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익이네 가족
"어떻게 한 거야?"
경기가 끝나고 도라익을 본 엘의 첫 질문이었다.
"스또라이커 회원 30명이 날 도우러 한국에서 왔어. 그리고 유럽에 있던 회원이 백 명 정도 오고. 그래픽 디자인을 하는 분이 패널을 설계했는데, 영어는 너무 사람이 많이 필요해서 한글로 했지."
"사람이 훨씬 많던데?"
"경기 시작 전부터 주변 팬들에게 내 팬클럽이라고 얘기하고, 신호에 맞춰 패널 뒤에 숫자대로 들어달라고 부탁하기로 했어. 내가 처음에 세리머니를 안 한 건 준비가 덜 됐기 때문이야."
"고마워, 도우. 나 오늘 있은 모든 순간을 평생 못 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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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은 부모와 사이가 나쁘다. 부모 모두 이혼 후 재혼하며 엘을 외할머니한테 맡기고 일 년에 한두 번 들여다봤다.
더구나 언니의 치료를 제때 안 해준 것 때문에 어려서부터 부모를 원망했기에 성인이 되고부터 아예 관계를 끊었다.
고민 끝에 엘은 도라익의 말대로 한국에 가서 출산하기로 했다. 그간 드라마로 한국말을 열심히 익혔기에 빨리 적응할 자신도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2월 26일.
도민준과 천솔이 부부 그리고 도봉구 씨와 최연희 씨가 엘을 마중하러 공항에 나타났다.
"연예인 맞죠?"
"아닙니다."
"티비에서 본 거 같은데."
"진짜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사인 하나만 해주세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가 도민준한테 떼썼다. 도민준은 어쩔 수 없이 펜과 노트를 받아 자기 이름을 써줬다.
"본인 이름만 달랑 쓰면 어떡해요."
사인을 받은 여중생이 컴플레인을 걸었다.
"누구에게, 덕담 한마디, 그리고 날짜."
'라익이는 이게 뭐가 좋다고 한꺼번에 수백 명씩 해주고 그러지?'
"해달라고 해서 해주는 건데, 진짜 연예인 아닙니다."
"에이, 티비에서 봤다니깐요."
"티비 나온다고 다 연예인인 건 아니잖아요."
때마침 공항의 대형 스크린에 광고가 떴다. 도라익과 도민준이 함께한 드림즈의 모그룹 이미지 광고였다.
"봐요. 딱 걸렸죠?"
증거를 확보한 여중생이 승리를 만끽하며 떠났다.
'애가 참 착하네.'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라익이와 라진이를 떠올린 도민준이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를 내렸다.
"민준아, 천솔이는?"
"어느 출군지 알아보러 갔어요."
평생 야구만 해온 도민준은 이런 쪽으로 아는 게 없었다.
"그거 그냥 검색하면 나와. 오는 길에 다 알아보고 왔지. 빨리 전화해서 솔이더러 이리 오라고 해."
전화를 받고 온 천솔이는 도봉구 씨와 최연희 씨와 이야기꽃을 피웠다. 결혼하고부터 쭉 시부모와 함께 살았기에 서먹함이 전혀 없었다.
한편.
엘은 도라익이 준 인사말을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첫인상이 좋아야 한다고 그랬지.'
굳이 도라익의 말이 아니었어도 시부모와 며느리의 첫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 드라마로 수없이 봐왔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만, 그래도 없는 얘기 지어내진 않았겠지. 도우네 집이 재벌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사진을 보니 형제 모두 닮아서 출생의 비밀도 없을 테고.'
불안한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며 엘은 곧 생길 만남을 기대했다.
"it's your first time to come to Korea?"
붙인 짐을 기다리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멋을 잔뜩 부린 남자가 말을 걸었다.
"맞아요."
"한국말 잘하네요?"
"쪼끔요."
"혹시 어디 가세요? 서울이면 제가 태워 드릴게요."
"사람 있어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남자가 전화기를 꺼냈다.
"혹시 연락되는 전화번호 있어요? 아니면 SNS라든가."
"미안해요."
때마침 짐이 나오자 엘은 바로 챙겨서 떠났다. 남자는 자기 짐을 기다리며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저 정도면 연예인이나 유명 모델일 테니 누군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겠지.'
