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타임
대한민국 축구협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이틀 전에 새롭게 협회장으로 취임한 차 감독이 기자 회견을 열었다.
"올림픽 메달 그리고 월드컵 토너먼트 진출을 단기 목표로 잡겠습니다. 청소년 선수 지원과 여자 축구 지원을 대폭 늘릴 예정이고, 협회가 주도하여 우수한 선수들의 유럽 진출을 돕겠습니다."
고작 2년 사이에 폭삭 늙은 차 감독이 말했다. 월드컵 감독 2번이나 하면서도 탱탱한 피부를 자랑하던 차 감독이 협회에서 2년 구르는 동안 주름이 잔뜩 늘었다.
"대표팀 감독과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교체할 겁니까?"
연설이 끝나고 기자들이 질문했다. 딱히 이슈가 없기에 질의응답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대표팀 감독은 교체할 예정입니다. 올림픽 대표팀 감독은 이번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대표팀 감독이 겸임할 거구요."
취임한 지 오래지 않아서 감독 두 명을 찾는 건 무리였다.
"훌륭한 인선이 있습니까?"
"현재 스토크시티의 감독인 알론소와 협상을 거의 마쳤습니다. 임기는 월드컵이 끝날 때 까집니다."
"혹시 협회장으로 당선되셨을 때 도라익 선수가 축하 인사를 했나요?"
기자가 웃으며 질문했다.
"아니요."
잠깐 고민한 차 감독이 대답했다. 축하 인사를 너무 받아서 누가 했고 누가 안 했던지 헷갈렸다.
"두 분 사이가 좋은 거 아니었나요?"
기자가 농담조로 질문했다.
"도라익 선수가 '대한민국 축구협회 소속'이 아니라서 그랬나 보죠."
폭소가 터졌다.
"'협회에 등록된 선수'들은 축하 문자나 전화를 보냈습니다. 화환을 보낸 선수도 있구요."
"화환을 보낸 선수가 누군가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오창범일 겁니다."
작은 웃음이 곳곳에서 터졌다.
"도라익 선수의 재등록은 언제 할 건가요?"
"선수와 직접 만나서 오해를 풀고 정식으로 등록할 예정입니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도라익 선수 이번 올림픽 뜁니까?"
#
스토크시티는 37라운드 원정 경기에서 발제르의 1골로 선덜랜드를 이기고 잔류를 확정했다.
도라익은 풀타임을 소화했으나 경기 70분 정도부터 체력이 급격히 빠지며 힘겨운 모습을 보였다.
토미와 페데리치가 부상으로 교체되지 않았으면 도라익은 경기 마지막까지 그라운드에 남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체력 테스트 수치는 분명히 예전과 비슷했는데.'
복귀하기 전에 5일 간격으로 체력 테스트를 3번 했다. 3번 다 예전과 비슷한 수치를 기록해서 리그에 바로 적응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처음으로 풀타임을 소화해 보니 전혀 아니었다.
답답한 나머지 도라익은 테일러를 찾아갔다.
"도우, 네 경기 데이터야."
유니폼에 단 칩을 통해 선수의 이동 경로와 거리는 물론 가속 횟수와 정지 횟수 등을 모조리 기록한다.
"여길 봐. 가속을 너무 많이 했어."
"예전에도 이 정도 한 거 같은데요."
"아니야. 이건 네 2년 전 데이터야."
테일러는 두 데이터를 비교한 결과를 모니터에 띄웠다.
"이동 거리는 줄었어. 도우 넌 공이 없는 상황에 예전보다 훨씬 훌륭하게 움직였고, 공을 잡았을 때도 아주 이상적인 움직임을 보였어. 이 부분에선 2년 전보다 훨씬 나아졌지."
도라익은 복귀하면서 꽤 많은 부분이 업그레이드됐다.
오프 더 볼 무브가 예전보다 세련되었고, 공을 잡았을 때 움직임도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공을 다루는 기술도 예전보다 합리적이어서 원래라면 체력이 남아야 했다.
"그런데 무의미한 가속이 너무 많아. 특히 수비수를 제친 다음 무의식적으로 가속 한 번은 꼭 하는 거 같아."
