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요저요
2031년 5월 28일.
오전 훈련은 평소보다 20분 빠르게 끝났다.
"다들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클루카스는 다음 시즌 유로파리그 홈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윌슨의 말에 선수들 모두 고개를 돌려 클루카스를 쳐다봤다. 이미 소문이 돌긴 했으나 감독이 직접 말하니 그제야 제대로 실감 났다.
"버틀랜드도 은퇴를 결심했다. 생명이 위험한 부상은 아닌데 충돌 때문에 최근 기억이 꽤 사라졌다고 한다. 또 충돌이 생기면 더 많은 기억이 사라질 것을 걱정해 은퇴하기로 했다. 다들 알다시피 버틀랜드는 딸바보잖아."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알음알음 퍼져서 누구나 아는 사실이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말인데. 3주장은 겨울에 이적 갔고 남은 두 주장도 갑자기 은퇴한다. 팀은 새 주장을 세 명 뽑아야 한다."
"저요저요."
도라익이 손을 번쩍 들었다.
반장 한 번 하는 게 꿈이었는데 애들은 도라익을 뽑아주지 않았다. 반장이 되면 정수기를 설치하겠다는 아이나 생일 때 반 아이들 모두한테 햄버거를 쏜 아이가 반장이 되기 일쑤였다.
새 주장엔 샘 앨런이 가장 적합하긴 한데, 이미 이적 협상을 끝내고 팀 훈련을 빠졌다. 네 수비수는 주장이 될 실력도 안 되고 그럴 생각도 없다. 자기 몫의 수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람들이다.
'다행히 제임스는 잠잠하군.'
윌슨 감독이 가장 걱정했던 제임스는 손을 들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선수들한테 인기가 좋은 제임스가 주장이 되겠다고 나서면 당선될 확률이 높다.
"더 없어?"
수석 코치가 질문했다.
"저는 3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놀랍게도 두 번째로 손을 든 사람은 산체스였다. 남미산 부끄럼쟁이는 골 넣을 때보다 도움을 기록했을 때 더 기뻐하는 괴짜다.
"앞에 나서서 이끄는 건 어려워도 뒤에서 받쳐주는 건 잘할 수 있습니다."
감독과 수석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수가 적다고 열정이 없는 건 아니다. 기부도 많이 하고 봉사도 자주 하는 선수로 심성이 착해 다른 선수를 잘 챙기는 편이다.
"주장이 꼭 주전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어. 그러니까 눈치 보지 말고 과감하게 손들어."
"저도 해보고 싶습니다."
선수들이 환호했다. 감독과 코치들 역시 기쁜 미소를 지었다.
"찰리가 주장을 하겠다는데 왜 다들 기뻐하는 거야?"
아직 16세에 불과한 도라익은 감독과 선수들이 기뻐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연륜이 되고 팀 사정에도 밝은 25세 제임스한테 질문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찰리가 주장 욕심을 낸 건 이적을 포기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아직 3년 계약이 남은 상황에서 재계약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어도 최소 다음 시즌은 팀에 남는다는 뜻이다.
다음 시즌 유로파 리그를 뛸 걸 생각하며 흥분한 만큼 걱정도 컸던 선수들이 기뻐하는 게 당연하다. 시즌 후반기에 도라익이 훨씬 많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긴 했지만, 찰리 아담이 있고 없고에 따라 안정적인 경기를 펼칠 수 있는지가 정해진다.
"그럼 이제부터 민주 투표를 하겠다. 각 주장 후보는 앞에 나와 연설하라."
가장 먼저 손을 든 도라익이 앞에 나갔다.
"제가 주장이 되면 물을 알래스카 생수로 바꾸겠습니다."
폭소가 터졌다. 박수는 점잖은 편이었다. 제임스를 위수로 한 몇몇은 발까지 구르며 야유했다.
"도우. 생수는 협찬이야. 계약이 있어 마음대로 못 바꿔."
수석 코치가 말했다.
"훈련 전에 일찍 와서 세팅을 마치겠습니다."
"도우. 그건 코치와 구장 관리인한테 맡겨."
"라커룸에 탈취제를 비치하겠습니다."
"그건 내가 구단에 얘기하지."
"정기적으로 선수와 스텝들이 모여 회식을 하겠습니다."
제임스가 바닥에 쓰러져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다른 선수들도 참지 않고 마음껏 웃었다.
"우승을 위해 뭐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웃음이 뚝 그쳤다.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종일관 진지했던 도라익이 연설을 이어갔다.
"나를 위해, 동료들을 위해, 스텝들을 위해, 구단을 위해, 팬을 위해. 늘 우승을 향해 목마른 짐승이 샘을 찾듯 간절히 움직이겠습니다."
도라익은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저를 주장으로 뽑아주십시오."
박수가 터졌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제임스 역시 진지한 얼굴로 손뼉을 세게 쳤다.
"훌륭한 연설이었어. 다음은 찰리."
198의 거구가 일어나 앞으로 갔다.
"저는 주장이 되기엔 책임감이 부족합니다."
찰리는 자아 성찰로 선거 연설을 시작했다.
"그래서 주장이 되려고 합니다. 제 팔에 감은 완장으로 부족한 책임감을 채워 팀을 위해 더 큰 공헌을 하겠습니다. 주장이 되어 동료들과 더 친하게 지내고, 더 가까운 가족 같은 사이가 되고 싶습니다."
