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혜성처럼 나타나 팀을 강등 위기에서 건져 올린 일, 축구협회에 선수 자격을 재등록한 일, 스토크시티와의 계약이 만료되어 자유의 몸이 된 일 등이 겹쳐 도라익은 연일 화제였다.
심지어 경기장에 나타난 아들과 엘이 쓴 선글라스 브랜드까지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
거기에 기초군사훈련을 신청하며 또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도련님, 이쪽입니다."
오창범이 말했다. 오창범 역시 도라익과 함께 기초군사훈련을 신청했는데 뉴스에 단 한 줄도 언급이 없었다.
"형, 불편하게 왜 이래."
"불편하라고 그러는 거야."
도라익이 모든 관심을 독차지한 것에 심통이 난 오창범이었다.
"그래도 댓글엔 형 얘기가 더 많잖아."
왜 도련님 얘기만 있고 머슴 얘기는 없냐는 댓글이 베스트를 먹었다. 그 밑에 오창범을 언급한 대댓글이 잔뜩 달렸다.
"그런 관심은 나도 별로야."
둘의 장난은 훈련소 대문이 보이고 끝났다. 진짜 군대로 가는 건 아니지만, 주변 분위기 때문에 둘의 얼굴도 진지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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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이 순식간에 흘렀다. 도라익은 최경호와 영상으로 통화했다.
"라익아. 내 생각에 스토크시티가 최고의 선택인 거 같아."
"진짜 형 생각이야?"
"물론, 뮐러네 회사랑 충분히 상의하고 나온 결론이지."
"솔직하게 말해. 오라는 데가 없어?"
최경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오라는 덴 많지."
"주급 20만 파운드는 못 주겠대?"
"20만 파운드가 유로로는 23만이 넘잖아."
"그러니까 못 주겠다는 거네? 내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최경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20만 파운드보다 높게 부른 곳이 있긴 있어."
"어딘데?"
"토트넘. 20만 1파운드를 불렀어."
도라익의 얼굴이 멍해졌다.
"21만 말고 20만 1파운드?"
"정식으로 오퍼한 건 아니고, 토트넘 계약 담당자가 나한테 장난삼아 한 말이야."
"계약서 내용은 셋만 아는 게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지. 설마 계약서 작성을 구단주가 직접 했을까? 확인해 봤는데 최근 그만둔 직원 두 명이 토트넘에 취직했어.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아무래도 그쪽으로 정보가 샌 거 같아."
도라익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토트넘은 2년 전 도라익의 3순위 정도 되는 구단이었다. 그런데 방금 호감이 모두 사라졌다.
"형, 8경기 10골이면 괜찮은 거 아니야?"
게다가 도움도 몇 개 있었다.
"부상 이력과 풀타임을 뛸 체력 때문에 망설이는 거 같아."
"의사가 너무 잘 아물어서 다치기 전보다 오히려 튼튼하다고 그랬어. 체력도 새로 생긴 습관 때문인데, 언젠간 해결할 거야."
"알아. 나야 알지."
"병원 진단서도 못 믿는다는 말이야?"
최경호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라익아, 내가 지금까지 네게 쓴소리 한 적이 없지?"
도라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좀 해야겠다. 너 너무 급해."
"뭐가?"
"왜 꼭 이적하려고 안달이야? 너 예전엔 안 그랬잖아."
도라익의 머리엔 여러 가지 변명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솔직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그간 축구 못 한 게 불의의 사고 때문이잖아. 사람 인생 진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리그 우승을 하고 챔피언스리그 우승도 하고 싶어. 돈도 많이 벌고 싶고."
"라익아. 우리 길게 보는 건 어때? 괜히 다른 팀에 가서 적응하느라 에너지 소모하지 말고, 스토크시티에서 편하게 기량을 끌어 올려. 네가 많은 면에서 예전보다 나아진 건 맞지만, 난 네 잠재력이 훨씬 남았다고 장담할 수 있어."
"형 얘기는 더 강한 선수가 되라는 거지?"
"되라는 게 아니라 넌 꼭 될 거야. 최대한 빨리 되기 위해선 스토크시티만 한 팀이 없어. 네가 조급해야 하는 건 좋은 팀에 가서 명예를 얻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명예인 선수가 되는 거야."
최경호의 말이 도라익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도라익은 우승이나 발롱도르 등을 목표로 잡았다. 전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기록으로 남는 것들이었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 베켄바워, 호나우두, 메시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선수.
"내가 그 정도 재능이 있을까?"
"당연하지. 난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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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넘을 비롯해 몇 개 선택지가 있었지만, 도라익은 스토크시티에 남기로 했다.
6월 25일 계약서에 사인한 도라익은 올림픽 대표팀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안녕. 난 변경태라고 해."
"알아요. 고명준 선배 10번 유니폼 받았잖아요."
"우리 잘해보자."
고명준이 은퇴하고 대표팀의 10번을 입은 변경태였다. 이미 K리그에서 3년째 뛰고 있고, 상도 여러 개 받았다.
"조영호야. 대표팀 키퍼 2선발이고, 올림픽 대표팀에선 주전이야."
키가 2미터에 육박하는 조영호였다. 프랑스 2부리그에서 뛰고 있는데, 주전은 아니어도 출전 기회를 꽤 얻은 유망주였다.
"반가워요."
둘이 형이고 올림픽 대표팀 선배지만, 대표팀에선 또 도라익이 선배다. 다행히 변경태와 조영호 둘 다 성격이 활달한 편이어서 셋은 금세 친해졌다.
"새 감독님은 어떤 스타일의 선수를 좋아해?"
변경태는 교체로라도 자주 출전하지만, 조영호는 아니었다. 변경태 역시 확고한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도라익의 대답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똑똑한 선수를 좋아해요. 뭔가 알려줬을 때 빨리 캐치하고 해내는 그런 선수요."