도라익은 느린 호흡으로 마음을 진정했다.
"혹시 백태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요?"
테일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의사는 아니라서. 그 심리학 박사는 뭐래?"
"경기에 지장을 줄 정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토마슨은 심리학에 입각해서 도라익이 경기를 뛰는 데 문제없다고 판단했다. 축구 전문가가 아닌 토마슨으로선 도라익이 트라우마 때문에 가속으로 체력을 낭비해 풀타임을 소화하기 어렵다는 문제까지 찾아내기엔 관련 지식이 너무 부족했다.
"알론소한테 자문하는 건 어때? 곧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할 예정이라고 하니 널 진심으로 도울 거야."
#
알론소는 휴가 중이어서 스페인에 있었다. 도라익은 영상 통화로 알론소에게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왜 꼭 풀타임을 뛰어야 하는데?"
도라익의 고민을 들은 알론소가 반문했다.
"풀타임 안 뛰어도 골은 잘만 넣잖아."
도라익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풀타임을 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왔기에 뜻밖의 질문에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우. 부상이 없었더라도 넌 완벽한 선수가 아니야."
단순히 스피드만 보면 도라익보다 빠른 선수가 몇 명 있다. 도라익보다 힘이 센 선수도 꽤 있다. 킥이 도라익보다 정교한 선수도 적지 않고, 슈팅 정확도가 도라익보다 나은 선수도 많다.
몸싸움은 멀리 갈 필요 없이 같은 팀의 줄리엔이 있다. 그런 줄리엔도 가끔 몸싸움에 진다.
순수 드리블 기술만 보면 도라익보다 나은 선수가 꽤 있다. 심지어 일부는 프로 선수가 아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 들어봤을 거야."
알론소는 토마슨과 달랐다. 토마슨은 도라익의 마음을 여는 게 목적이기에 본인보다 도라익이 말하기를 바랐고, 본인 견해를 피력하기보단 도라익의 생각을 듣고 호응하는 방식이었다.
알론소는 도라익에게 자기 축구 철학을 알려주고 도라익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어했기에 본인의 생각을 말하는 데 주력했다.
"경기장에서 넌 한 가지 역할만 해야 해. 공격할 땐 공격만 생각하고 수비할 땐 수비만 생각해야지. 왜 축구를 11명이 팀을 이뤄서 한다고 생각해? 그건 네가 공격만 생각할 때 누군가는 수비를 생각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거야."
도라익은 입을 꾹 다물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너 혹시 팀이랑 다른 선수들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해? 경기도 안 뛰면서 주급을 받아 미안하고, 그간 네가 없어서 팀이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생각해?"
도라익으로선 한 번도 떠올린 적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달리 생각해 봐. 네 덕분에 팀은 강등 위기를 한 번 벗어났고 우승컵도 2개나 들어 올렸어."
"제가 혼자 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 팀이 이렇게 된 것도 네가 혼자 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미안할 필요가 전혀 없어."
토마슨은 도라익을 어루만지면서 조심스럽게 다뤘다. 환자의 마음을 보호하고 치유하는 게 직업이기 때문이다.
알론소는 아니었다. 알론소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처럼 도라익의 성장을 바라며 도라익의 말에 논리적 오류가 보이면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백태클이 두려워서 돌파한 다음 가속하는 습관은 어떻게 고치죠?"
"그걸 왜 고쳐? 부상을 안 하는 좋은 습관이잖아."
"그런데 가속이 너무 많아 체력 소모가 크다잖아요."
"그럼 돌파를 줄여."
도라익은 입을 헤 벌리고 대답을 아꼈다.
"도우. 왜 나한테서 정답을 찾으려고 해? 가능한 답을 최대한 찾아서 너한테 맞는 걸 고르면 되는 일이야. 정답은 없어."
"그래도 좀 더 건설적인 의견을 주시죠."
말하면서도 도라익은 자신이 복리 이자 50%씩 받는 사채업자처럼 양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괜히 고치려 하지 마. 부상 가능성을 줄이는 습관이니까 마냥 부정적인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다른 곳에서 체력 소모를 줄여야지."
