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시간
2031년 6월의 어느 하루.
도라익 공식 팬카페 '스또라이커'의 다섯 운영자가 커피숍에 모였다.
"어제도 176명 탈퇴했습니다. 탈퇴 회원 다 합쳐서 983명입니다."
다섯 카페가 합치고 소규모 카페나 커뮤니티에서만 서식하던 도라익 팬들도 끌어왔다. 도라익의 사인 유니폼을 경품으로 내건 덕분이었다. 순식간에 3만 명 가까이 달성했는데 계약서 유출과 함께 매일 백 명 이상 빠져나갔다.
"차라리 잘됐어요. 축구 선수가 축구 잘하면 되지. 뭘 그리 많이 따진답니까."
'D자이너D'가 말했다. 까칠하던 첫인상과 달리 다섯 중 붙임성이 가장 좋았다. 초면부터 편하게 말해서 막말로 느껴졌지만, 친해지고 보니 심성이 고왔다.
"카페에도 매일 글이 올라와요. 인터넷에 떠도는 계약서가 진짠지, 도라익 선수가 정말 돈 때문에 해트트릭 기회를 포기했는지."
김선희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요즘은 남돌 덕질을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체계적으로 하기에 중학생이 되면 조금씩 시들해지는 면이 있다. 그런 10대들한테 도라익은 신선한 충격이고 자극이었다.
덕분에 회원 모집이 쉬웠는데, 예민한 10대들답게 논란이 일자 손절도 빨랐다.
"선희야. 아직 소식 없어?"
"오빠가 전화기 끄고 훈련만 한대요. 일반인은 일주일에 2번 하는 훈련을 매일 2번 해서 통화할 시간도 없대요. 라연이도 그냥 에이전트하고 가끔 통화해요."
"공식 입장을 펼쳐야 하는데."
도라익을 지지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인터넷의 추측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며 지지하는 것과 부정하며 지지하는 건 매우 다르다. 괜히 계약서를 부정하다가 역풍이 불면 아직 단단하지 못한 팬클럽이 박살 날지도 모른다.
"오태범 님 채널에 오빠 훈련 영상이 올라왔어요."
알람을 확인한 김선희가 외쳤다. '카페사장'이 TV를 켠 후 태블릿에 연결했다. 곧 TV에 도라익의 훈련 영상이 재생됐다.
"영화에서 나오는 격투 장면처럼 되게 격렬한 운동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근육 운동은 느릴수록 힘듭니다. 차라리 격렬하게 움직이는 게 근육이 덜 피로하죠."
10분 정도로 편집된 영상은 도라익의 하루를 압축했다.
일어나 한 시간 정도 달린 후 밥 먹고 잔다. 일어나서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고강도 훈련을 마친 후 점심을 먹고 또 잔다. 3시쯤에 일어나 전술을 분석하는 비디오를 관람하다가 저녁을 먹은 후 또 강도 높은 훈련을 한다.
푸르고 검은 이상한 색의 즙을 가득 먹은 후 스트레칭하다가 잠들면 도라익의 일과가 끝났다.
"300만 파운드 줘도 저렇게 못 할 사람들이 입만 살아선."
'방랑자'가 말했다.
그에 가장 연장자인 '부회장'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타고난 재능만으로도 부자 되는 게 걱정 없는 사람인데 저렇게 노력하는 걸 보면 동생이지만 존경스럽다."
"조카인데요."
김선희가 태클을 걸었다.
"오빠는 서른 넘으면 삼촌이라고 그랬어요."
"나 만으로 스물아홉이야. 진짜야."
민증을 까네 마네 하며 한참 실랑이질하던 다섯 운영자는 웃음을 거두고 다시 시름에 빠졌다.
"선희는 계속 라연이하고 만나면서 새 정보가 없는지 탐문하고. 부회장 아저씬 방랑자님을 도와 여론을 만드세요. 계약서가 진짜인지 공식 발표 나오길 기다리고, 계약서가 진짜라고 해도 도라익 선수가 경기로 흥분한 상태에서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겠냐는 식으로 유도하세요."
"난요?"
D자이너D가 물었다.
"디자인을 좀 더 전투적으로 바꿔주세요. 우리가 핍박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요."
유의미한 결론은 없었다.
사실관계를 확인할 길이 없기에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계약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확실히 검증하기 전엔 잠자코 있어야 한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요. 이번 논란을 계기로 우린 더 강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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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스페인에 놀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응. 다녀왔어."
"벌써?"
도라익은 찰리한테 시원한 과일즙을 권했다.
"너 설마 스페인이 어딨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 스페인에 거주하며 런던으로 비행기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있어."
"알아. 스페인은 프랑스 바로 곁이잖아."
어떻게 봐도 당황한 표정에서 찰리는 도라익이 지금껏 스페인을 아주 먼 국가로 알고 있었음을 짐작했다. 물론, 한국에 살던 도라익한테 스페인은 먼 국가가 맞는다.
"그럼 영국이랑 프랑스가 자동차로 오갈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겠네?"
"진짜? 영국은 섬 아니었어?"
그나마 도라익은 영국이 섬이라는 상식은 있었다.
"근데 갑자기 왜 찾아왔어?"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 진짜야?"
"어떤 소문인데?"
찰리는 도라익이 아무것도 모르는 듯 보이자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은 19살 때 아스널이 재계약을 거부한 일이 큰 상처로 남았다. 스토크시티에서 성공하고 국가대표 주전 경쟁을 하는 선수가 되었지만, 여전히 열등감 비슷한 게 있다.
