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기
회복 훈련만 하면서 푹 쉰 스토크시티는 이틀 전 개와 원숭이도 절친으로 보일 만큼 원수 사이인 토트넘과 4:4 난타전을 벌이며 한 명 퇴장 두 명 부상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받은 아스널을 홈에서 맞이했다.
부상과 퇴장으로 생긴 세 자리는 젊은 선수들로 채워졌다.
"도우, 오늘 컨디션이 어때?"
플레이어 에스코트를 맡은 여자애가 질문했다.
"되게 좋아. 날개만 있으면 날아갈 것 같아."
도라익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오른발의 봉인을 풀고 돌파 성공률이 급격히 올랐지만, 왼발로 쭉 드리블하다가 오른발로 바꿔서 하는 건 괜찮아도 왼발과 오른발을 동시에 쓰는 건 어색했다.
다행히 고된 훈련을 통해 균형을 잡은 덕분에 이젠 왼발과 오른발을 함께 쓰는 게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오늘 골 넣을 거지?"
그때 도라익의 대답을 방해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찰리. 너 팀에서 쫓겨난 거 다행으로 알아. 아스널에 남았으면 지금도 리저브 팀에 있으면서 출전 못 했을걸?"
젊은 아스널 선수가 찰리에게 시비를 걸었다.
"어이, 애들 보는 곳에서 좀 자중하지?"
도라익이 바로 쏘아붙였다. 확실히 이런 기 싸움은 대부분이 10세 이하인 에스코트를 맡은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좋은 장면이 아니다.
그런데 아스널 주장은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며 젊은 선수를 제지하지 않았다.
"없는 얘기 지어낸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찰리."
"벤치에 뿌리를 내린 너처럼 말이지? 그래도 대단한 아스널에서 한 시즌에 한두 경기라도 출전하는 게 어디야. 나처럼 주급을 10만 파운드 이상 받고 부상만 아니면 모든 경기에 선발 출전해도 아스널에서 한 시즌에 한 경기 출전하는 것보단 못하지."
찰리가 상대의 도발에 역도발을 시전했다.
"너도나도 어려서부터 아스널 팬이었잖아. 난 아스널 선수로 남아 꿈을 이룬 거고 넌 아니야. 맞다. 팀에서 방출되고 맨날 울면서 밤잠을 못 잤다고 들었는데, 요즘은 어때? 좋은 수면제 아는 거 있는데, 알려줄까?"
도라익이 아닌 클루카스였으면 아스널 선수가 계속 도발하지 못했을 거다. 젊은 선수가 객기로 계속 도발하려고 해도 아스널 주장이 막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도라익은 나이만 보면 에스코트하는 아이들과 같이 뛰놀아도 어색하지 않은 어린 주장이어서 아주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에스코트하는 아이와 장난을 치던 루이스가 얼굴을 굳히고 끼어들었다.
"루이스, 참아. 지지난 시즌 리그컵 결승에서 진 게 한이 맺혔나 봐. 이렇게 입으로라도 풀게 놔둬."
평소 알던 그 순박한 찰리가 맞는지, 혀끝에서 아주 가시가 무더기로 발사되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심판을 따라 그라운드에 들어가서도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자. 오늘 반드시 이긴다. 다 같이 외치자. 가슴은 뜨겁게, 그러나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그러나 머리는 차갑게!"
평소보다 크게 외친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아주 빠르게 경기에 몰입했다. 반대로 선발진이 세 명이나 바뀐 아스널은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유창한 패스를 보여주지 못했다.
-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이미 컨디션이 올라온 반면, 아스널은 아직 몸이 덜 달궈진 것 같습니다.
- 아스널이 예전과 비교해 몸싸움이 강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스토크시티에 비빌 바는 아니죠. 그걸 알기에 스토크시티가 경기 시작부터 강한 몸싸움을 걸어 우위를 확실히 차지한 겁니다.
영문을 모르는 두 해설은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전략적으로 몸싸움을 벌이는 거로 오해했다.