한참 기다려서 가방을 찾은 남자는 출구로 천천히 걸었다. 그때 한쪽에서 크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방금 봤던 이쁜 백인 소녀였다. 어느새 한복으로 갈아입은 백인 소녀가 커다란 짐가방을 끌고 출구로 느리게 걷고 있었다.
남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엘이 향하는 방향으로 걸었다. 몇몇 젊은 사람도 핸드폰을 꺼내 엘의 모습을 촬영하며 천천히 따라갔다.
출구를 나간 엘이 갑자기 보폭을 늘였다. 남자 역시 거기에 맞춰 걸음을 빨리했다.
"할머님, 할아버님, 아버님, 어머님."
도라익의 당부대로 엘은 최연희 씨를 제일 먼저 호칭했다. 아버지한테 약하지만 할아버지한테 절대적으로 강하며 집안에서 발언권이 가장 강한 분이라는 게 도라익의 객관적 평가였다.
"시하 입춘지절에 기체후 일향만강하옵시고 고체 건안하시길 앙망하며 불초 소녀 엘이 늦은 인사 올리나이다. 큰절 받으십사와요."
말을 마친 엘이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사뿐 절했다. 수많은 사극을 탐구하며 절하는 동작을 익혔고, 도라익의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연습했기에 얼굴만 가리면 어디 오랜 양반 가문의 참한 규수인 줄 알았을 것이다.
"내 며늘아기 고운 얼굴을 이리 보니 당장 눈 감아도 원이 없겠구나. 어서 귀한 몸을 일으키거라."
배우를 꿈꾸다가 육아가 훨씬 적성에 맞음을 발견하고 진로를 바꾼 천솔이 맞장구를 쳤다. 고된 육아를 막장 드라마와 사극으로 풀다 보니 대사를 함에 있어 전문 배우 못지않게 자연스러웠다.
"이리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소녀 원로에 지쳤사오니 어서 집으로 가심이 어떠나이까."
도라익이 정성을 가득 들여 준비한 요즘 젊은 세대의 일상 문안 인사를 마친 엘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항을 떠났다.
'조상님이 도우셨구나. 하마터면 미친 여자한테 마음 줄 뻔했어.'
첫눈에 엘에게 반했던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돌아가는 대로 향을 올려 조상님들께 감사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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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들이 술안주가 없어 라현이 고추를 먹겠다고 하니까 라익이가 바지 훌러덩 벗고 울면서 대신 자기 고추 먹으라고 그랬어."
"어머, 진짜요?"
"그리고 라진이가 어릴 때 아파 입원했는데 귀가 안 들렸어. 그때 라익이가 라현이랑 라연이 데리고 벌판에 가서 귀뚜라미 잡았어. 귀뚜라미 먹으면 귀 뚫린다고 누가 그랬나 봐."
"귀뚜라미가 뭐예요?"
"곤충인데 귀뚤귀뚤 울고 성질이 더러워서 싸움도 잘해."
"근데 아버지는 베이스볼인데 왜 도우는 풋볼 했어요?"
엘과 즐겁게 대화하던 도봉구 씨의 입이 한국은행의 금괴 보관 금고의 문처럼 굳게 닫혔다.
"그건 잘 모르겠는데."
대신 천솔이 대답했다.
"임신 때부터 발길질이 남달랐어요. 축구 선수 하려고 그랬나 봐요."
"할아버지 복수하려고 그랬나 보지."
최연희 씨의 말에 도봉구 씨가 몸을 최대한 움츠렸다.
"집에 가면 라익이 동생들 있어요. 라현이나 라연이는 점잖고 얌전한데 라진이는 라익이랑 비슷해요."
"재밌겠어요."
"그리고 라희는 애교가 많고 사람한테 들러붙기 좋아해요. 그래도 처음에만 귀찮고 며칠 참으면 나아질 거예요."
"저 그런 거 좋아해요."
"라유는 가만히 있는 걸 잘 못 해요. 애기 때문에라도 매일 걸어야 하니 그때 라유도 데리고 나가요."
"좋아요. 저 애기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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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할머니. 이거 아가미 봐요. 갓 잡은 고기가 아닌데요."
