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의 라익
10월 6일 원정 경기에서 스토크시티는 0:1로 아스톤 빌라에 패했다.
지난 시즌은 초반에 리그 선두를 달렸고 지금도 리그 5위에 랭크된 팀이다. 3월 경기와 달리 주전 공격수들이 전부 출전한 아스톤 빌라는 스토크시티와 용호상박의 대결을 펼치고 운 좋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3연패로 18위가 되어 강등권에 진입했지만, 스토크시티의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한 경기를 덜 뛴 것도 있지만, 원래 스토크시티는 박싱데이부터 힘을 내는 팀이다.
그리고 A매치 브레이크가 오며 도라익은 짧은 휴가를 즐기게 되었다.
스토크시티는 찰리와 페데리치가 대표팀으로, 토미가 잉글랜드 U21 팀으로 차출되었다.
톰 미켈은 경쟁 상대들이 너무 쟁쟁하고 루이스는 대표팀 감독하고 사이가 나빠 부름을 받지 못했다.
내년에 유로 2032 대회가 열리기에 레체르트 역시 차출되지 않았다. 우승을 노리는 네덜란드는 젊은 선수를 관찰하기보다 팀워크를 다지는 게 급선무다.
"라익아. 광고 제의 들어왔다."
"안 한다니까."
"그냥 사진 몇 장 찍으면 돼. 촬영도 스토크시티에서 하고."
"진짜 사진 몇 장 찍으면 끝나는 거지?"
만약 도라익이 시계 광고를 찍는다고 가정하면 계약서에는 일 년에 몇 번 시계를 찬 모습을 노출해야 한다는 조항이 삽입된다. 그리고 SNS에 시계 사진을 정기적으로 올려야 하며 다른 시계를 찬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
축구에 집중하는 데 방해될 것 같아 도라익은 당분간 일체 광고를 거절하기로 했다.
"의류 브랜드 광고인데 TV는 나가지 않고 광고판에만 실려. 다른 브랜드를 입지 말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1년 계약인데 단가가 세. 패션쇼 같은 행사에 참석할 필요도 없고 그저 사진만 찍으면 된다니까. 그리고 옷도 공짜로 줘."
생각보다 좋은 조건에 도라익은 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전속 모델도 아닌데 50만 파운드나 주고 날 쓰겠대?"
"난들 알아? "
계약서를 꼼꼼하게 검토한 도라익은 광고를 찍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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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서 반가워."
엘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가볍게 화장하고 옷도 잘 차려입은 엘은 그날과 달리 눈이 부셔 쳐다보기 부담스러웠다.
"네가 청탁한 거야?"
도라익의 특이한 단어 선택에 엘이 또 배꼽을 잡았다.
"올가을 컨셉은 커플룩이거든. 나랑 나이가 비슷하고 이미지가 신선하며 아시아에서도 먹힐 상대를 찾아야 하는데 네가 딱이잖아."
광고판 모델료로 50만 파운드는 큰돈이다. 그러나 도라익의 이미지와 영향력을 생각하면 또 과한 금액도 아니었다.
게다가 반응이 좋으면 잘 꼬드겨 전속 모델로 계약해도 된다. 도라익이라면 50만 파운드의 거금을 써서 모험해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상대다.
'50만 파운드 버는 게 쉬운 일은 아니네.'
사진 몇 장만 찍으면 되는 쉬운 일거리는 맞다. 그러나 사진 몇 장 건지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은 전혀 만만치 않았다.
"배경은 폭포입니다. 시원함을 느끼는 표정을 지어주세요."
엘은 바로 양팔을 벌리고 턱을 살짝 든 채 눈을 감았다. 폭포의 시원함을 즐기며 얼굴로 싱그러운 햇살을 받는 듯한 표정에 도라익은 좌절했다.
"도우. 아픈 사람처럼 찡그리지 말고 웃어요."
'축구 하길 잘했어.'
아이돌은 노래 때문에 힘들고, 배우는 연기 때문에 힘들다. 머리가 나쁘진 않지만, 공부도 평범한 축에 들었다.
"폭포를 상상하지 마. 폭포를 보면 어떤 느낌일지 떠올려."
"폭포 직접 본 적 없는데?"
엘의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재빨리 폭포 영상을 찾아 틀어줬다. 시원한 폭포 소리에 간간이 섞인 새소리. 시원함이 화면을 뚫고 도라익에게 전달됐다.
"오케이. 그대로 표정 유지하고."
사진 감독이 처음으로 오케이를 외쳤다.
"낙엽이 가득한 거리를 둘만 걷는다고 상상하세요."
도라익은 엘을 당겨 팔짱을 꼈다. 너무 몰입한 바람에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진짜 좋아요. 첫사랑이 떠오르는 느낌."
엘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머리를 기대며 왼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도라익은 엘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굿. 너무 좋아. 옷 갈아입고 5분 쉬고 촬영할게요."
폭포 앞, 낙엽 가득한 중세의 고요한 거리, 맑고 깊은 호수에 띄운 배, 아찔한 천 길 벼랑가, 연인과 따뜻한 커피를 즐기는 조용한 카페.
도라익과 엘은 옷을 갈아입으며 사진 감독의 주문대로 컨셉에 맞는 표정과 포즈로 촬영했다. 엘의 훌륭한 리드와 도라익의 과몰입에 힘입어 촬영은 생각보다 빠르게 2시간 만에 끝났다.
"여기에 배경을 합성한다고요?"
"맞아요. 넓이 32미터에 높이 20미터의 광고판으로 제작되어 전 세계에 배포될 겁니다."
