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과정
산체스와 함께 이적한 카메론 맥자넷과 티보 페어린덴이 도라익의 훈련 클럽에 합류했다.
구성원이 여섯이 되며 복잡한 전술 훈련도 할 수 있었다. 마당이 그렇게 넓은 건 아니지만, 전술 훈련은 공 없이도 할 수 있기에 잔디가 없는 부분까지 활용하면 된다.
덕분에 도라익은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4연패의 수렁에 빠진 스토크시티, 이대로 좋은가.]
[3경기 연속 무득점, 화력이 전무한 스토크시티.]
[톰 인스 이적 후 3경기 1골 3도움으로 맹활약.]
[산체스의 영입에 느끼는 의문점 세 가지.]
영국 언론들이 스토크시티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거품이 걷어지는 도라익, 프리미어리그에 어울리는 선수인가.]
[축구계 원로의 일침 - 도라익 욕심 버리고 하위 리그부터 차근차근 단계 밟았어야.]
[스토스시티의 구차한 변명 - 그저 변화하는 과정일 뿐.]
[남은 경기는 10, 뒤처진 점수는 9. 뒤집기 가능성 1%.]
한국 언론도 도라익을 매섭게 때렸다.
"도라익 선수한테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요?"
스포츠 프로그램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라익을 물어뜯는 행렬에 합류했다. 어차피 이들에겐 시청률만이 절대적 가치니까.
"애당초 프리미어리그에 어울리는 선수가 아니었죠."
김상현이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맞은편엔 갓 초상 치른 얼굴을 한 오태범이 인상을 찌푸린 채 김상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시면요. 2월 10일 원정 경기에서 블랙번에 0:1로 패배했어요. 2월 14일 홈 경기에서 리그 꼴찌인 왓포드한테 또 0:1 패배를 당했죠. 그리고 2월 23일엔 20점 동점으로 19위를 차지한 찰턴에게 0:4 패배를 당하면서 리그 19위로 추락했어요. 17위의 위건과는 9점 차이로 벌어졌고 꼴찌인 왓포드보다 고작 1점 많아요."
"블랙번과 왓포드하고 펼친 경기는 조금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김상현이 급히 끼어들어 항변했다.
"상대가 넣은 골은 주심에 따라 반칙이 선언될 수도 있는 위험한 슈팅이었습니다. 그리고 스토크시티가 넣은 골이 모두 세 개나 취소되었습니다."
"그럼 논란의 장면들을 영상으로 보겠습니다."
최근 3경기에 논란이 되는 장면들이 재생됐다.
하나는 제임스의 오버헤드킥인데, 상대를 다치게 하는 위험한 동작이라고 하여 골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같은 경기는 아니어도 바로 전 경기에서 비슷한 오버헤드킥으로 블랙번에 실점하여 패배를 기록한 스토크시티 입장에선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상황이었다.
도라익의 골 하나 역시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던 샘 앨런이 키퍼의 시야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취소되었고, 찰리 아담의 헤딩골은 점프할 때 팔로 수비수를 눌렀다며 반칙을 선언했다.
"찰턴 상대로 한 0:4 패배는 할 말이 없겠죠? 상대를 가둬 놓고 신나게 두드리던 상황에 다섯 번의 반격을 당했고 네 골을 먹었으니깐요."
오태범은 김상현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오태범 평론께선 도라익 선수한테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봅니까?"
"도라익 선수는 데뷔전에 3골 1도움을 기록했고, 두 번째 경기인 아시안컵 결승에선 2골로 팀의 우승을 견인했습니다. 게다가 프리미어리그 데뷔전 역시 3골 1도움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였고, 리그컵 준결승에선 레드카드 두 장을 유발하며 팀의 결승 진출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말하다 보니 목이 메어 김상현은 음료를 마시려 했다. 그러나 생방송 녹화 내내 물만 먹다 보니 음료 통이 어느새 비어 있었다.
"최근 3경기는 무득점인 대신 모두 교체 없이 풀타임을 뛰었습니다. 이는 윌슨 감독이 전술 변화를 시도하면서 도라익이 빨리 전술에 적응하기를 바라면서 일어진 일입니다."
"윌슨 감독이 패배 후 인터뷰에서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댄 핑계를 그대로 믿는 건가요?"
김상현이 불쑥 끼어들어 비웃음을 날렸다.
