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라익
- 도라익 선수 단독 찬스입니다.
- 키퍼가 나옵니다.
- 도라익 선수 왼쪽으로 드리블합니다.
- 슛!
- 아, 수비수가 막았습니다.
맨유의 수비 체계는 매우 훌륭했다. 도라익이 전반전에 단독 찬스를 세 번 얻었는데 키퍼 혹은 수비수가 득점을 방해했다.
그리고 후반전에 와서도 똑같은 광경이 반복됐다. 최선을 다해 키퍼를 제치더라도 어느새 수비수가 골대를 막고 있었다.
강한 슛으로 크로스바 밑을 정확히 노릴 수 있다면 골을 만들 수 있지만, 경기장 절반을 뛰고 키퍼를 제치느라 지친 도라익에겐 무리였다.
- 다행인 점은 토미의 가세로 수비가 탄탄해졌습니다.
속도가 빠르고 체력도 충분한 토미 덕분에 수비가 안정되었다. 가끔 제임스가 자기 구역을 비워도 토미가 적절하게 메꿔줬다.
- 패스 미스.
- 제임스가 가로챕니다.
- 상대 공을 빼앗는 건 별로인데 흘린 공을 줍는 건 세계 일등인 것 같습니다.
- 어느새 토미가 앞으로 뛰며 공을 달라고 손을 듭니다.
- 제임스 패스.
- 토미가 아닙니다. 도라익 선수한테 찔렀습니다.
'이거야.'
도라익이 달리는 앞에 제임스가 패스한 공이 배달됐다. 도라익은 달리던 템포 그대로 공을 툭 건드렸다. 도라익을 쫓던 수비수가 급속히 벌려지는 거리에 절망했다.
'너희도 사람인데 이쯤이면 지쳤겠지.'
번번이 쫓아와서 득점을 방해하던 수비수들이다. 그러나 이번엔 쫓아오는 속도가 아까보다 현저히 느리다.
'이 기회만 기다렸다.'
키퍼가 앞으로 나와 각을 좁혔다. 칩슛을 때려도 되지만, 키가 크고 팔이 긴 맨유 키퍼를 상대로 모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 백숏입니다. 도라익 선수 새 기술이죠?
- 키퍼가 당황합니다.
- 그대로 슛합니다.
- 골! 동점 골입니다. 3경기 4골입니다.
- 키퍼의 수비 범위로 공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키퍼는 반응하지 못했어요.
평범한 골이었다. 키퍼를 앞두고 백숏으로 슈팅 각도를 만든 다음 골에 성공했다.
- 도라익 선수가 처음으로 오른쪽으로 돌파했습니다.
- 그리고 오른발로 슛했죠.
- 확실한 기회를 노려 확실한 골을 넣은 거네요.
- 지금까지 왼쪽으로만 돌파하며 빌드업한 겁니다.
- 이번에도 왼쪽으로 가려는 척하며 백숏으로 방향을 틀었죠.
골을 넣은 도라익은 한 손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며 비틀거렸다.
- 이번엔 무슨 세리머니인가요?
- 부족한 소견으로는 외야수 수비 같습니다.
- 도라익 선수 배우로 전향해도 대성할 것 같습니다. 마치 높은 곳에서 야구공이 떨어지는 환상이 보입니다.
- 강 해설은 요즘 헛것도 보시나 봐요.
- 박 해설 나한테 안 맞은 지 꽤 됐죠?
- 40년 됐습니다.
76분에 도라익이 넣은 골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맨유는 바로 수비수와 공격수 한 명씩 교체해 분위기 쇄신을 꾀했다.
스토크시티 역시 지친 제임스를 내리고 쇠렌센을 넣었다.
- 쇠렌센 선수 오랜만이네요.
- 이 선수의 장점은 연결입니다. 패스를 안전하게 받아 안전하게 주는 게 특징이죠.
- 루이스 선수가 위치를 올립니다.
맨유도 스토크시티도 지쳤다. 유로파리그를 뛰는 스토크시티도 일정이 만만치 않은데 챔피언스리그를 뛰는 맨유라고 편할 리 없다.
