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단
2031년 1월 16일.
도라익의 입단식이 치러졌다.
"팬들이 제대로 뿔이 났어."
기자들이 채 50명도 안 되는 팬을 보며 혀를 찼다. 개인 유튜버나 지역 신문 그리고 급히 달려온 한국 언론사 덕분에 기자단의 숫자는 백 명에 육박해 도라익의 입단을 축하하러 온 팬들이 더욱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1월 14일에 진행한 리그 23라운드에서 풀럼하고 1:1 무승부 경기를 펼쳤다. 최근 상승세인 풀럼과 비긴 건 칭찬할 일이지만, 여전히 강등권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다행히 찰턴과 왓포드는 패배하여 점수가 그대로이고, 16위인 위건이 지는 바람에 점수 차이는 4점으로 줄었다. 17위였던 셰필드 역시 비기면서 5점 차이를 유지했다.
"쏜의 나라에서 온 선수라는데?"
"국가대표래."
"아시안컵 MVP에 골든 슈즈."
"골 장면 봤는데 진짜 잘해."
'프리미어리그에는 라이트 팬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축구에 열광하는 정도가 심할 뿐, 모든 팬이 축구 지식이 풍부한 건 아니다.
전문가 뺨치는 탑골급 팬이 많아 다른 리그보다 전문성이 강해 보이는 것이지 모든 팬이 이성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하진 않는다.
현장에 응원하러 온 몇몇 팬은 편집된 하이라이트만 보고 도라익에 대한 기대가 넘쳤다.
그러나 경기 영상을 풀로 본 팬들은 달랐다. 팀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왔지만, 도라익에겐 별로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아시안컵에서 5골을 넣는 건 프리미어리그 공격수라도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프리미어리그에 적응하는 건 세계적인 선수도 실패했던 일이다.
기대할 만한 건 16세의 어린 나이, 그리고 경기 중 보여준 어마어마한 가속 능력과 준수한 몸싸움 기술이었다. 제대로 성장하면 3년 혹은 5년 뒤에 팀을 이끌 재목이 될지도 모르는 포텐셜 덩어리다.
'팀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다.'
객관적으로 리그 경기가 고작 15라운드 남은 상황에 4점의 차이는 크다. 특히 주전 공격수가 부상인 상황에서 4점 차이를 좁히는 건 정말 어렵다. 경쟁팀이 실책을 저지르더라도 팀이 승리하지 못하면 기껏해야 1점 따라잡는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도 도라익을 즉시 전력감으로 영입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도라익이 빨간 줄과 하얀 줄이 엇갈린 유니폼을 윌슨 감독 손에서 받았다. 유니폼을 함께 잡고 사진을 찍은 후, 바로 겉에 걸쳤다.
구단 직원이 공 하나 던져줬다. 공을 받은 도라익은 미리 귀띔받은 대로 리프팅을 했다.
발등, 발꿈치, 넓적다리, 어깨에 이어 머리로 공을 안정적으로 다뤘다. 그리고 공을 높이 찬 다음 발등으로 트래핑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피지컬이나 기술은 프로 수준이야."
"전술 이해가 문젠데. 유스 출신이 아니래."
전문가급 팬끼리 모여서 대화했다.
"골 넣는 거 빼곤 프로다운 모습을 보인 적 몇 번 없었지."
"그래도 두 번째 경기에서 움직임이 훨씬 나아졌으니 기대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거 감독이랑 동료 선수 지시에 따른 거래. 뉴스 떴어."
"답답한 놈들."
나이가 지긋한 팬이 어눌하게 말했다. 경기가 있건 없건 구장 안에선 흡연이 금지다. 골초인 노인은 담배 대신 사탕을 쉴 새 없이 빨았다. 사탕을 먹느라 노인의 발음은 가까운 사람 아니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뭉개졌다.
"토미 영감. 뭐 좋은 소스 있으면 공유해."