"김상현 평론은 직접 분석하지 않고 인터뷰로 판단하나 봅니다. 저는 3경기 모두 자세히 분석했고, 확실히 스토크시티의 전술에 변화가 생겼음을 확인했는데 말입니다."
상대가 김상현이라면 가위바위보도 지고 싶지 않은 게 오태범의 지금 심정이다.
"잠깐만요. 리그컵 결승 출전 명단이 나왔다고 합니다. 같이 화면 보시죠."
대형 스크린에 양 팀 출전 명단이 떴다. 스토크시티의 선발 명단에서 18번을 확인한 김상현과 오태범 모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김상현은 도라익이 선발에서 제외될 거라고 미리 악담을 퍼부었기에 실망에 찌푸렸고, 오태범은 또 물어뜯길 도라익이 걱정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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웸블리 스타디움.
아스널과 스토크시티의 리그컵 결승전이 코앞에 왔다.
벵거의 퇴임 이후 한동안 방황하던 아스널은 다시 예전의 위용을 회복했다. 연속 3시즌 리그 4위를 차지하며 제2의 안정기를 맞이했다.
3년 사이에 FA컵 우승을 한 번 거머쥐고 커뮤니티 실드에서도 한 번 승리했다.
그러나 올 시즌 첼시가 맨유와 우승 경쟁을 하는 바람에 리그컵을 반드시 노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아스널과 토트넘 그리고 첼시 세 구단이 런던 지역에서 벌이는 팬 쟁탈전은 세상 어디보다 치열하다.
"우린 최근 세 경기를 모두 패했다."
윌슨 감독이 대기실에서 연설했다.
"그러나 경기 결과를 떠나 우리의 변화가 긍정적인 방향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가장 잘 안다. 우린 한 달 동안 계속 강해졌다."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찰턴과의 경기에서 대량으로 실점했지만, 그건 상대가 운이 좋아서였다. 수비가 전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공격 기회도 훨씬 늘고 위협적인 슈팅도 많았다.
"오늘은 그간 우리가 익힌 전술을 점검하는 날이다. 허약한 런던 아가씨들을 쓰러뜨리러 가자."
연설을 마친 감독은 스텝과 벤치 선수들을 데리고 먼저 나갔다. 이제부턴 버틀랜드의 시간이다.
"우선 도우. 한 달 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도라익은 오른 주먹으로 왼쪽 가슴의 엠블럼을 툭툭 쳤다.
"산체스. 네 덕분에 수비진의 부담이 많이 줄었어."
산체스가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남미 출신답지 않게 부끄럼쟁이다.
"제임스. 수비 좀 더 열심히 해."
"내가 축구에 전념하려고 여자친구랑 헤어졌잖아."
"샘 앨런. 네 덕분에 왼쪽 수비는 늘 든든했어."
"내가 이 팀의 기둥이잖아."
"찰리. 오늘 꼭 골을 넣어 네 가치를 증명해."
찰리 아담은 아스널 유스 출신이다. 19살 때 재계약에 실패하고 스토크시티와 계약했고, 20살에 팀 주전이 되었다. 21살인 지금은 대표팀 주전을 노리는 선수다.
"그리고 이 자리엔 없지만, 20년 동안 팀을 위해 헌신한 캠벨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크다."
후보인 캠벨은 감독과 코치랑 함께 먼저 벤치로 가 있었다.
"우리 팀 역사상 유일한 우승컵은 런던 구단을 상대로 얻었다. 첼시만 이기고 아스널을 안 이기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닐까?"
"캡틴, 할 말이 있어."
경기 시간이 다가오자 조급해진 도라익이 불쑥 끼어들었다.
"병원에서 잭이라는 아이를 만났어. 그리고 약속했어. 스토크시티가 우승하면 잭도 병마와 싸워 이길 거라고."
선수들 얼굴이 엄숙해졌다.
"난 세상의 모든 아이는 어른이 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 권리의 행사에 우리가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참 좋은 일이 아닐까?"
"좋아. 구단과 팬을 위하여. 특별히 잭을 위하여."
"화이팅!"
구호를 우렁차게 외친 버틀랜드는 선수들을 인솔해 밖으로 나갔다. 아스널 선수들은 이미 와서 줄 서 있었다.
비장한 표정의 스토크시티 선수들과 달리 아스널 선수들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가벼운 얼굴이었다.
매번 반복하던 행사를 기계적으로 끝내니 금세 경기가 시작됐다. 휘슬이 울리고 볼이 움직이자 도라익은 전속력으로 공을 잡은 선수를 향해 달려갔다.