스쿼드가 두터워서 그럭저럭 버티곤 있지만, 래쉬포드를 비롯한 노장들이 지난 시즌처럼 뛰어주지 못한 바람에 경기 막판에 급격히 지쳐버렸다.
- 맨유의 코너킥입니다.
- 도라익 선수 수비에 투입됩니다.
- 찰리의 부재로 약해진 제공권을 지금까지 도라익 선수가 잘 메꾸고 있습니다.
코너킥 키커는 베르딩요였다. 베르딩요가 올린 공은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먼 포스트로 향했다.
- 도라익 선수 머리에 공이 살짝 스쳤습니다.
- 놀라운 점프력입니다.
- 먼 포스트에 선 쇠렌센 선수가 달려 나오다 오버헤드킥으로 공을 차냅니다.
늘 틀에 박힌 플레이만 일관하던 쇠렌센이 급한 나머지 오버헤드킥을 했다. 헤딩하기엔 공이 너무 낮고 발로 차기엔 높다. 공을 멀리 차 내려는 생각이 간절한 나머지 쇠렌센은 오버헤드킥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토미가 공을 잡습니다. 그러나 벌써 수비수가 압박합니다. 몸을 돌릴 수 없어요.
도라익이 달려가며 공을 요구했다. 토미는 익숙지 않은 오른발로 공을 건드려 도라익이 달리는 경로로 보냈다.
적당한 속도로 달린 도라익이 공을 툭 차고 가속했다.
맨유 수비수는 도라익을 막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도라익이 공을 잡자마자 가속할 줄을 몰랐고, 방향을 자신의 왼쪽으로 틀 줄은 더욱더 몰랐다.
도라익은 팬텀 드리블로 당황하여 굳어버린 맨유 선수를 가볍게 제쳤다.
"도우!"
토미의 외침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도라익은 공을 툭 차고 또 가속했다. 뒤에서 잔디와 거칠게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협동 수비하러 달려오던 맨유 수비수가 급한 마음에 백태클을 시도한 것이다. 주심이 빠르게 달리며 손가락으로 맨유 선수를 가리켰다. 잠시 후 옐로카드를 줄 거란 예고였다.
비록 태클은 실패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계획에 없던 가속으로 빨라진 속도 때문에 도라익이 생각했던 대로 드리블이 진행되지 않았다.
'뭐가 이리 많아.'
앞에 수비수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달려들 타이밍을 재고 있고 한 명은 백업했다.
'걸려들어라.'
도라익은 공을 살짝 길게 찼다. 예상대로 맨유 선수가 달려왔다. 도라익은 마지막 세 걸음에 급가속하여 먼저 공을 차지한 다음 마르세유 턴을 펼쳤다.
다리에서 뜨거운 기운이 위로 올라왔다. 도라익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뜨거운 기운이 사라지자 다시 몸이 생각처럼 움직였다.
큰 고비를 넘긴 도라익은 오른쪽으로 공을 툭 쳤다. 뒤에서 백업하던 수비수가 달리다가 공을 향해 슬라이딩 태클을 했다.
도라익은 백숏으로 방향을 왼쪽으로 바꾼 다음 여유롭게 전진했다.
이젠 키퍼만 남았다. 도라익이 대형 로빙슛으로 머리를 넘길 수도 있기에 키퍼는 페널티킥 마크 근처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출격 타이밍을 쟀다.
그때 코너킥을 찬 베르딩요가 어느새 돌아와서 도라익에게 접근했다. 도라익은 공을 차고 가속하는 거로 베르딩요를 떨구려 했다.
그러나 베르딩요는 예상했다는 듯이 도라익과 비슷한 타이밍에 가속해 오히려 거리를 좁혀버렸다.
'내가 이긴다.'
도라익은 베르딩요한테 거의 따라잡힐 때 백숏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베르딩요는 도라익의 오른쪽에서 달렸는데 백숏 이후엔 왼쪽에서 달리게 되었다.
브라질인의 우월한 근육 유연성으로 방향을 전환한 베르딩요가 다시 도라익한테 달라붙으려 했다. 키퍼 역시 적당힌 위치에 자리를 잡고 도라익의 슈팅을 제한했다.