"그럼 화장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포토샵으로 다 해결합니다. 더구나 두 모델 다 화장이 필요 없을 정도로 피부톤이 좋고 비율도 좋아요."
촬영을 훌륭하게 끝내서 신난 사진 감독은 배경을 합성하는 것도 간단히 시연했다. 흰 천 앞에서 찍었던 밋밋한 사진이 배경이 추가되며 엄청 이쁘게 바뀌는 걸 본 도라익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법사 같군요."
"우리에겐 도우의 플레이가 더 마법 같아요. 아쉽지만 난 아스널 팬입니다."
"애석하군요."
촬영이 끝나고도 엘은 남았다.
"도우. 밥 한 번 사는 게 어때?"
"왜요?"
도라익이 불퉁한 얼굴로 대꾸하자 엘이 또 배꼽을 잡았다. 정신이 이상한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웃음이 헤픈 여자인 건 확실했다.
"너 혹시 남자 좋아해?"
"응? 이상한 의미로 물어본 거지?"
"응. 이상한 의미로 남자 좋아하냐고."
"그건 아닌 거 같아. 친한 사람 대부분이 남자긴 하지만."
"나 어때?"
도라익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면전에 대놓고 정신 나간 여자 같다고 말할 순 없었다.
"평범하지 않은 거 같아."
"그럼 네게도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도라익은 조금 이상하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지만, 엘은 평범하지 않음을 특별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사귀자고?"
"응."
"왜?"
도라익의 반문에 엘이 또 실실 웃었다.
"왜긴.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좋고. 하는 짓 보면 나쁜 사람도 아니고."
"열 길 물속을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르잖아."
"그건 만나면서 천천히 알아보면 되지.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고."
"거절한다. 난 첫사랑이랑 결혼할 거야."
엘이 자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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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스토크시티는 홈에서 리그 16위의 선덜랜드를 맞이했다. 흰 줄과 붉은 줄이 엇갈린 비슷한 디자인의 유니폼이기에 선덜랜드는 검은색 원정 유니폼으로 등장했다.
"도우. 무슨 고민이 있어?"
"아니. 경기 시작하면 괜찮을 거야."
도라익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엘은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고, 도라익 역시 웃는 얼굴로 배웅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엘이 자주 꿈에 등장하여 도라익의 수면을 방해했다.
"11월 10일까지 경기가 7개 있어. 체력도 잘 안배하고 안 다치게 집중해."
21일 동안 7경기를 뛰어야 한다. 리그 4경기에 유로파리그 2경기, 리그컵 1경기가 스토크시티를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쇠렌센의 걱정과 달리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도라익은 빠르게 몰입했다.
- 도라익 선수의 압박에 패스 미스가 났습니다.
- 하이에나 제임스가 공을 잡고 찰리한테 패스합니다.
- 산체스가 오른쪽 측면으로 달립니다. 페어린던 선수도 늦지 않게 뒤를 따릅니다.
찰리는 모험하지 않고 페어린던한테 안전하게 패스했다. 페어린던은 원터치로 산체스에게 찌른 후, 터치라인 밖으로 달렸다.
산체스를 수비하던 선덜랜드 수비수는 터치라인 밖으로 달리는 페어린던 때문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풀백의 주의력이 페어린던한테로 잠깐 간 사이 산체스가 중앙으로 드리블했다.
풀백은 산체스 대신 페어린던을 수비하러 달려갔다.
이번 시즌 스토크시티의 공격에서 가장 활약이 큰 선수는 페어린던이다. 돌파 후 크로스는 물론 인사이드로 들어오며 수비진을 흔드는 플레이를 자주 했다.
직접적으로 관여한 골은 도라익보다 적지만, 팀의 공격 전술에 큰 지분을 차지한 선수는 틀림없고 데이터도 팀 최고로 훌륭하다.
그 바람에 찰리를 마킹하던 센터백이 달려 나왔다. 산체스는 고개를 들어 도라익 쪽을 보며 공을 앞으로 찔렀다.
산체스의 노룩 스루패스를 받은 찰리는 바로 먼 포스트로 패스했다. 급히 가까운 포스트 쪽으로 움직이던 키퍼가 양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급정지하고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도라익은 찰리가 발을 휘두를 때 이미 패스를 감지하고 앞으로 뛰었다. 찰리의 슈팅 습관을 잘 알기에 해당 위치와 자세론 슛이 안 나올 것을 확신한 덕분이다.
- 도라익 선수 공을 잡고 잠깐 고민합니다.
공을 잡은 도라익은 급해 하지 않았다. 키퍼는 감히 다가올 엄두를 못 내고, 센터백 역시 갓 몸을 돌려 첫 발자국을 뗐다.
'날 물로 봐?'
도라익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왼발 아웃프런트로 공을 강하게 찼다.
- 골! 골입니다!
- 키퍼가 오판했어요. 도라익 선수가 패스할 줄 알고 틈을 줬습니다.
도라익이 찬 공은 살짝 떠서 발목 높이로 날았다. 찰리한테 패스할 것을 더 경계하며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던 키퍼는 발을 들기도 손을 내리기도 애매한 높이의 공에 반응하지 못했다.
- 도라익 선수가 그간 도움만 기록하다 보니 키퍼가 슛을 염두에 두지 못했어요.
- 이제부터 선덜랜드 키퍼와 수비수들은 골치가 아플 겁니다. 도라익 선수의 슛과 패스를 동시에 염두에 둬야 합니다.
- 작가의말
- 내가 도우민 줄 알아? 나 도라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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