공을 잡은 아스널 수미는 패스 대신 발재간을 부려 도라익을 희롱하려 했다. 초반의 압박을 가볍게 벗겨내면 스토크시티의 기세를 단번에 죽일 수 있을 거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라익은 공에 집착하지 않고 어깨싸움을 걸었다.
도라익은 키가 큰 덕분에 어깨싸움에 체중을 더 많이 실었다. 아스널의 수미가 최대한 버텼지만, 힘 차이가 예상보다 훨씬 컸다.
도라익은 아스널 선수를 어깨로 밀어 넘어뜨리고 공을 뺐다. 바닥에 쓰러진 아스널 선수가 팔을 들어 반칙을 주장했지만, 주심은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공을 잡은 도라익이 앞으로 나가자 바로 미드필더 한 명이 와서 공을 가로채려 했다.
공을 연속 세 번 꺾는 것으로 상대 중심을 흔든 도라익은 가랑이로 공을 뺀 후 손으로 아스널 선수의 오른쪽 어깨를 밀었다.
마찬가지로 손을 내밀어 도라익을 잡으려던 선수는 중심을 잃고 허공에 헛손질했다.
그사이 상대 선수를 스치고 지나간 도라익은 센터백이 붙기 전에 슈팅을 날렸다. 강하게 찬 공은 아쉽게도 아스널 키퍼가 양손으로 잡았다.
슈팅 경로가 너무 뻔해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도라익의 투지 덕분에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불타올랐다. 스토크시티의 육체파들은 기술이 뛰어난 대신 파워가 부족한 편인 아스널 선수들 상대로 몸싸움을 빈번하게 걸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윌슨 감독이 격동한 나머지 드물게 큰소리로 외쳤다.
198의 찰리 아담이 포워드로 딱 버티고 있고, 전술 이해를 빼면 부족한 면이 그다지 없는 도라익이 프리롤로 뛰었다.
거기에 원래부터 반쯤은 미친놈인 제임스가 중앙에서 날뛰니 아스널의 화려한 패스가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속도도 빠르고 기술도 좋은 산체스와 샘 앨런이 양쪽에서 상대 풀백을 견제하니 리그 3위와 리그 19위의 경기라고 볼 수 없는 용호상박의 대결이 펼쳐졌다.
"샘!"
샘 앨런과 2주장인 샘 클루카스가 동시에 반응했다. 제임스의 공은 앨런에게 향했다.
공을 잡은 샘 앨런은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드리블과 교묘한 속임수로 아스널의 오른쪽 풀백을 제쳤다. 그리고 조금 낮은 크로스를 올렸다.
찰리 아담이 198의 신장 우위를 전혀 발휘할 수 없는 크로스다. 더구나 찰리 아담은 먼 포스트에 자리를 잡았다. 가까운 포스트에 아스널의 오른쪽 센터백이 있어 이번 공격은 무위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그때. 가까운 포스트에 느닷없이 도라익이 나타났다. 도라익이 높이 점프하자 아스널 수비수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찰리 아담이면 점프 없이 제자리에서 헤딩할 수 있는 공이다. 도라익처럼 높이 점프하면 머리에 공을 맞힐 수 없다.
아스널 수비수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러나 도라익도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건 아니다. 먼저 점프한 도라익은 상체를 최대한 뒤로 젖혔다.
도라익의 가슴에 스친 공이 통 튀면서 큰 포물선을 그리며 먼 포스트 쪽으로 갔다. 찰리 아담이 팔을 올려 팔꿈치를 세우며 수비수의 접근을 막고 높이 점프했다.
도라익의 가슴을 맞고 굴절한 공이 급하게 점프한 키퍼의 손가락을 넘은 후 찰리 아담의 옆 통수와 충돌했다. 고작 골대와 1m도 안 되는 거린데, 아쉽게도 공이 크로스바에 맞았다.
착지한 골키퍼와 아스널 수비수 두 명이 득달같이 달려갔다. 동시에 어느새 달려온 제임스도 공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넷은 누구도 공의 제어권을 확실히 확보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당탕하는 사이 흘러나간 공이 찰리 아담의 발밑에 갔다.
길이가 1m 넘은 굵은 다리가 강하게 휘둘러졌다. 도라익은 찰리의 발에 챈 공이 폭죽처럼 터지는 환상을 봤다.
- 작가의말
고구마는 짧게. 골 하나 못 넣고 내리 진 3경기는 몇 줄로 스쳐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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