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호
형. 나 아파.
의자에 쪼그리고 선잠을 자던 최경호가 퍼뜩 깼다.
"라익아."
꿈이었는지 환청이었는지, 라익이는 똑같은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난시라도 온 것처럼 사물이 겹쳐 보였다. 최경호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꽉 잡아 힘껏 당겼다.
아프지 않았다.
"라익아. 형이 미안해. 다 내 탓이야."
도라익이 병원에 간다고 전화할 당시, 최경호는 오연화와 만나고 있었다. 너무 즐거운 만남이어서 택시 타겠다는 도라익을 말리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최경호의 성격상 어떻게든 직접 운전한다고 우겨서 도라익을 기다리게 했을 거고, 그랬다면 졸음 운전하는 트럭이 사고를 낸 다음에야 출발했을 거고, 그랬다면 라익이가 사흘이나 잠에서 안 깨는 일은 절대 없었다.
띠링.
전화기에 문자가 도착했다. 최경호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다음 문자를 확인했다.
계약 협상을 중단한다는 내용을 격식을 차려서 담은 나쁜 문자였다. 최경호는 노트를 꺼내 해당 업체의 정보를 적은 페이지에 해골을 하나 그렸다.
'하나 남았네.'
협상을 중단하지 않은 업체는 단 하나. 엘이 전속 모델로 있는 패션 브랜드였다. 도라익의 첫 광고주이기도 한 이 업체는 의리 때문에 아직 협상 중단을 통보하지 않았다.
띠링.
올 것이 드디어 왔구나.
최경호는 눈가로 삐져나오는 눈물을 쓱 닦고 담담하게 문자를 확인했다.
[최경호 씨, 방송 일정이 변경되어 기존 출연 제의를 취소합니다. 새로운 일정이 정해지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낯선 번호로 온 문자였다. 최경호는 단축 번호를 눌러 오연화한테 전화했다.
고작 두 번의 만남이지만, 최경호는 자신들 사이에 뭔가 오갔다고 느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종료 버튼을 누른 최경호는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확실한 거절을 듣기 전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애써 자신을 달랬을 거다.
그러나 최근 사흘 동안 매너를 갖춰 사람 가슴에 비수를 꽂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지 확인했기에 현재 상황이 무얼 말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미스터 최. 의사 선생님이 동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경호는 의연한 표정으로 간호사한테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곧 건장한 체격의 경비 두 명이 TV를 도라익의 병실로 옮겼다.
최경호는 TV를 켜 병원 WIFI에 연결한 다음, 인터넷 방송사 앱을 다운로드해 실행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고 핸드폰에 온 인증 문자까지 입력하니 수십 개 채널이 떴다. 최경호는 한국과 콩고의 경기를 중계하는 채널을 선택했다.
전반전 15분이고 점수는 0:0이었다. 한국 입장에선 비기기만 해도 무조건 16강에 진출하는 상황이기에 나쁜 일은 아니다.
"라익아, 어서 일어나."
#
0:0으로 비긴 한국팀은 조 2위로 16강 진출을 이뤄냈다.
"라익아. 너 약속 지켰다. 한국팀 16강 진출했어."
라익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최경호는 휴지를 코에 대고 힝 하고 힘껏 콧바람을 불었다.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답답한 건 코가 막혀서가 아니었다.
최경호는 멀쩡한 휴지를 구겨서 휴지통에 버렸다.
경비들이 들어와서 TV를 가져갔다. 최경호는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할까 말까?'
최경호의 망설임이 길어졌다. 자신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유치한 건지 분명히 알지만, 왠지 꼭 하고 싶었다.
충동이 이성을 이겼다. 최경호는 통화 목록에서 번호 하나 찾은 다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우, 미스터 최. 회의 끝나고 통화해도 괜찮을까요?"
도라익의 이적 협상 책임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호텔 회의실에서 2시간 기다렸습니다."
최경호는 본인조차 놀랄 만큼 평온한 말투로 상대에게 추궁했다.
"미안합니다. 사고 때문에 정신없어서 안 나올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셨군요. 잘 알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최경호는 전화 연결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시발.'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함에 울분까지 쌓여 더 미칠 것 같았다.
최경호는 또 누구한테 전화할지 고민했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최경호는 번호를 확인하지 않고 바로 받았다.
- 최경호 씨 맞습니까?
"누군데요?"
- 한국 최고의 로펌 킹콩입니다.
"그래서요?"
최경호의 삐딱함에도 상대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 두 가지 사안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우선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을 대한민국 축구협회에 묻는 소송을 저희 로펌에서 변호해도 되는지 여쭈려고 합니다.
"소송이요?"
- 그럼요. 도라익 선수는 대한민국 축구협회를 위해 일하는 중에 사고당했습니다. 이는 산업재해에 해당하고, 고용주인 대한민국 축구협회에서 마땅히 도라익 선수의 손해를 책임져야 합니다.
"선례가 있습니까?"
- 우리가 만들어야죠. 도라익 선수라면 승소할 확률이 높습니다. 승소하지 못하더라도 큰 의미가 있는 소송이 될 겁니다. 변호는 전적으로 로펌에서 알아서 할 거고, 최경호 씨는 그저 위임장에 사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아, 잊고 말 안 했는데 승소 여부와 무관하게 이번 변호는 전부 무료입니다.
