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처럼 움직이라
골에 성공한 찰리 아담은 입을 꾹 다문 채 하늘을 쳐다봤다. 도라익은 재빨리 달려가서 찰리한테 엉겨 붙으려는 제임스를 붙들었다.
환호하며 달려오던 스토크시티 선수들도 그 모습에 발걸음을 늦췄다.
하늘을 보던 찰리가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스토크시티의 엠블럼에 키스했다.
3만 명에 달하는 스토크시티 팬들이 발을 구르며 승리의 축가를 불렀다.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한데 뭉쳐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중앙선을 넘은 후 서로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각자 자리로 흩어졌다.
경기가 재개됐다. 도라익과 제임스가 공을 잡은 아스널 선수한테 장난감 낚싯대를 본 고양이처럼 달려들었다.
뒤로 돌린 공을 받은 키퍼가 침착하게 오른쪽 풀백에게 패스했다. 풀백은 공을 수미한테 줬고, 수미는 왼쪽 윙으로 연결했다.
산체스가 아스널 왼쪽 풀백을 마킹하며 뒤로 달렸다. 공을 잡은 아스널 윙은 지체하지 않고 가운데로 패스했다.
아스널 미드필더 셋이 빠른 패스를 주고받으며 수비를 한 층 벗겨냈으나 어느새 제임스와 도라익이 돌아와 수비에 가담했다.
중앙의 압박이 강해지자 공은 다시 오른쪽으로 갔다. 오른쪽 윙이 라인을 타고 드리블하다가 낮은 크로스를 올렸다.
수비수 몸에 한 번 맞아 느려진 공은 키퍼가 손쉽게 잡았다. 공을 잡은 버틀랜드는 지체하지 않고 강한 킥으로 속공을 발동했다.
198cm의 키에 105kg의 몸무게를 자랑하는 찰리 아담. 사실 키에 비해 몸무게가 조금 부족한 편이다.
그러나 몸무게를 낮추지 않으면 무릎 부상의 위험이 커지기에 파워 일부를 희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리 아담은 아스널 수비수와 벌인 몸싸움을 가볍게 이겼다. 키가 더 커서 몸싸움을 벌일 때 체중을 훨씬 많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우!"
헤딩을 마친 찰리가 도라익을 부르며 몸을 돌려 앞으로 달렸다.
어느새 중앙선까지 달려온 도라익이 찰리가 헤딩으로 보낸 공을 잡고 드리블했다.
아스널은 양쪽 풀백 모두 공격에 가담해서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다. 빠르게 후퇴한 수미는 미친놈 제임스를 마킹해야 하고, 돌아오는 풀백도 샘 앨런과 산체스를 두고 도라익의 수비에 투입될 수 없다.
작게 보면 2대2 찬스고 크게 봐도 5대5 찬스다.
도라익은 섬세한 터치로 상대 센터백에 접근한 후, 왼발로 플립플랩을 연속 두 번 펼쳤다. 같은 플립플랩이 아니라 하나는 오른쪽 먼저 하나는 왼쪽 먼저로 해서 센터백이 함부로 못 움직이게 묶어뒀다.
그러곤 공을 센터백 발목 옆을 스치게 찬 후, 오른팔을 뻗어 방해하지 못하게 견제하며 앞으로 달렸다.
아스널 센터백이 반칙으로 도라익을 멈추려 했지만, 처음부터 작정한 거였으면 몰라도 뒤늦게 결정을 내린 탓에 쏜살같이 달리는 도라익을 놓치고 말았다.
벵거 시대부터 스피드로 유명한 아스널 풀백이 샘 앨런을 버리고 도라익을 쫓았다.
샘 앨런은 가운데로 가지 않고 계속 도라익의 왼쪽에서 달렸다. 샘 앨런이 가운데로 가면 도라익을 놓친 센터백이 샘 앨런을 마킹한다. 키가 작은 샘 앨런은 몸싸움에 전혀 장점이 없다.
차라리 왼쪽 라인으로 달리는 게 훨씬 팀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속공 상황에서 라인을 타는 것도 멍청한 짓임을 알기에 도라익과 거리를 조금씩 좁히며 달렸다.
도라익이 빠르다곤 하지만 드리블하며 달리는 속도가 그냥 달리는 속도만큼 빠를 순 없다. 웬만한 수비수 상대로는 드리블하면서도 거리를 벌리지만, 아스널의 풀백은 스피드가 도라익보다 크게 느리지 않았다.
도라익을 따라잡은 풀백이 앞을 가로막았다. 도라익은 오른발로 공을 왼쪽에 보낸 후 사선으로 부드럽게 찔렀다.
도라익과 비슷한 속도로 달리던 샘 앨런이 급가속하며 도라익이 찌른 공을 받았다.
달리며 미리 골대 앞 상황을 파악한 샘 앨런은 지체하지 않고 땅볼로 패스했다. 무작정 패스만 대비하여 가까운 포스트를 비울 수 없었던 아스널 키퍼는 굴러가는 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봤다.
공이 앨런의 발을 떠나자 찰리는 어깨로 센터백을 밀었다. 중심을 잃은 센터백이 휘청이는 틈을 타 몸을 던진 찰리는 발꿈치 쪽으로 공을 맞혀 골대로 들여보냈다.
삐빅.
주심이 찰리의 반칙을 선언했다. 도라익이 주심을 향해 달려갔다. 이글이글 불타는 두 눈은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흉악했다.
"당신 미쳤어? 저게 어딜 봐서 반칙이야?"
"내 기준엔 반칙이다. 그리고 네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카드 주겠다."
제임스는 주심 대신 부심한테 달려갔다.
