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진짜 강하다니
26라운드에 스토크시티는 런던에서 아스널과 대결했다. 고작 3일 전에 경기를 뛰어서 스토크시티보다 더 지친 아스널이다.
멀티 탈의 세리머니로 레드카드를 받아 퇴장한 도라익은 관객석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전술대로 열심히 뛰자. 우리 아스널보다 5점 많아."
라커룸은 조금 무거운 분위기였다. 1월 내내 도라익이 슬럼프였지만, 슬럼프여도 도라익은 도라익이다. 도라익이 벤치에 있고 그라운드에 있는 것만으로 뭔가 해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도라익이 없는 경기를 치러야 한다.
"우리에겐 도라익이 없지만, 아스널도 통계적으로 가장 약한 시기야."
2월부터 3월 중반까지 아스널이 실점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다. 예전 구장을 비롯한 시설에 투자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절에 선수층이 상대적으로 얇아 생긴 일인데, 시간이 흐르며 패턴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루이스가 잠깐 쉬며 템포를 조절했다.
"우리가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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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퍼는 페데리치고, 센터백은 스테판과 네이선이다. 줄리엔은 정면 수비가 부족하기에 아스널처럼 돌파 잘하는 기술형 선수가 많은 팀을 상대하기 어렵다.
양쪽 풀백은 오창범과 스미스의 조합이다. 아스널의 측면 선수들 스피드 때문에 라미스와 맥자넷보단 조금이라도 빠른 둘이 선발로 점지됐다.
수미는 루이스와 안데르의 조합이었다. 안데르는 키가 188로 제공권이 뛰어나며 짧은 패스나 긴 패스 모두 정확하다.
토미가 왼쪽 윙으로 출전하고 산체스가 오른쪽 윙으로 출전했다. 공격수는 우디르와 발제르의 조합이었다.
체력적인 문제인지 심리적인 문제인지 스토크시티 선수들 움직임이 조금 둔중했다. 다행히 3일 전에 원정 경기를 치른 아스널 역시 몸이 가볍지 않았다.
경기는 예상대로 진행됐다. 아스널의 물 흐르는 듯한 빠른 공격과 스토크시티의 우디르를 이용한 반격 혹은 느리게 밀고 올라가는 진지전으로 두 팀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실점 위기는 스토크시티가 더 많았지만, 우디르와 발제르의 조합도 아스널 골대에 꽤 큰 위협을 줬다.
'맥자넷 이대로는 힘들겠는데?'
스미스의 활약이 눈부셨다. 몇 년 전에 토미를 건지고 소식이 감감했는데, 드디어 스미스라는 주전급 선수를 발굴해냈다.
오창범도 라미스에게 밀리면서 위기의식이 생겼는지 경기에 더없이 집중했다. 수비 능력이 부족해 돌파당하는 일은 있어도 본인 실수로 상대에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루이스도 열심히 해야겠어.'
안데르는 루머로나마 바르사와 연결되었던 선수다. 수비가 터프하지 못한 문제점이 보이긴 하지만, 제공권은 물론 드리블과 패스 모두 수준급이다.
저런 선수를 고작 300만 파운드에 산 구단주의 수완이 참으로 놀랍다.
'뭔가 약점이 있을 거야. 그건 본인이 극복하거나 팀 전술로 커버하면 되지.'
발제르의 활약도 눈부셨다. 발제르는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경기장 상황을 판단한 후 루이스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면 루이스가 팀 전체를 지휘해 공을 중앙에서 굴릴지 측면으로 돌릴지 결정하고, 리듬을 빠르게 할지 느리게 할지 지시했다.
'토미가 참 대단해.'
토미의 피지컬은 속도 빼고 평범하다. 드리블도 화려한 기술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대표팀에 간간이 불려가는 걸 보면 참 대단한 선수다.
우디르는 현재 변화하는 중이다. 도라익이 복귀하면서 벤치에 앉는 시간이 늘었다. 처음엔 짧은 출전 시간에 뭘 해야 할지 몰라 방황했으나, 최근엔 짧은 기간에 자신의 능력을 폭발적으로 쏟는 방법을 도라익한테 배워 착실히 실천했다.