"수비를 줄일까요?"
"그것도 방법이지. 대신 다른 선수한테 네 몫의 수비를 대신 해달라고 부탁해야지."
"드리블을 줄이는 건 어때요?"
"패스를 통해 전진할 수 있다면 드리블을 줄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
도라익은 알론소와 대화하면서 많은 걸 느꼈다.
"제가 그간 시야가 너무 좁았군요."
"맞아. 너 예전엔 안 그랬는데."
"예전의 저는 어땠는데요?"
알론소는 잠깐 말을 멈추고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감독이 되고 나서 너는 계속 변화하고 발전했어. 미드필더로 뛰면서 공격과 수비를 모두 책임졌고, 공격수로 뛰어도 수비에서 큰 역할을 해냈어. 그리고 지금과 다른 결정적인 두 가지가 있어."
"그게 뭔데요?"
도라익은 알론소의 말에 더없이 집중했다.
"넌 예전에도 자주 교체되었어. 그때의 넌 교체되어도 별걱정이 없었고. 자신이 풀타임을 뛰어야 한다는 부담감 같은 게 없었어."
도라익은 멍한 얼굴을 하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때의 도우는 생각이 깊었어. 다음 경기를 위해 체력을 비축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고, 팀의 승리를 위해 자신이 휴식해야 함을 당연히 받아들였지. 지금처럼 풀타임을 뛰기 어렵다고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었어."
도라익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렇군요. 저는 원래부터 풀타임을 자주 뛰던 선수가 아니었어요.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요."
"그래. 정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답을 찾은 거 같군. 그리고 지금부터 집중해. 남은 하나가 진짜 중요하거든."
도라익은 어지러운 머리를 비우고 알론소의 말에 집중했다.
"예전의 도우는 경기하는 걸 즐겼어. 경기 중에 자주 웃기도 했고. 지금의 도우는 경기가 즐겁지 않은 거 같아."
골 넣었을 땐 물론 즐겁다. 그러나 경기 자체는 즐겁기만 하지 않았다.
"제가 성장해서, 책임감을 더 느껴서 부담도 더 큰 게 아닐까요?"
"예전의 도우는 무책임했나?"
알론소가 말꼬투리를 잡았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요?"
"자신감이야. 예전의 도우는 한 경기를 망쳐도 다음 경기에서 자신이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어. 그래서 한두 경기의 패배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거든. 도우, 팀이 강등 위기여서 즐기지 못했다는 핑계는 꺼내지도 마. 그게 아닌 거 도우 본인이 가장 잘 알걸?"
말문이 막힌 도라익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 모습에 알론소가 즐겁게 웃었다.
"이젠 팀의 잔류도 결정됐잖아. 그러니까 즐겨. 38라운드 경기를 축제처럼 즐기라고. 할 수 있겠어?"
도라익은 알론소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 영상 통화를 끝냈다.
'그래. 즐기는 거야.'
마음을 다잡은 도라익은 거실로 나갔다. 거기서 엘이 아들에게 숫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엘, 할 말이 있어."
"뭔데?"
중요한 얘기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엘은 고개도 안 들고 말했다.
"다음 경기, 구장에 와줄 수 있어? 우리 무지랑 같이."
순서가 틀린 숫자 모형을 맞는 위치로 옮기던 엘이 굳어버렸다.
"난 세상에서 가족 다음으로 축구가 좋아. 엘이 힘든 건 알지만, 경기장에 와서 내가 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직접 봤으면 좋겠어. 엘이랑 무지도 나랑 같이 축구를 즐겼으면 좋겠어."
"엄마, 엄마."
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자 아들이 손으로 닦아줬다.
"미안해. 나보다 당신이 더 힘들 텐데, 내 생각만 하고 당신 경기를 볼 생각 안 했어. 진짜 미안해."
엘이 점점 더 슬프게 울었다.
"내가 당신을 도와야 했는데, 무서워서 외면했어. 같이 극복했어야 했는데, 당신 혼자 짐을 짊어지게 했어. 진짜 미안해. 나 나쁜 여자야."
"으앙."
엘이 눈물을 멈추지 않자 아들도 울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도라익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