팬을 등급으로 나눈다면 토미 영감은 다이아몬드다. 나이에 비례하는 경험과 혜안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구단 직원들과 친해 좋은 정보를 많이 얻어낸다.
"팀이 리빌딩한다는 신호야. 보면 몰라?"
"리빌딩하기엔 자금 사정이 너무 열악한데?"
삼 년 전부터 짓기 시작한 새 구장은 내년에 완성된다. 그때까지는 계속 돈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18세 미만 선수여서 3년 계약밖에 못 했어. 대신 강등 시 계약 해지 조항은 없다고 하더군."
"너무 억지 아니야? 강등 상황과 상관없이 그런 조항이 없으면 좋은 거지."
"그리고 출전 보장 조항도 있다고 하더군.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저 선수는 이제부터 우리 팀 주전이야."
그제야 노인의 말에 반대하던 자들도 흔들렸다. 아시안컵 골든 슈즈나 MVP 타이틀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먹히지 않는다. 다른 리그를 씹어먹던 선수도 프리미어리그만 오면 설사하는 일이 흔하다.
제대로 된 검증을 받지 못한 선수가 팀 주전을 뛸 거라는 말에 모두 불안을 느꼈다.
"블루스는 어차피 이번 시즌 복귀하는 게 어렵고 강등하든 안 하든 오는 여름에 떠날 놈이야. 강등하면 그냥 계약이 끝나는 거고, 강등 안 해도 1년밖에 안 남은 시점이니 기껏해야 천만 파운드 받겠지."
"찰리 아담 역시 노리는 팀이 많아. 계약이 3년 반 남았지만, 국가대표가 챔피언십을 뛰고 싶지는 않을 거야."
"올해 강등하면 챔피언십에서 몇 년 지내겠군."
"올해가 아니어도 내년에 강등할 거고."
도라익의 입단으로 잠깐 즐거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구단주는 돈 때문에 저 선수를 영입한 거야."
토미 영감의 말대로 구단의 도라익 영입은 보여주기 지분이 컸다. 16세에 아시안컵 골든 슈즈와 MVP를 독식한 천재. 2경기에 5골 1도움을 기록한 폭발적인 득점력.
전술적으로 중요했던 블루스의 부상으로 강등이 불가피한 상황에 이적료도 없고 주급도 낮은 빛 좋은 개살구 도라익을 영입함으로써 팬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불만을 잠재우려는 목적이 컸다.
도라익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면 기대를 안고 더 많은 팬이 구장을 찾길 바라는 속셈도 깔려 있었다. 고작 16세 선수이기에 어느 정도 기대치에 부응하는 모습만 보여도 팬들을 구장으로 끌어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골수팬들이 이렇게 생각할 정도면 돈밖에 모르는 구단주라고 다를 것 같아? 찰리 아담이 팀에 남으면 저 선수를 비싸게 팔아 리빌딩할 거고, 찰리 아담이 떠나면 저 선수를 주축으로 리빌딩할 가능성이 커. 당장은 아니지만, 대형 선수로 클 조건을 많이 갖췄다는 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겠지."
최경호가 죽어라 고집한 출전보장 조항이 아니었으면 도라익은 바이에른 뮌헨이나 맨유 혹은 아스널 같은 대형 구단과 이미 계약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계약을 성사한 것도 이번 시즌을 포기한 구단주가 최소한의 투자로 팬들의 분노를 최대한 잠재우려고 한 시도 덕분이었다.
"우리 스토크시티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지?"
"돈밖에 모르는 구단주 때문이지."
스토크시티의 구장은 바뀐 규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리그 사무국에서 개조를 요청했지만, 수전노 구단주가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뤘다.
그러다 삼 년 전에 최후통첩이 내려졌고, 그제야 급급히 개조하려 했으나 임시로 쓸 구장을 구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구단과 정부에서 50%씩 돈을 대고 새 구장을 짓기로 했고, 5년의 유예 기간을 얻어냈다.
