈즈를 2번이나 탔다. 93-94시즌의 34골과 타이기록만 2번인 셈이다.
- 왓포드는 리그 중위권이니까 승리가 절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런 수비 전술을 쓸 수 있는 거죠.
- 페널티킥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네요.
두 해설의 바람은 후반전 57분에 이뤄졌다. 도라익이 현란한 발재간으로 페널티 박스 안에서 수비수 세 명을 벗겨냈다.
대부분 선수는 수비수 세 명의 포위를 벗겨내면 패스하거나 슈팅하는 게 상식이다.
도라익은 아니었다.
도라익은 중앙으로 짧게 치고 슈팅 페이크를 준 다음, 갑자기 골라인 방향으로 공을 치며 돌파를 시도했다.
도라익의 방향 전환에 두 번이나 속으면서 스트레스가 쌓였던 왓포드 수비수가 몸을 돌리며 오른팔 팔꿈치로 도라익의 얼굴을 가격했다.
사실 도라익을 때리려고 했던 건 아니고, 팔을 뻗어 막으려 했을 뿐이다. 다만, 너무 긴장한 탓에 잠깐 도라익의 순발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깜빡해 결국 레드카드를 받는 엄중한 반칙을 저지르고 말았다.
벌떡 일어난 도라익이 레드카드를 받고 머리를 부여잡은 선수의 어깨를 다독였다. 왓포드 선수는 도라익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한 번 포옹한 뒤 경기장을 떠났다.
- 어, 토미가 차네요?
- 도라익 선수가 1키커 아니었나요?
지금 도움 1위는 토트넘의 미드필더인데, 고작 11개다. 찰리 때문에 크로스 비중이 높아 패스가 출중함에도 많은 도움을 기록하지 못했다.
다른 팀들도 선수 부상이 많아 잘하는 선수가 꾸준히 잘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도라익이 31골이나 넣었지만, 키퍼나 수비수의 긴 패스로 득점한 일이 많아 스토크시티에도 도움을 많이 기록한 선수가 없다.
8도움의 도라익이 도움왕을 노려도 괜찮을 법한 상황이다.
- 이게 뭔 일입니까?
또라이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두 해설은 스토크시티가 1골을 넣어 토트넘을 6점이나 앞섰음에도 기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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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를 가하는 토트넘, 스토크시에 압박을 가하다.]
[3점 차이로 좁혀진 점수. 우승 행방은 더욱더 묘연해졌다.]
[위기에서 분발하는 토트넘, 위태위태한 스토크시티.]
2시간 전에 끝난 경기에서 토트넘이 승리를 거둬 점수 차이를 3점으로 좁혔다. 스토크시티가 이기면 바로 6점으로 벌어질 점수인데, 언론들은 3점 차이로 좁힌 것만 강조했다.
홈 경기에 임하는 스토크시티 입장에선 기가 찰 따름이다.
"이러다 우리가 이기면 어쩌려고."
토트넘 경기가 끝나고 2시간 10분 뒤에 스토크시티의 경기가 열린다. 스토크시티의 홈이고 상대는 강등권에 있는 뉴캐슬이다.
도라익에게 해트트릭을 3번이나 당한 팀이고 올 시즌 팀에 문제가 생겨 전투력도 엉망이다.
그런데도 언론들은 토트넘의 승리에 초점을 두며 스토크시티에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었다.
"그게 궁금해서라도 꼭 이겨야겠어."
선수들은 다부진 결의로 경기에 임했다.
뉴캐슬은 스리백이 아닌 포백으로 전환했고, 두 윙백 모두 수비에 전념했다.
스리백 전술에 대한 파훼법을 테일러가 확실히 보여준 적 있기에 이번 경기에서만 다른 포맷으로 나왔다.
안타깝게도 스토크시티가 3-5-2로 전환했다.
포워드로 출전했던 줄리엔이 센터백으로 복귀하면서 스테판과 네이선과 함께 스리백을 구성했다.
스미스와 오창범이 위치를 올려 미드필더처럼 뛰었다.
발제르가 포워드 자리로 가서 도라익과 함께 투톱을 결성했고, 루이스와 토미와 제임스가 미드필드 중앙을 책임졌다.
4-4-2로 나온 뉴캐슬도 공격수 한 명을 밑으로 내려 4-5-1로 전환했다.
- 양 팀의 준비가 큰 차이를 보입니다.
- 4-4-2에서 3-5-2로 전환했지만, 스토크시티는 안정감이 보입니다.
- 반면, 4-4-2로 나온 뉴캐슬은 4-5-1로 전환한 후 선수들 움직임이 통일되지 못했습니다.
스토크시티와 대결하기 위해 일주일 내내 4-4-2를 훈련했던 뉴캐슬이다. 시즌 중에 새로운 포메이션을 훈련하는 건 금기라고 할 수 있는데, 강등권에 처한 데다가 리그 막바지여서 뉴캐슬은 과감히 모험했다.
문제는 꼼꼼한 성격의 테일러가 시즌 전부터 4-4-2에서 4-4-1-1 혹은 3-5-2로 전환하는 훈련을 자주 했다는 거다.
3-5-2의 스토크시티 역시 조금 불편하지만, 뉴캐슬 선수들이 허둥지둥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안정감 있게 보였다.
"루이스. 스리백이니까 좀 더 과감하게 올라와."
"제임스. 오른쪽 수비 돕는 거 잊지 마."
"토미. 좀 더 중앙으로 와. 왼쪽에 있으니까 나랑 겹치잖아."
도라익의 잔소리와 더불어 시간이 흐르며 스토크시티의 3-5-2가 점점 위력을 발휘했다.
- 도라익 선수 침투!
중앙으로 간 토미의 절묘한 패스였다. 앞뒤로 움직이며 센터백의 주의력을 분산하던 도라익이 갑자기 달려 토미의 패스를 잡았다.
- 슛하나요?
키퍼가 각을 좁히고 수비수 한 명이 먼 포스트로 향하는 슛을 방해했다.
토미가 왼발이 아닌 오른발로 패스했으면 도라익은 바로 왼발로 먼 포스트를 노렸을 것이다.
아쉽게도 왼발 패스여서 왼발로 멈춘 다음 오른발로 왼쪽으로 보내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 짧은 사이 센터백 한 명이 먼 포스트로 향하는 슛 경로를 제한했다.
도라익은 간단한 슈팅 페이크를 줬다. 딱히 누굴 속이려는 게 아니라 다음 동작을 방해받지 않기 위한 준비 동작 같은 거였다.
과연, 키퍼나 센터백 모두 도라익의 페이크에 반응하지 않았다.
도라익은 단지 키퍼와 센터백이 페이크를 보며 잠깐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페이크를 마친 도라익은 왼발로 공을 오른쪽으로 보낸 다음, 오른발 아웃 사이드로 공을 밀어 뒤로 보냈다.
어느새 달려 온 발제르가 아무런 방해도 안 받고 왼발로 슈팅해 골을 넣었다.
10도움을 이룩한 도라익은 도움왕까지 1도움의 거리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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