프리미어리그 팀은 25명 선수를 명단에 올릴 수 있고, 리저브나 유스에 있는 유망주까지 합치면 서른이 넘는다.
당연히 감독 입장에서 말귀를 잘 알아듣는 선수를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 한다.
"그리고 자기 철학이 있는 사람을 좋아해요. 틀리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방향이 있다면 움직일 동력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방향이야 고쳐주면 되니까 움직일 생각이 없는 사람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컨셉이 확고해야 한다는 말이네?"
조영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컨셉 얘기가 아니잖아. 결국엔 똑똑해야 한다는 말이야."
변경태의 핀잔에 조영호가 근심에 잠겼다.
"나 수학 진짜 못했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도라익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상황에 슈팅했어요. 그럼 알론소가 물어볼 거예요. 왜 패스를 안 하고 돌파도 안 하고 슈팅했냐고. 그럼 저는 패스를 안 한 이유, 돌파를 안 한 이유, 슈팅한 이유를 설명해야 해요."
둘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도라익의 말에 집중했다.
"이때 내 대답이 맞는지 틀리는지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확실한 기준으로 패스와 드리블 대신 슈팅을 선택했다는 게 중요해요. 틀린 생각은 방향을 바꿔주면 되지만, 생각이 없는 사람은 답이 없거든요."
"아놔, 나 생각 없다는 소리 많이 듣는데."
조영호가 탄식했다.
"형은 왜 프랑스를 골랐어요?"
도라익이 질문했다.
조영호의 피지컬은 유럽에서도 흔하지 않다. 키만 큰 게 아니라 팔이 길고 손이 크고 손가락도 굵다. 게다가 악력 역시 대단했다. 탐내는 팀이 한둘이 아니었을 거다.
"오라는 팀 중에서 거기가 돈 제일 많이 줬거든. 감독이 출전 자주 시켜준다고 약속도 했고."
"이렇게 솔직하게 대답하면 돼요. 괜히 꾸며서 말하면 인상이 나빠질 뿐이에요. 대화가 끝나고 마지막에 알론소가 형한테 뭔가를 묻거나 혹은 알려줄 거예요. 묻는 건 형이 아직 생각이 서지 않은 부분이고, 알려주는 건 형 생각이 틀렸거나 부족하다는 뜻이에요."
"물어본 건 답을 고민하고 알려주는 건 그대로 하면 되겠네?"
변경태가 말했다.
"아니죠. 알려주는 건 먼저 생각해 보고, 아닌 것 같으면 찾아가서 아닌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해야죠. 맞는 것 같으면 일단 해보고, 하다가 아닌 것 같으면 또 찾아가서 말하고."
"감독님 막 찾아가도 돼?"
"그게 왜요?"
"귀찮아하시지 않을까?"
"알론소는 선수한테 조언하고 반응을 지켜보는 걸 좋아해요."
'변태는 아니겠지?'
변경태와 조영호는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라익아, 감독님이 널 부르셔."
알론소의 방에서 나온 선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라익을 불렀다.
"야, 어때?"
"말도 마. 물 세 병이나 마셨어. 내가 평소 생각해 보지 않은 것만 골라서 묻는 기분이야."
알론소의 방에 들어간 도라익이 3분도 안 되어 나왔다.
"왜 넌 이렇게 빠른데?"
"시차 적응 묻고, 음식이 입에 맞는지 묻고, 아들 건강하냐고 묻고."
"아, 너 아들 있구나."
선수들이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처음 도라익을 만나기 전에 다들 떨렸다. 누구는 평생 못 할 일을 10대에 이룩했고, 실력도 이미지도 넘사벽이다.
그런데 정작 만나고 보니 착하고 순한 동생이었다. 그리고 또래들보다 순수하기까지 했다.
그 탓에 선수들은 누구도 도라익이 애 아빠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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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익 선수, 올림픽 경기에 참가하게 된 소감 부탁드립니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도라익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이 나이에 팀 막내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스토크시티에서도 막내 아닌가요?"
"아닌데요. 네이선이 4월 생일인데요. 전 빠른이거든요."
도라익이 발끈했다.
"막내면 뭐가 불편한가요?"
"훈련 끝나고 코치님들 도와 훈련장 정리를 해야 해요. 밥 먹을 때도 줄 제일 마지막에 서야 하고, 내기라도 하면 심부름은 꼭 제가 해요."
"감독님께 건의해서 이런 문화를 바꿀 생각은 없나요?"
"감독님 지시인데요.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른다면서요."
"항의할 생각은 안 했나요?"
"항의해서 투표했는데, 반대표가 딱 1개 나왔어요. 저 빼고 다 한통속이에요."
도라익의 귀여운 투정 덕분에 분위기가 좋았다. 이어서 인터뷰 받은 선수들도 편하게 대답하면서 분량이 충분히 나왔다.
"되게 중요한 질문인데요. 이번 올림픽 대표팀은 와일드카드를 안 썼는데요. 혹시 불안하거나 하지 않나요?"
아시안컵 우승을 하면서 웬만한 선수는 면제를 받았다. 올림픽 차출은 구단 허락이 필요하기에 차 협회장은 아예 와일드카드를 안 쓰기로 했다.
실력이 확실한 선수 아니면 오히려 팀 무드를 망칠 수 있다는 판단이기도 하고, 젊은 선수들이 군 면제를 받아 유럽 진출이 원활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다 제 탓이 아니겠습니까."
도라익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하도 잘하니까 귀찮게 와일드카드 안 쓴 거죠."
선수들이 엄지를 아래로 하며 '우' 비난을 쏟았다.
- 작가의말
PD : 도라익 선수 예능감 좋네요.
도라익 : ‘진심만 말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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