"이봐. 당신 시야가 주심보다 좋았잖아. 주심 위치에선 손을 썼는지 안 썼는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거든. 뭐라고 좀 해봐."
"주심의 판단이 정확합니다."
원래는 가장 강하게 심판한테 항의해야 할 샘 클루카스가 선수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잠시 후 VAR이 개입하여 찰리의 반칙을 선언했다. 센터백이 넘어질 당시는 아니지만, 그 전에 손으로 밀고 당겼던 영상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스널 센터백도 손을 썼지만, 찰리가 밀리거나 한 적이 없기에 심판들이 무시했다.
"자. 어차피 점수는 우리가 앞섰어. 실점만 안 하면 우린 우승이다. 그러니까 방금 골은 잊고 침착하게 수비하자."
샘 클루카스의 말에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개된 경기는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됐다. 찰리 아담이 전방에서 단단히 버티며 반격 시 공 소유권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리고 찰리 아담이 공을 잡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가는 도라익 덕분에 공격 속도가 보장된다.
도라익이 철저히 마킹 당할 땐 제임스가 있다. 그리고 속도와 기술 모두 부족함이 없는 산체스와 샘 앨런도 있어 아스널은 반격에 대비한 인원을 꽤 남겨야 했다.
그러다 보니 공격에 투입되는 자원이 줄 수밖에 없고, 수비적으론 큰 결함이 없는 네 수비수가 아스널의 공격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막아냈다.
가끔 수비진이 뚫리기도 했지만, 프리미어리그 주전 골키퍼 자리는 운으로 되는 게 아니다. 스토크시티의 주장이기도 한 버틀랜드가 웬만한 슈팅은 다 막아냈다.
마찬가지로 스토크시티의 반격도 슈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점점 줄었고, 어렵게 잡은 슈팅 기회도 아스널 키퍼가 모조리 막아냈다.
- 놀랍습니다. 스토크시티가 아스널과 벌인 중원 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수비진 앞에 단단하게 버틴 샘 클루카스, 약 먹은 것처럼 날뛰는 도라익과 제임스, 많은 팀이 탐내는 윙인 샘 앨런과 라리가에서 주전을 뛰다가 온 산체스. 이 다섯이 같은 뇌를 공유하듯이 유기적으로 뛰며 아스널 미드필더들을 압박했다.
"윌슨, 우리 프리미어리그에 남을 것 같습니다."
수석 코치는 선수들이 만들어낸 놀라운 결과물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처음부터 전술 개혁의 반대파였던 수석 코치는 정작 결정이 나자 가장 열성적으로 움직였다.
3연패에 풀이 죽었던 차에 새 전술의 위용을 눈으로 확인하니 마음이 울컥했다.
"이 전술에 가장 먼저 적응한 건 도우와 산체스였어. 그런데 지금은 모든 선수가 새 전술을 이해하고 뛰어주는군."
윌슨 감독이 어려운 전술을 가르친 건 아니다. 그러나 기존 선수들은 작년 7월부터 몸에 새긴 원래 전술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틀린 선택을 하거나 결정이 느린 일이 있었다.
그렇게 팀 전체가 버벅거리니 공격도 수비도 원활히 되지 않았고 찰턴과 벌인 경기에서 가장 심각하게 반영됐다. 4골을 먹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수비진의 판단이 서로 달라 움직임이 엇갈리면서 틈을 내준 것이다.
선수 한 명씩 보면 합리적인 판단을 한 듯하여 수비진의 실책을 쉽게 알 수 없었다.
하프 타임에 윌슨은 전술 얘기를 일절 하지 않고 칭찬으로 일관했다. 선수들은 휴식 시간이 길다고 불평하며 후반전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리고 후반전도 전반전처럼 활기차게 뛰었다.
- 아스널이 말렸습니다.
- 팀마다 고유의 리듬이 있습니다. 강팀일수록 자기 리듬으로 경기를 운영합니다. 그런데 이번 경기는 시종 스토크시티의 리듬으로 흘렀습니다.
부상으로 한 달 가까이 쉬느라 체력이 저하된 찰리 아담과 정신없이 날뛰느라 체력 안배에 실패한 제임스가 교체되었다.
수비적인 전술로 바뀌면서 산체스까지 교체된 후 도라익이 포워드 자리로 가서 속도를 이용해 반격했다.
'반드시 이겨야 해.'
어렵게 단독 찬스를 얻은 도라익은 남은 힘을 모두 끌어올려 슈팅했다.
- 아, 도라익 선수. 안타깝게 득점에 실패했습니다.
91분에 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얻었지만, 아쉽게도 살짝 빗나갔다. 도라익은 골키퍼 손에 맞았다며 주심한테 항의하다가 끝내 옐로카드 한 장 받았다.
그리고 경기가 끝났다.
- 기적 같은 승리입니다.
-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게 아닙니다. 이 경기에서 스토크시티는 시종일관 경기 흐름을 손에 잡고 아스널을 흔들었습니다.
- 아스널도 딱히 컨디션이 나쁜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스토크시티가 너무 훌륭했을 뿐입니다.
주최 측이 시상식 준비를 하는 사이, 스토크시티 선수와 스텝들은 스토크시티 팬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함께 승리를 즐겼다.
"헤이, 도우. 여기 잭 있어."
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던 도라익의 귀에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해적처럼 생긴 아저씨와 푸짐한 인상의 아줌마가 보였고, 비니를 쓰고 옷을 두껍게 입은 잭이 있었다.
- 작가의말
감투 복을 타고난 선수가 따로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의 페르난도 토레스. 첼시로 이적하며 수명을 많이 늘리긴 했지만, 그러고도 유럽컵에서 골든 슈즈 따냈죠.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