오늘은 선발이기에 어느 정도 체력 안배를 해야 하는데, 단순한 우디르는 교체로 올라왔을 때처럼 아낌없이 체력을 소모하며 날뛰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아스널과 비등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 아쉬운 실점입니다.
- 네이선 선수, 하늘을 보며 탄식합니다.
땅볼 크로스를 네이선이 건드려 자책골을 넣었다. 하늘을 보며 탄식한 네이선이 곧 웃는 얼굴로 위로하러 온 선수들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파워를 좀 더 키우고 경험만 쌓이면 특별한 약점이 없는 센터백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큰 네이선이다. 충분한 경험이 쌓이기까지 수많은 좌절을 버텨야 한다는 게 문제지만, 네이선의 멘탈은 그걸 견디고도 넉넉하다.
스토크시티의 스카우트 부서가 수비수 보는 눈은 프리미어리그에서도 4강에 넉넉히 들 거라고 도라익은 생각했다.
'감독도 대단하지.'
테일러는 바로 팀에 공격을 지시했다.
강팀의 경우 먼저 실점했을 때 서두르지 않는다. 자기 리듬을 지키며 천천히 공격으로 전환해도 된다.
그러나 상대적 약팀인 스토크시티로선 재빨리 공격으로 전환해 기세가 죽는 걸 막아야 한다.
라인을 올려 공격 태세로 전환하자 우디르가 왼쪽 윙으로 가고 토미가 중앙으로 갔다. 슈팅 잘하는 발제르가 포워드 자리로 가고, 마찬가지로 득점 능력이 있는 토미가 뒤를 받쳤다.
스토크시티는 측면과 중앙에서 공을 안정적으로 돌리며 아스널을 압박했다.
일부러 라인을 내리며 스토크시티의 압박을 유도했던 아스널이다. 그러나 스토크시티가 보여준 안정감과 가끔 터지는 크로스나 패스는 아스널이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최근 7경기 무패 행진은 도라익이 슬럼프를 겪는 과정에서 이룬 것을 생각할 때, 아스널은 좀 더 경각심을 가졌어야 했다.
- 우디르 슛!
- 골!
크로스로 일관하다 갑자기 컷인한 우디르가 인사이드 프런티킥으로 득점했다.
점수가 1:1이 되고도 스토크시티는 압박을 유지했다. 생각 밖으로 아스널의 수비가 허술해서 압박을 유지하는 편이 오히려 안전했다. 수비 구멍을 막느라 많은 선수가 라인을 내린 탓에 아스널의 반격은 빠르기만 하고 위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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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널 팬 아니에요?"
"도우가 아스널에 오길 바라며 미리 받는 거예요."
15분 휴식 시간에 아스널 팬들이 사인받으러 단체로 몰려왔다. 대부분은 10대였고, 나이 든 팬은 얼마 없었다.
"제가 아스널 안 가면 사인 버릴 건가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우리 아빤 아스널 팬인데 쏘니 사인을 보관하고 있어요."
경기가 시작되자 몰려든 팬들이 돌아갔다.
스토크시티는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줄리엔으로 우디르를 교체했다. 우디르가 전반전에 너무 날뛰는 바람에 체력을 소진한 탓이다.
'시즌 초반에 테일러가 얼마나 머리 아팠을까?'
도라익도 시즌 초반에 체력 안배에 실패했다. 감독인 테일러로선 선수더러 일부러 슬렁슬렁 뛰라고 할 수도 없기에 골치를 꽤 앓았을 거다.
줄리엔을 포워드로 올린 스토크시티는 후반전 시작부터 바로 라인을 올려 크로스로 아스널 골대를 폭격했다.
'쉬느라 오히려 몸 상태가 체력이 빠졌을 때보다 더 못해.'
전반전 30분에서 35분 정도에 체력 고비가 온다. 35분부터는 몸 상태가 슬슬 호전되지만, 집중력이 떨어진다.
훌륭한 주장이 필요한 이유다. 화이팅을 외치는 건 입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화이팅으로 다른 선수의 집중력을 끌어 올리는 건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전반전이 끝나고 휴식에 들면 대부분 선수는 정신력 회복에 집중한다. 그렇기에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몸이 무거운 선수가 있다.