"둘 다 잘 들어. 선수들 자제하지 않으면 오늘 경기 카드 많이 나올 거야."
베테랑 심판은 반칙으로 프리킥을 선언한 후 도라익과 아스널 주장을 불러 경고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지?'
고민할 시간이 부족했던 도라익은 물 마시러 가는 척하면서 알론소에게 물었다. 찰리가 돌아가 프리킥 수비에 참여하고 도라익은 중앙선 근처에 남아서 반격에 대비하는 역할이기에 감독한테 접근하기 쉬웠다.
"아까 대기 통로에서 아스널 선수가 찰리를 도발했고, 그래서 시작부터 몸싸움이 격렬합니다. 심판이 방금 몸싸움을 자제하라고 경고했는데, 선수들한테 뭐라고 전달할까요?"
"옐로카드 하나 나올 때까지 이대로 진행해. 저쪽이 선제 도발했는데 우리가 먼저 그만두면 저쪽 사기만 올라."
도라익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토미한테 그대로 전달했다. 산체스와 찰리에겐 도라익이 직접 전달하면 되고, 토미는 루이스와 레체르트에게 전달한다. 그러면 레체르트가 알아서 수비진 선수들에게 전부 전달할 것이다.
그리고 아스널도 같은 생각인지 몸을 사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틀 전 토트넘과 벌인 경기로 그간 억눌렀던 야성이 폭발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상대를 다치게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동작은 줄였기에 심판은 경고만 남발할 뿐 카드를 꺼내진 않았다.
- 스토크시티 반격 기회입니다.
- 드물게 찰리 아담 선수가 드리블합니다.
공을 잡은 찰리는 평소처럼 도라익이나 미드필더들에게 패스하지 않고 드리블했다. 레드카드로 퇴장한 센터백 대신 출전한 아스널 선수가 계속 달라붙었으나, 피지컬 차이가 너무 심해 꽤 느린 찰리의 드리블에도 불구하고 공을 건드리지조차 못했다.
- 스루패스!
어정쩡하게 드리블하던 찰리가 공을 투박하게 앞으로 질렀다. 엉거주춤한 패스 동작과 달리, 공이 아주 부드럽게 잔디 위를 미끌었다.
그리고 어느새 달려온 도라익이 공을 잡았다.
도라익의 상체가 골대 방향으로 휙 움직였다. 페이크에 속은 아스널 수비수는 중심이 골대 쪽으로 쏠렸다.
상체 페이크만으로 수비수를 떨친 도라익은 오른발로 공을 몸 뒤로 끌어온 다음 왼쪽으로 짧게 보냈다.
방해를 안 받고도 왼발로 슈팅하기 딱 좋은 위치다.
페이크에 속아 슈팅 각도를 내준 수비수가 황급히 몸을 날렸다. 몸을 날려봤자 슈팅 경로를 다 막을 순 없지만, 심리적 압박을 줄 순 있다.
그러나 대기 통로에서 상대가 도발한 것 때문에 도라익의 집중력은 전에 없이 높았다. 슈팅 페이크를 주지도 않았는데 상대가 알아서 몸을 던지자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왼발로 공을 오른쪽으로 보냈다.
수비수보다 침착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아스널 키퍼가 앞으로 달려 나오며 슈팅 각을 좁혔다. 도라익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침착하게 오른발로 공을 툭 치며 오른쪽으로 드리블했다.
키퍼는 황급히 멈춰 공을 따라 움직였다. 현재 도라익은 가까운 포스트와 먼 포스트는 물론, 키퍼 가랑이도 노릴 수 있다.
그러나 도라익은 예상을 뒤엎은 선택을 보였다. 소위 레인보우 킥이라고 부르는, 상대에게 주는 모멸감이 너무 심해 선수들이 알아서 자제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왼발을 공 앞에 보낸 다음 오른발을 뒤에 둬서 집게처럼 공을 끼운다. 그 상태에서 점프하며 전갈이 꼬리의 독침을 쏘듯 공을 자신과 상대 머리 위를 지나게 하는 방식으로, 보통은 상대 선수를 돌파하는 데 쓰는 기술이다.