"주장이 안 되더라도 열심히 하겠지만, 된다면 정말 잘할 겁니다."
선수들이 환한 얼굴로 찰리에게 박수를 보냈다.
"좋은 연설이었어. 다음은 산체스."
정작 앞에 나간 산체스는 우물쭈물하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선수들은 조용히 산체스가 마음의 준비를 마치길 기다렸다.
"여기 팬들은 정말 친절합니다."
산체스가 드디어 입을 뗐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반갑게 인사합니다. 10년 된 이웃처럼 환하게 웃으면서요. 제 아내와 가족들도 여기 생활에 만족합니다. 음식은 집에서 직접 만들면 되니깐요."
웃음이 작게 터졌다.
"스토크시티는 주전 자리를 두고 선수끼리 싸우지 않습니다. 주전 자리가 욕심 나서 경쟁자 험담도 하지 않고요. 연습 경기에서 일부러 험한 태클도 하지 않습니다."
말이 길어지며 산체스는 긴장을 잊었다.
"제 꿈은 가족을 배불리 먹이는 것뿐이었습니다. 유럽으로 와서 높은 주급을 받으며 꿈을 이뤘으나 전 즐겁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중앙 미드필더로 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라리가에선 윙으로 개조되었죠."
가족을 가난한 삶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산체스는 묵묵히 감독 지시에 따랐다. 대부분 남미 선수는 겸비하지 못한 미덕이다.
"그리고 고맙게도 저한테 등 번호 10번을 줬습니다. 갓 이적한 유명하지 않은 이방인한텐 정말 큰 선물이었습니다. 덕분에 팀에 빨리 녹아들 수 있었고 제 역할을 어느 정도 해낸 것 같아 기뻤습니다."
"저는 제 능력을 압니다. 국가대표에도 뽑힌 적 없는 크로스가 조금 훌륭하고 속도가 괜찮은 선수일 뿐입니다. 라리가에선 매 경기가 스트레스였습니다. 그러나 스토크시티에선 매 경기가 즐거웠습니다."
"찰리 덕분에 크로스를 올릴 때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도우 덕분에 패스할 때 힘을 조절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어려움에 부닥칠 땐 늘 제임스가 가까이 있었습니다."
"1주장은 어렵습니다. 저는 3주장이 되어 작은 도움이나마 여러분께 드리고 싶습니다. 예전의 저처럼 적응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친절하게 조언을 건네고, 음식이 입에 안 맞는 사람을 초대해 배불리 먹이겠습니다."
말을 마친 산체스가 빨개진 얼굴로 자리에 돌아갔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지금이라도 주장 자리에 지원할 사람 없어?"
윌슨 감독은 제임스와 눈을 안 마주치게 조심하며 선수들을 쭉 둘러봤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투표하겠다. 3주장은 산체스가 하기로 하고 1주장을 뽑는 투표다. 도우는 D 그리고 찰리는 C를 적으면 된다."
투표는 순식간에 끝났다.
도라익과 찰리의 이름 밑에 카운터로 그은 줄이 번갈아 늘어났다.
"공교롭게도 13대 13이야. 그리고 마지막 표가 남았어."
버틀랜드와 캠벨 그리고 앨런의 이탈로 팀엔 27명만 남았다. 이번 주장 선거는 스텝들 빼고 선수들 의견으로 정하기로 했기에 마지막 표에 1주장이 누군지 결정된다.
"누가 되든 화이팅."
찰리가 큼직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열심히 안 하면 탄핵하기."
도라익이 찰리의 손을 맞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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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년 6월 3일.
"김상현 평론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진행자가 말했다. 김상현은 찌푸려지는 이마를 억지로 폈다.
"버틀랜드와 클루카스는 은퇴. 샘 앨런은 이적이 확정됐어요. 찰리 아담이 재계약했다곤 하지만, 선수 보강이 어려운 상황이죠. 특히 샘 앨런의 왼쪽 윙 자리는 라리가에서도 귀한 취급을 받아요. 그러니 이적이 어느 정도 끝난 8월이 되어야 스토크시티가 다음 유로파리그에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있어요."
페널티킥 논란 때 크게 냈던 목소리가 조롱과 욕설로 메아리 되어 돌아왔다.
덕분에 오히려 일정이 늘었다. 각 프로그램에서 조롱거리 혹은 욕받이로 활약하면서 의도치 않게 김상현의 방송 인생 첫 전성기를 찍고 있다.
녹화를 끝낸 김상현은 인사를 대충하고 부랴부랴 주차장으로 갔다. 그러나 바로 출발하지 않고 운전석을 뒤로 젖힌 채 눈감고 누워 있었다.
녹화 내내 받은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당장 운전하면 차를 어딘가에 들이받을 것 같았다.
띠릭.
전화기에서 울린 소리에 김상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확인하니 톡에 친구추가 요청이 하나 와 있었다.
'누구지?'
김상현은 요청 메시지를 확인했다.
[도라익을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스모킹 건을 갖고 있습니다.]
김상현은 재빨리 요청을 수락했다.
[계약서 원본 사진입니다.]
- 작가의말
반장 선거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주장 선거에 나간 도라익. 이러다 대선에도 출마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도라익을 향해 스멀스멀 다가오는 어둠의 그림자. 그 정체는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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