아스널은 고작 3일 전에 원정 경기를 뛰었기에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거기에 전반전 막바지에 수비에 전념하느라 힘들었기에 15분 동안 푹 쉬었고, 푹 쉬며 체력과 정신력은 꽤 회복했어도 몸은 오히려 무거웠다.
스토크시티도 일부 선수가 몸이 무거웠지만, 리그 1위를 비롯해 7경기 무패, 최근 리버풀과 맨시티에 승리를 거둔 것 등 수많은 긍정적인 자극으로 아스널보다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 스미스 컷인!
- 크로스!
- 골. 줄리엔 골입니다.
스미스가 갑자기 컷인을 했다. 그 상황에 아스널 선수들은 물론 스토크시티 선수들도 스미스가 슈팅하지 않으면 윙 자리에 간 토미에게 찔러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미스가 상식을 깨고 짧은 크로스를 올렸고, 줄리엔이 몸으로 상대 센터백의 푸시를 버티면서 선 자리에서 헤딩해 골을 넣었다.
2:1로 앞서자 테일러는 전방위 압박을 지시했다.
아스널은 골을 넣은 다음 반격을 염두에 두고 바로 라인을 내려 스토크시티의 압박을 유도했다.
강팀인 아스널로선 당연한 선택이다.
스토크시티는 아니었다. 2:1로 역전한 상황에 전방부터 압박하며 아스널이 자기 리듬을 찾는 걸 방해했다.
우디르도 없어 반격 능력이 별로인 스토크시티로선 바로 라인을 내리는 건 악수일 뿐이다. 아스널은 라인을 내린 스토크시티 상대로 편하게 패스로 리듬을 찾아 좋은 컨디션으로 스토크시티 수비진을 괴롭힐 것이다.
'루이스 잘하네.'
스토크시티는 루이스의 지휘에 따라 전방 압박을 유지하면서 라인을 천천히 내렸다.
'우리 팀이 진짜 강했구나.'
아스널이 가장 어려운 시기인 건 맞다. 그러나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처럼, 스토크시티라고 힘들고 어려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단순히 선수들 주급만 비교해도 아스널의 20%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대로면 진짜 우승할 수 있겠어.'
후반 65분. 아스널이 선수 교체를 진행했다.
발목 부상을 당했던 공격수가 또 등판했다.
루이스가 안데르에게 귓속말을 했다. 안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데르와 합의를 마친 루이스는 곧장 센터백으로 위치를 내려 교체로 올라온 공격수를 마킹했다.
풀백 두 명을 포함한 포백이 아니라 전 감독인 알론소가 극단적인 수비 상황을 상정해 만든 센터백 4명짜리 전술이었다.
스토크시티도 두세 경기에서만 사용한 적 있다.
스테판과 네이선은 페널티 박스를 절대 벗어나지 않고, 루이스는 상대 공격수 한 명을 마킹한다. 줄리엔의 역할을 페널티 박스 밖에서 상대 선수들의 침투 경로를 몸으로 막는 것이다.
이 전술의 장점은 상대의 슈팅 지역을 최대한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 득점이 많거나 키퍼의 실점이 많은 구역을 줄리엔이 어떤 상황에도 안 이탈하고 지키면 실점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억지할 수 있다.
물론, 이 전술도 약점이 있다. 그러나 아스널처럼 헤딩 잘하는 선수가 드문 팀 상대로는 매우 효과적이다.
- 루이스 선수, 옐로카드 받습니다.
루이스는 자신이 마킹하는 선수에게 돌파당하자 상대 허리를 안고 늘어졌다.
- 악수를 청하는데요?
먼저 털고 일어난 루이스가 웃는 얼굴로 아스널 선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까지야."
악수를 거부한 상대 선수에게 루이스가 흉악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예전에 감독에게 폭언하고 대표팀에서 쫓겨난, 거칠 게 없던 그 루이스의 미소였다.
"미안하지만, 더는 미안해하지 않을 거야."
경기 80분.
위험한 태클로 루이스가 옐로카드 누적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경기장을 떠나는 루이스의 얼굴은 맨시티전에서 퇴장당한 도라익과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후련해 보였다.
경기 88분.
페널티킥으로 실점하며 스토크시티는 결국 2:2 무승부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경기를 끝낸 스토크시티 선수들 얼굴은 하나같이 통쾌하고 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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