'넌 지쳤지?'
도라익이 다시 백숏을 써서 왼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의외의 전개에 베르딩요는 다리가 꼬여 쓰러졌고 키퍼는 다급히 오른편으로 달렸다.
도라익은 왼발을 신중히 휘둘러 공을 찼다. 잘 차인 공은 고운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의 왼쪽 포스트 쪽으로 날아갔다.
오른쪽 포스트를 지키려고 뛰던 키퍼가 급히 멈췄지만, 이미 공이 정수리 위를 지난 다음이었다.
'제발.'
도라익과 키퍼가 같은 생각을 했다. 물론, 단어는 같아도 그 의미는 상반되었다.
크로스바를 살짝 스친 공이 골대에 떨어졌다. 키퍼는 황급히 달려가 공을 밖으로 끌어내 몸으로 꾹 누른 다음 주심을 쳐다봤다.
주심의 손이 센터 써클을 가리켰다. 호크아이 시스템이 공이 완전히 골라인을 넘어갔다고 주심한테 신호를 보낸 것이다.
- 후아. 숨 쉬는 걸 잊었습니다.
- 죄송합니다. 방금 너무 경기에 집중한 나머지 해설할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네요.
- 원정에서 로잔에 넣은 세 번째 골보다는 간단해 보입니다.
- 그러나 상대가 프리미어리그 1위 팀인 맨유라는 걸 생각하면 어느 골이 더 어려운지 판단이 쉽겠죠.
- 로잔과 벌인 경기에서 속도와 기술 그리고 힘의 완벽한 조합을 보여줬다면 오늘은 속도와 기술뿐입니다. 바디 체크로 수비수를 제압하는 장면은 없었습니다.
로잔에 넣은 골은 야수와 정면 대결하는 듯 야성이 물씬 풍겼고 오늘은 노련한 사냥꾼 같은 냉철함이 돋보였다.
- 경기 81분. 도라익 선수가 78미터를 질주하여 골에 성공합니다.
- 직선거리가 78미터이고 실제 이동 거리는 더 됩니다.
- 쇠렌센 선수의 터치부터 계산하면 또 길어지지만, 원칙상 토미가 패스한 시각부터 거리를 잽니다.
- 잠깐. 강 해설 설마 우는 겁니까?
- 아니요. 눈에 모래가 들어갔습니다.
- 자, 아직 경기가 남았습니다.
스토크시티는 필사적으로 수비하고 맨유는 수비수 한 명을 빼고 공격수를 넣으면서까지 공격에 최선을 다했다.
- 도라익 선수 2031년 한 해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경기까지 합쳐 38골 30도움을 기록했습니다.
- 이런 선수한테 골든보이 상을 주지 않은 주최 측에 강력히 항의합니다.
경기 시작 전에 발표한 골든보이 투표에 도라익은 3위에도 들지 못했다.
- 도라익 선수 곧 17세가 됩니다. 라리가의 두 슈퍼 구단이 움직일 수도 있다는 뜻이죠.
- 메시와 호날두의 은퇴 이후 압도적인 우상이 부재합니다. 맨유가 무리하여 베르딩요를 계약한 것도 차세대 우상으로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 베르딩요를 영입하느라 세대교체가 늦어지고 있죠? 새로운 선수를 계약할 수 없기에 은퇴 시기가 된 노장들이 계속 뛰어야 합니다.
- 우상이 가지는 화제성과 경제적 영향력을 생각하면 프리미어리그 차원에서 도라익 선수가 타 리그로 넘어가는 걸 막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절대 우리가 프리미어리그랑 3년 중계 계약을 해서 편드는 게 아닙니다.
- 박 해설은 가끔 쓸데없이 솔직해서 탈입니다.
- 작가의말
이 글을 볼 일이 없겠지만, 엘링 홀란드 선수한테 감사드립니다. 홀란드 선수가 아니었으면 감히 이런 식으로 글을 쓸 엄두가 안 났을 겁니다.
이 글에 개연성을 불어 넣은 홀란드 선수를 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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