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결점의 스트라이커
'우리 팀으로 모시긴 어렵겠다.'
바람둥이가 속으로 탄식했다.
반격 기회가 생기자 도라익은 바로 우측으로 달렸다. 레체르트의 긴 패스가 정확히 도라익을 찾았다. 가슴으로 공을 트래핑한 도라익이 팔을 뻗어 상대의 접근을 막았다.
어느새 토미와 산체스가 도라익을 지원하러 달려왔다. 그러나 아스널 선수가 꽤 가까이 붙어 있기에 도라익은 패스를 서두르지 않고 좀 더 공을 잡고 있다가 길게 차서 맥자넷에게 줬다.
찰리가 하던 파워 포워드 역할을 도라익이 완벽하게 해낸 것이다. 오늘 경기는 줄리엔이 출전하지 않았기에 도라익의 롤이 훨씬 많아졌다.
'역할 전환이 어떻게 하면 저렇게 빠르지?'
축구는 농구나 야구만큼 역할 분담이 명확하진 않다. 그렇다고 해도 각자 위치에 명확한 롤이 있는데, 도라익처럼 여러 위치의 롤을 전환해가며 경기를 뛰는 건 정말 어렵다.
맥자넷에게 공을 준 도라익은 재빨리 중앙으로 달렸다. 산체스는 바로 도라익이 있던 우측으로 향했고, 토미는 속도를 줄여 뒤로 처졌다.
토미와 가깝게 달리던 아스널 선수는 수비 위치로 복귀하는 게 우선이어서 계속 뛰었기에 마킹을 안 받는 상태가 되었다.
맥자넷은 땅볼로 도라익한테 공을 넘겼다. 도라익은 공을 잡지 않고 바로 백 패스하여 토미한테 줬다.
공을 잡은 토미는 자신의 오른쪽으로 드리블했다. 그에 반응해 도라익은 좌측으로 움직였다.
토미를 지나쳐서 수비 위치에 복귀했던 아스널 선수가 다시 토미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그저 달리는 게 아니라 도라익 쪽으로 향하는 패스도 방해해야 하기에 경로가 완벽하지 않았다.
덕분에 토미는 상대가 접근하기까지 꽤 길게 드리블했고, 그사이 스토크시티의 공격 선수들이 각자 위치를 잡았다. 맥자넷까지 전술대로 위치를 잡은 걸 확인한 토미는 주저 없이 왼발 인사이드 킥으로 우측 터치 라인에 붙은 산체스한테 패스했다.
공을 잡은 산체스는 왼손을 높이 들며 크로스를 올렸다. 신호를 받은 도라익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아스널의 두 센터백 사이로 파고들어 높이 점프했다.
맥자넷의 존재 때문에 먼 포스트와 가까운 센터백은 도라익과 맥자넷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위치를 잡고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도라익의 믿음에 보답하듯이 산체스의 크로스는 정확히 머리에 떨어졌다. 공에 실린 힘도 강해서 도라익은 목에 힘준 채 허리를 살짝 틀며 공을 건드리기만 했다.
머리에 맞은 공이 먼 포스트를 때리며 아슬아슬하게 골이 되었다.
'어쩌면 키퍼도 잘할지 모르겠군.'
수비 상황에서 미드필더 롤로 뛰던 도라익은 반격 기회가 오자마자 빠르게 위치를 잡고 파워 포워드 역할을 했다. 공을 맥자넷에게 준 뒤엔 공격형 미드필더가 되어 공격 선수들을 하나로 엮는 역할을 수행했다.
공을 토미한테 준 다음엔 센터 포워드 역할을 하여 상대 수비수를 견제했고, 산체스의 크로스를 골로 만들며 스트라이커의 역할까지 완벽히 수행했다.
물론, 매 경기 이런 대단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일천한 경험과 어린 나이를 생각하면 얼마든지 기대할 여지가 있다.
'잘생겼네.'
마드리드에서 온 귀부인이 도라익을 본 첫인상이다.
'즐거운가 보구나.'
경기가 진행되며 도라익이 즐겁게 공을 찬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우리 팀의 품위에 어울리는 아이야.'
나이는 40 초반이지만, 70이 넘은 남편과 10년 이상 살아서 그런지 사고방식은 조금 올드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아틀레티코랑 바르사가 있으니 우리 팀에 올 일은 거의 없겠지만.'
1골을 먹은 아스널이 라인을 올리고 공격을 강화했다. 패스 리듬도 빠르게만 가져가지 않고 가끔은 느린 리듬으로 경기를 운영하며 스토크시티의 수비진을 흔들었다.
코너킥을 주먹으로 쳐낸 미켈이 미끄러워 넘어졌다. 공을 잡은 아스널 선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빈 골대로 강슛을 날렸다.
관객석에서 거대한 탄식이 터졌다. 어느새 나타난 도라익이 얼굴로 공을 막아냈다. 도라익의 얼굴에 맞은 공은 황급히 몸을 일으키던 미켈의 품에 쏙 들어갔다.
도라익은 시큰한 콧등을 살살 문지르며 눈가로 흐른 눈물을 닦았다. 그러면서 웃지 않으려고 애썼다. 점점 청년이 되는지 안 그래도 털이 풍성하게 자라서 고민이었다.
"잘했어."
미켈과 레체르트가 연이어 도라익의 엉덩이를 때렸다.
"아파."
"콧등 맞았을 때 엉덩이 때리면 시큰한 게 빨리 없어져."
'부탁할 만한 선수가 누구 있지?'
레알의 공격수라면 저 위치에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수비수가 최전선에 나타나서 골을 넣는 일은 있어도, 공격수가 최후방에 나타나 상대 공격을 무산하는 일은 여태까지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선지 도라익이 더 욕심났다.