"두 번째 일은 뭐죠?"
- 하나는 계약해지에 관련한 안건입니다. 계약 만료까지 2년 남았는데 도라익 선수의 이번 부상이 해지 조건을 충족합니다. 의뢰 측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해도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린 소정의 금액을 드리고 쌍방의 우호적인 협의로 계약을 해지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그 회사의 이미지 가격이 얼마나 되죠?"
- 자세한 건 만나서 말씀드리죠. 이 두 사안 모두 동의하시면 바로 사람 보내겠습니다.
최경호는 잠깐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둘 다 로펌 생각이죠? 그 회사는 그저 계약을 해지하기만 하면 되는 거죠?"
- 하하. 최경호 씨. 저희는 지금 의뢰 측을 설득해 소정의 금액을 쟁취하는 중입니다. 무료 변호 역시 계약해지 대가의 일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대한민국 최고를 자부하는 만큼 무료라고 변호를 대충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무조건 이기는 쪽으로 최선을 다할 겁니다.
"거절합니다."
- 현재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도라익 선수를 위하는 길이 어느 건지 고민하시고 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24시간 언제든 대기하고 있을 테니 마음을 확실히 정하시고 전화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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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준과 천솔 그리고 엘이 와서 일주일 있고 돌아갔다. 셋이 돌아간 후 도봉구 씨와 최연희 씨가 와서 한 달 있고 돌아갔다.
방학이 되자 도라익의 동생들이 와서 사흘 있고 돌아갔다.
최경호는 도라익의 가족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오빠. 급해 말고 천천히 깨도 돼. 우린 잘 지내고 있으니까 빨리 깨려고 애쓰지 마. 푹 자."
이미 떠난 도라희의 말이 최경호의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최경호는 도라익이 어서 일어나길 바랐다.
이미 세 차례 수술을 마쳐 부러진 뼈를 접합했고 뼛조각과 염증이 도진 근육 조직도 긁어냈다.
격렬한 운동은 무리여도 일상생활엔 아무 지장이 없다는 의사의 호언장담도 있었다.
깨기만 하면 도라익은 정상인이 된다. 비록 선수 생활은 더 잇지 못해도 멀쩡하게 웃고 걷고 말할 수 있다.
최경호는 그간 도라익이 어서 깨서 자신의 고통을 덜어주길 바랐다.
도라익의 가족은 아니었다. 이들은 도라익이 언젠간 멀쩡하게 깰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너무 빨리 깨서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지 않길 바랐다.
'난 정말 멍청하고 이기적이고 나쁜 새끼야.'
덕분에 최경호의 마음도 조금 편해졌다. 그간 자신이 잘못한 일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아프지만, 생각이 정리된 덕분에 전처럼 조급하지 않았다.
"라익아. 좀 더 쉬어도 돼. 너 그간 너무 고생했어."
말을 마치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이 흐를수록 숨통이 조금씩 트였다. 눈물이 흐를수록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씩 풀렸다.
따르릉.
오랜만에 최경호의 전화기가 울렸다. 도라익의 가족은 보통 도라익의 번호로 전화하기에 최경호의 전화는 그간 반 파업 상태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목이 잠겨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았다.
- 안녕하세요. 드림즈 단장 백승수입니다.
최경호는 눈을 몇 번이나 껌벅이고서야 드림즈가 도라익의 아버지 도민준이 2군 감독으로 있는 야구팀임을 떠올렸다.
"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 다름이 아니라 도라익 선수와 계약하려고 합니다.
성격이 급한지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계약이요? 야구팀이 축구 선수랑 무슨 계약을 한단 말씀입니까?"
- 도라익 선수가 깨면 팀의 마무리 투수로 계약할 생각입니다.
"네?"
- 병원에 의뢰해서 도라익 선수의 부상을 분석했습니다. 골반이 멀쩡하고 왼 다리와 오른팔 모두 잘 치료하면 야구를 하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왼팔과 오른 다리의 부상으로 몸의 균형이 틀어져서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은 어렵지만, 야구는 원래 균형적인 운동이 아닙니다.
"저, 알아듣게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 오른손으로 공을 던진다는 전제하에 도라익 선수는 마무리 투수가 되는 데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오른팔과 왼다리의 부상이 상대적으로 경미하거든요. 근육 손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라익이를 야구 선수로 계약하고 싶다는 말입니까?"
- 신고 선수로 계약해서 훈련하다가 1군에 합류한 다음 정식 선수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메이저리그는 무리지만, 한국 리그에서 마무리로 활약하는 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150은 몰라도 140대 후반은 전혀 문제없다는 저희 판단입니다.
"건의 감사합니다. 라익이가 깨면 상의해서 말씀드릴게요."
- 혹시 다른 야구단이 연락을 드릴지도 모릅니다. 병원 측에 비밀 보장을 요구했지만, 그리 믿음이 안 가거든요. 다른 구단이 어떤 조건을 제시하든 우리도 무조건 맞춰드릴 테니까 꼭 드림즈와 계약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친 최경호는 바로 뮐러한테 전화했다.
"뮐러. 혹시 아는 의사 있어? 라익이가 깬 후 계속 축구 할 수 있는지 분석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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