그런데 수전노 구단주가 제때 자금을 투입하지 않아 구장 건설이 지지부진했다. 이제부터 전력을 다하더라도 내년 초에나 완성될 정도로 공사가 밀렸다.
"우린 왜 중동 석유 부자들이 인수하지 않는 거지? 하다못해 중국 부자라도 좋은데."
유럽에서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단주는 당연히 돈을 펑펑 쓰는 석유 부자고 그다음으로 환영받는 게 중국 부자다.
석유 부자가 자존심 때문에 돈을 물 쓰듯이 한다면, 중국 부자는 국가 이미지를 위해 돈을 팍팍 쓴다. 정부에 밉보인 기업인들이 유럽 구단을 인수해 성적을 내는 거로 죄를 삭감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내일 경기에 출전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메시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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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7일.
"너희 셋에게 특별 임무를 내리겠다."
샘 클루카스는 아담 페데리치와 라세 쇠렌센 그리고 조쉬 타이먼을 불러 모았다.
"팀에서 공격수를 새로 영입한 거 들었지?"
"물론이지."
"16세 어린 선수고 한국 출신이야."
세 선수는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너희 셋의 임무는 그 선수와 빠르게 친해져서 팀 적응을 돕는 거야. 그리고 제임스나 톰 인스가 접근하지 못하게 방어해야 하고."
제임스는 여자를 좋아하고 톰 인스는 클럽을 좋아한다. 그게 꼭 나쁜 일은 아니지만, 16세 선수한테 도움이 될 만한 사항도 아니다.
"알겠습니다."
셋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클루카스의 요구는 둘이었지만, 결국 맥락은 같았다. 괜히 제임스나 톰 인스와 먼저 친해지면 골치가 아프기에 셋이 친구가 되고 방어벽이 되어주라는 뜻이다.
오늘은 리그컵 원정 경기이기에 주전들은 오전에 출발한다.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오후 4시에 경기하고 저녁을 먹은 후 돌아오는 게 주전들 일정이다.
물론 셋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셋 모두 벤치에 앉을 기회도 없는 젊은 선수다. 리그 경기라면 함께 원정을 갔겠지만, 리그컵 경기는 선수 20명만 원정을 떠난다.
"그럼 믿고 맡기겠다."
샘 클루카스가 떠나자 세 선수는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16살에 내성적인 동양인이라. 친해지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어제 왔으니까 필요한 물건이 많을 거야. 찾아가서 길 안내도 하고 이것저것 도와주면 친해지지 않을까?"
"우리가 친해지기 어려우면 제임스나 인스도 어려울 거야. 그러니까 편하게 생각하자."
클루카스는 팀에서 가장 젊은 셋이라면 도라익과 쉽게 친해질 것이라고 억측했다. 열 살도 되기 전부터 축구만 해온 셋보다는 차라리 어느 정도 사회 경험이 쌓인 선수가 훨씬 적임자라는 건 미처 생각지 못했다. 왜냐면 클루카스 역시 열 살도 되기 전에 프로팀과 계약하고 축구만 해온 축구 바보니까.
팬 커뮤니티를 잠깐 뒤지니 도라익의 집 주소가 바로 나왔다. 셋은 일단 찾아가서 안면부터 트기로 했다.
"저기야."
도라익의 집은 스토크시티 외곽 지역에 있었다. 구단주 소유의 2층 저택은 주변의 다른 집보다 훨씬 큰 면적을 차지해 한눈에 들어왔다.
"저 소년인가?"
저택에는 꽤 넓은 마당이 있었고 마당의 절반 정도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축구장에서 쓰는 비싼 잔디는 아니지만, 훈련하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 잔디에서 덩치로만 보면 16세를 훌쩍 넘은 건장한 소년이 혼자 공을 갖고 리프팅 훈련을 하고 있었다.
셋은 긴장으로 굳은 얼굴을 하고 대문에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 소리를 들은 소년이 고개를 돌려 셋을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달려왔다.
- 작가의말
이번 편에선 주로 내성적인 동양인 도라익을 영입한 이유와 배경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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