유럽인에게도 먹히는 준수한 외모와 크게 화제가 된 선행에 기인한 바른 이미지, 40억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는 데 유용한 동양인이라는 신분. 게다가 레알에서 뛰기엔 안정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이번 시즌 하반기의 활약상 덕분에 쏙 사라졌다.
'지단? 호나우두? 베컴? 피구? 호날두는 한국에서 인기 나쁘다니까 제외하고.'
일부 스포츠 선수는 자신의 우상과 함께 뛰기 위해, 혹은 우상이 걸쳤던 유니폼을 입기 위해 팀을 선택하기도 한다. 비록 자금 면에서 바르사와 아틀레티코에 밀리지만, 수많은 스타 선수를 보유했던 덕분에 비장의 카드가 없는 건 아니다.
'언론사 보고 메시랑 바르사 사이를 이간질하는 기사를 많이 내보내라고 해야지.'
바르사 역시 스타 선수를 많이 배출한 팀이다. 아틀레티코도 많은 스타 공격수를 배출했지만, 팀에 대한 충성도는 레알이나 바르사와 비교하기 미안하다.
- 도라익 선수, 한 골만 넣으면 다칸과 공동 2위입니다.
예전엔 골 수가 같을 때 경기 시간을 비교해 더 적게 뛴 선수가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십여 년 전부터 그냥 골 개수만 보는 거로 바꿨다.
- 5골 더 넣으면 베르딩요랑 같은데 말입니다.
- 6골입니다. 방금 베르딩요가 한 골 넣었습니다.
지난 시즌 잠깐 주춤했지만, 베르딩요는 이번 시즌 역시 30골의 기염을 토했다.
토미가 공을 잡자 도라익은 빠르게 우측으로 달렸다. 그런데 토미의 패스는 약간 중앙으로 치우쳤다. 아직 전반전이 거의 10분 남았는데도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시즌 내내 피로가 누적되었는데 마지막 경기라는 생각에 체력을 아끼지 않고 뛰다 보니 체력 소진이 일찍 왔다.
도라익은 재빨리 방향을 바꿔 공을 향해 달렸다. 아스널 선수 두 명 역시 경합하러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도우!"
산체스가 평소 듣기 힘든 고음을 질렀다. 도라익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점프했다.
아스널 선수의 스터드가 도라익의 장딴지를 긁었다. 충돌의 충격도 있어 도라익은 잔디에 세게 넘어졌다.
주심이 사고 현장으로 빠르게 달리며 의료진 투입을 요청했다.
그때, 도라익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바닥에 쓰러진 아스널 선수한테 손을 내밀었다.
비록 스터드에 강하게 긁히긴 했지만, 몸을 일찍 띄운 덕분에 다른 부상은 없었다. 그라운드에 세게 넘어지긴 했으나 잘 친 낙법과 평소 유연성 훈련을 거르지 않은 덕분에 머리와 허리 모두 충격을 받지 않았다.
"미안해. 악의는 없었어."
도라익의 손을 잡고 일어선 아스널 선수가 사과했다.
"그래도 다음부턴 주의했으면 해."
고의든 아니든, 산체스의 외침을 듣고 점프하지 않았다면 크게 작게 다칠 태클이었다.
주심은 태클을 펼친 아스널 선수한테 옐로카드를 제시한 다음, 이어폰을 톡톡 치며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했다.
비디오 판독 역시 고의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주심의 옐로카드 판정에 손을 들어줬다.
판정이 끝나자 아스널 팬들이 박수를 보냈다.
- 카메라가 루이스 선수를 잡습니다.
- 루이스 선수 우는 것 같은데요?
- 아스널 선수도 우는 것 같습니다.
이분할로 잡힌 화면에 루이스와 루이스의 태클에 발목을 다쳤던 아스널 선수 모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렸다.
'저게 꾸민 모습이라고 해도 두렵지만, 본성이라고 하면 더 무서워.'
꾸민 모습이라면 정말 심계가 대단한 거고, 본성이라고 하면 리더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뜻이다. 바람둥이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무서웠다.
왜냐면 자신의 바람기 역시 타고난 것이어서 죽을 때까지 못 고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아, 칭찬하고 싶은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 이럴 때 적절한 말이 있죠. 요즘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 뭔데요?
- 도라익답다.
- 거시기처럼 뭔지 모르지만 확 와닿네요.
도라익은 축구 선수가 되고 꽤 많은 일을 겪었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고 기억에 깊이 남은 일은 단연 아스널과 벌인 경기다.
본인이 뇌진탕으로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고 다른 선수가 담가에 들려 나가는 것도 꽤 봤지만, 아스널 경기만큼 충격이 크지 않았다.
비록 당시엔 화도 나고 자책감도 있고 해서 두 번째 골 역시 도발의 의미를 담아 넣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선택에 의구심이 들고 후회의 감정이 깊어졌다.
덕분에 이란 선수의 도발에 의젓하게 대처할 수 있었고, 오늘 경기에선 자신이 다칠지도 모를 태클을 날린 선수한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저 아이. 꼭 마드리드로 데려와야 해.'
축구 역사상 무결점의 선수를 찾기 어렵다. 누구 하나를 꼽으면 꼭 누군가가 태클을 건다. 독일의 전설적인 공격수 뮐러 역시 드리블이나 패스가 구리다는 이유로 폄하되었고, 월드컵과 유럽컵은 물론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 올린 지단도 월드컵에서 받은 레드카드 두 장 때문에 평가절하되고 있다.
도라익 역시 어떤 오점이 생길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여준 활약상과 방금 보여준 인성까지 하면 무결점의 선수다.
- 작가의말
제 얼굴도 타고난 거여서 도통 나빠질 기미를 안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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