그런데 도라익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에도 무관심하며 자신을 단련하는 데만 몰두한다. 성격은 타고나는 거여서 그저 부러웠다.
"네가 보너스 때문에 페널티킥 양보했다고 하더라."
"응? 그건 아닌데."
찰리는 속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덩치와 다르게 소심한 찰리는 인터넷으로 접한 소문이 시종 마음에 걸려서 스페인에서 휴가도 편하게 즐기지 못했다.
"볼튼이랑 한 경기에선 10골 넣어 보너스 타려고 페널티킥 달라고 했지. 그날은 머리가 아주 맑았거든. 근데 맨유랑 경기할 땐 그런 생각을 할 정신이 없었어. 넌 나보다 맨유 더 많이 상대해봤으니 알 거 아니야. 아버지 성이 뭔지도 잘 생각나지 않던데."
찰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영문을 몰랐지만, 도라익도 그저 따라 웃었다.
"근데 왜 대응 안 해?"
"에이전트가 알아서 하겠지."
"이미지 깎이면 광고료 손해 보는 거 몰라?"
"다음 시즌 끝날 때까진 광고 다 거절하기로 했어. 내가 어릴 때부터 아빠가 돈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다고 했거든. 집이 가난했던 난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어. 근데 지금은 조금 알 거 같아."
찰리는 도라익의 단단한 얼굴을 감동한 눈으로 바라봤다.
"도우. 우리 또 우승할 수 있을까?"
리그컵 4강전에서 포츠머스 센터백이 팔을 들어 도라익의 발목을 걸지 않았다면. 도라익이 아픔을 참고 일어서서 공을 쫓지 않았다면. 키퍼가 골 하나 먹고 말지 하며 굳이 팔을 내밀어 공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면.
두 번째 파울이 키퍼 팔에 걸려 넘어진 건지 뇌진탕으로 그냥 쓰러진 건지 도라익도 모른다. 센터백에게 파울 당한 것까지 떠올린 게 도라익한텐 최선이었다.
"해보면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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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
"운동 좀 쉬어. 몸이 한계야."
의사의 말에 도라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4일 운동하고 하루 쉬는 일정을 끝낼 시간이 왔다.
"스트레칭 위주로 하고. 달리기도 느리게 뛰고. 그리고 몸무게 준 건 알지?"
"스트렝스 운동 위주로 하다 보니 근육이 줄었어요."
축구 선수가 근육을 키우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근육을 키워 부상을 방지하는 것이고 하나는 힘을 키워 몸싸움을 이기려는 것이다.
"이젠 성장도 멈춘 것 같으니까 부상 방지로 근육 키워."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싶었던 도라익은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그럼 지금이 제 피지컬 한계에요?"
"아니. 뼈 밀도의 변화 그리고 근섬유의 변화로 근력이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체력 회복도 빨라질 거고. 게다가 경험이 쌓이면 똑같이 뛰어도 체력이 덜 소모될 거야. 몸이 아주 효율적으로 움직일 테니."
"슈팅 말고 리프팅 훈련은 괜찮죠?"
"짧게 해. 막 반 시간씩 하고 그러면 꽤 피로가 쌓일 거야."
혈액과 소변 검사 결과는 문자로 받기로 하고 도라익은 병원을 나왔다. 사인을 원하는 시민들 요구를 들어주며 조금 기다리니 최경호가 도착해 도라익을 태웠다.
"라익아. 재계약 성공했어. 출전 보장은 당연히 있고, 7월부터 네 주급은 8천 파운드야."
프리미어리그는 연봉 협상 규정이 있다.
도라익이 첫 계약으로 받은 주급이 2천 파운드다. 18세 이하 선수이기에 시즌이 바뀌어 재계약하더라도 4배 이상으로 인상할 수 없다.
그리고 규정상 18세 이전엔 계약 기간 3년 고정에 최고 주급이 5만 파운드를 넘지 못한다.
돈 많은 구단이 어린 선수를 데려다가 망치는 걸 막기 위한 조치 중 하나다.
찰리 아담은 아스널과 16세에 계약하고 3년이 지난 19세에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7세와 18세에 재계약을 하지 않은 걸 보면 아스널 스텝들은 찰리 아담의 능력을 잘못 평가했던 듯하다.
"다른 건?"
"계약금은 40만 파운드. 각 수당도 4배로 뛰었어. 특별 수당은 그대로고. 대신 20골이랑 20도움 그리고 30골이랑 30도움 달성을 계약 조항으로 넣었다."
"형. 30도움이 상식적으로 말이 돼?"
"야. 네 11골 10도움은 말이 되는 줄 알아? 그리고 유로파리그 수당은 제한이 없어서 골 10만 파운드 도움 10만 파운드야. 골든 슈즈는 리그 150만 파운드, 유로파리그 200만 파운드. 그리고 유니폼 판매 수익도 너한테 일부 갈 거야."
"형. 나 당분간 쉬어야 하는데 우리 스페인 놀러 갈까? 비행기 타면 가깝대."
"아니. 나 이제부터 바쁠 거야."
"왜? 재계약도 끝났는데."
"반격의 시간이거든. 시발 다 뒈졌어."
- 작가의말
도라익 : 에이전트가 알아서 하겠지.
최경호 : 그럼. 믿고 나한테 맡겨.도라익 : 뭐 계획 있어?최경호 : 그럼. 내가 다 터뜨릴꼬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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