"그럼 사지 마."
"그러지 말고 조금 싸게 줘요. 집에 시동생들 생선 반찬 먹고 싶다고 그래요."
생선 가게 할머니의 눈이 측은하게 변했다.
"그래, 어느 나라에서 온 처자라고?"
"노르웨이요."
"노루 많은 나란가?"
"추운 나라예요."
할머니가 물고기 세 마리를 비닐봉지에 담아 저울에 올렸다.
"남편은 뭐 하고?"
"영국에 있어요."
"그래도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외국까지 가서 열심히 사는구만. 한국 좋은 나라니까 정 붙이고 잘 살아."
생선을 싸게 산 엘은 걷기 싫다고 떼쓰는 라유를 등에 업고 양손 무겁게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 생선 싸게 사 왔어요."
"싱싱한 거로 잘 골랐구나."
"그럼요. 노르웨이도 생선 많아요."
"두 개는 굽고 하나는 해물탕 끓이는 데 넣자."
해물탕 소리에 엘의 입에 침이 한가득 고였다.
"어머니. 저녁에 도우 경기도 있는데 치킨 해 먹으면 안 돼요?"
"그럼 생선 손질하고 있어. 내가 금방 가서 생닭 몇 마리 사 올게."
쪼들리게 가난하진 않아도 입이 많아 여유가 적었던 탓에 웬만한 음식은 직접 해 먹는 게 습관이 됐다.
"고마워요."
칼을 잡은 엘은 생선 대가리를 자르고 내장을 뽑은 다음, 지느러미를 가위로 베고 칼로 비늘을 벗겼다.
어릴 적에 외할머니랑 같이 자주 하던 일이어서 전혀 막힘이 없었다.
"형수님, 뽀뽀."
그새 초등학교 다니는 라희가 돌아왔다. 라희는 무거운 가방을 벗기도 전에 쪼르르 달려와 엘의 볼에 뽀뽀했다.
"아가씨는 라유 도련님이랑 같이 놀아요. 엘 비린내 나요."
"괜찮아요. 비린내 나도 형수님 예뻐요."
라희 다음으로 돌아온 건 라진이었다.
"형수님, 칼 그거 위험한 거니까 천천히 내려놓으시고."
라진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네, 그리고 서두르지 마시고 느리게 일어나서 뒤로 물러나요."
엘이 장단에 맞춰 일어서자 라진이 바로 칼을 잡았다.
"라희야. 이런 힘들고 위험한 일은 남자가 하는 거야. 넌 여자한테 이런 일 시키는 남자 만나면 안 돼. 알았지?"
라진은 라희한테 신신당부하면서 생선 비늘을 열심히 벗겼다. 비록 엘의 칼질이 더 능숙하지만, 힘 조절이 뛰어난 라진이가 훨씬 잘 벗겼다.
'진짜 도우랑 닮았어.'
평소 하는 짓은 꼭 철부지지만, 가족과 관련한 일엔 한없이 진지한 게 너무 닮았다. 게다가 아직 중학생인 어린 나이에도 라희가 좋은 남자 만나려면 자신이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면서 힘들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저녁에 축구 보면서 치킨 먹기로 했어요."
"와, 치킨."
라희가 기쁘게 외쳤다. 그러나 라진은 잠깐 귀가 안 들렸는지 아무 반응도 없었다.
'보청기 하나 살까? 그런데 오히려 상처받으면 어떡하지?'
딱 사춘기 나이인 라진이에겐 보청기가 오히려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그때 라현이와 라연이가 함께 돌아왔다. 라현이는 보통 야구부 훈련 때문에 늦는데 웬일인지 일찍 귀가했다.
"라진아, 누나 선물이야."
라연이 내민 건 귓속에 꽂는 소형 보청기였다. 색깔도 살 색과 비슷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다.
"고마워."
엘의 걱정과 달리 라진이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보청기를 받아 스스럼없이 귀에 꽂았다.
'이런 게 가족이구나.'
엘은 라진이를 걱정했던 자신이 나쁜 사람인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라진 도련님, 우리 저녁에 경기 보면서 치킨 먹어요."
"와, 신난다. 그럼 저녁 조금만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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