도라익은 이 기술을 슈팅용으로 사용했다. 그냥 차서는 나올 수 없는 높고 짧은 포물선을 그린 공은 아주 아름답게 아스널 골대 안에 안착했다.
골대 안에서 통통 튀는 공은 마치 아스널 선수들을 향해 메롱 하는 것 같았다.
- 원더골!
- 살상력은 1점, 그러나 모멸감은 10점입니다.
- 아스널 선수들 멘탈 터지겠는데요.
통로에서 일었던 소동을 모르는 두 해설은 그저 즐겁기만 했다.
- 아스널이 어떤 실책을 범했다고 봅니까?
- 찰리가 공을 잡았을 때 혹은 드리블할 때 반칙으로 시간을 벌었어야죠. 공을 잡은 게 늘 백패스만 하는 찰리 선수라고 방심했습니다. 특히 늘 페널티 박스 안에서 공을 기다리던 찰리 선수를 수비하려고 센터백 한 명이 밖으로 나간 게 큰 틈이 되었습니다.
- 수비 상황이 평소와 같지 않은 거군요. 이런 상황에선 선수의 개인 능력이 중요하죠.
- 맞습니다. 도라익을 응원하는 입장에선 여전히 부족함이 보입니다만, 그건 호랑이한테 왜 날개가 없는지 한탄하는 그런 아쉬움이죠. 도라익은 스토크시티에서 이번 시즌도 주장 완장을 맡길 정도로 인정을 받는 그런 훌륭한 선수입니다.
도움을 기록한 찰리와 골을 넣은 도라익이 어깨동무를 하고 스토크시티 열성 팬이 있는 관람석으로 갔다. 사전에 얘기된 바가 전혀 없지만, 둘은 거의 동시에 가슴 왼쪽의 구단 앰블럼에 진하게 키스했다.
리그컵 우승에 이어 유로파리그 우승, 거기에 평생 못 보겠지 하던 챔피언스리그 홈 경기 직관까지. 행복에 치사량 이상으로 겨운 스토크시티 팬들이 격동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와 환호 그리고 욕설로 두 사람을 응원했다.
반대로 아스널의 분위기는 침침하게 가라앉았다.
이틀 전 홈에서 리그 20위인 토트넘과 4:4로 비긴 탓에 워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특히 토트넘과 비긴 바람에 리그 3위에서 4위로 추락해 한바탕 놀림감이 되었다.
침체한 분위기를 살리고자 젊은 선수가 찰리 아담을 억지로 도발했다. 사실 국가대표 주전을 경쟁하고 같은 프리미어리그 팀인 스토크시티의 주전이자 부주장이며 주급 12만 파운드를 받는 찰리한테 아직 벤치인 선수가 도발할 자격이나 있는지 의문이지만, 아스널에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몸싸움이 빈번하게 들어와 도발이 성공했나 싶은 찰나에, 거대한 역도발이 들어왔다.
마치 나는 그냥 400톤급 미사일 하나 쐈는데 상대가 핵탄두로 돌려준 느낌이었다.
만약 도라익이 레인보우 킥으로 돌파했다면 오히려 시비를 걸어서 분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도라익의 레인보우 킥은 슈팅이었고, 그마저 골이 되었다. 룰북에 명확히 하지 말아야 할 행동으로 적힌 것도 아니고, 골은 반칙만 아니면 모든 게 용서받는 법이다.
- 아스널 선수들 멘탈 터졌습니다. 본인들의 장점인 패스보단 단점인 몸싸움에 더 집착합니다.
- 반대로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확연히 살아났습니다. 패스 경로가 많으니 드리블이 더 과감해지고, 그러다 보니 아스널의 진형이 점점 엉망이 되고 있습니다.
스토크시티를 흔들려던 아스널이 역으로 흔들렸다.
- 작가의말
도발은 말이 아닌 골로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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