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하라 스토크시티
3월 15일.
- 도우. 날 걱정한 건가?
홈에서 블랙번을 맞이한 경기에서 스토크시티는 2:1 승리를 거뒀다. 코너킥 기회에 찰리 아담과 레체르트가 한 골씩 넣으며 0:1이던 점수를 뒤집었다.
도라익은 경기 내내 혼이 반쯤 빠진 사람처럼 아무것도 못 하고 후반 60분에 교체되었다.
-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
- 스트레스로 쓰러진 거야. 심장 때문이 아니고. 물론, 자네처럼 심장이 큰 사람이라면 안 쓰러지고 직접 운전해서 병원까지 갔겠지.
- 언제 돌아옵니까?
- 4월 말에 수술이 잡혔네. 심장을 수술하는 게 아니고 기기를 교체하는 거야. 사실 그대로 둬도 절로 깰 수 있었는데 싸구려 기기가 경보를 보내는 바람에 일이 커졌어.
심장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스트레스로 심장 기능이 약화되었다. 스트레스성 빈혈인데, 심장이 원래부터 약하다 보니 기절까지 간 것이다.
- 돌아오는 겁니까?
나이가 어려 세상 물정에 어둡지만, 팔팔하게 살아있는 감이 뭔가를 자꾸 경고했다.
- 의사 소견이 필요한 일이야. 내 심장이 세계 최고의 리그와 함께 뛸 만큼 건강한지 정밀검사를 받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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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스토크시티는 포르투갈 북부의 아름다운 도시 포르투에서 유로파리그 토너먼트 2라운드의 원정 경기를 펼쳤다.
"주심. 저기 6번이 자꾸 만집니다."
"미안. 그런 일엔 나도 개입할 명분이 부족해."
"성적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도라익의 성추행 고발은 쓸모가 없었다. 본인의 주장이 일관되고 수치심을 느꼈음을 확실히 밝혔지만, 심판은 성적인 부분에 꽤 관대해 보였다.
도라익은 슬그머니 다가와 몸을 비비는 상대 선수를 살짝 밀었다. 도라익의 손에 밀린 선수가 벌러덩 넘어져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차피 VAR이 있어 안 먹히는 수작이다. 그러나 홈팬들의 거센 야유와 포르투 선수들의 비난에 도라익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에드워즈가 다가왔다.
"도우, 내가 곧 해결할 테니 꾹 참아."
통칭 손장난으로 불리는 야비한 수법에 도라익도 안 당해본 건 아니다. 일단 관종 오창범 선생이 이쪽 계열 달인이다. 이게 칭찬받을 일이었다면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을지도 모른다.
프리미어리그에도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도라익을 상대로 장난을 친 선수들이 적지 않았으나 도라익이 흔들리지 않자 곧 그만뒀다. 그리고 포르투의 6번처럼 손으로 엉덩이를 만지거나 몸을 비벼대는 선 넘는 수작을 부리는 선수는 없었다.
"샘, 우리 전술에 확실히 문제 있지?"
감독 대행이 된 수석 코치가 클루카스한테 말했다.
"도우와 찰리 중 하나만 묶여도 공격이 원활하지 못합니다."
"맞아. 도우나 찰리 하나만 있어도 되고 둘 다 있으면 좋은 전술이 아니라 하나만 없어도 위력이 낮아지는 전술이야."
"미스터 윌슨은 왜 전술을 이렇게 짰을까요?"
"우승컵 때문이야. 안정적인 전술보다는 위력이 강한 전술이 필요하니까."
윌슨은 올 시즌에도 뭔가 우승컵 하나 들어 올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도라익이 조별 경기에서 15골 1도움을 달성하는 모습에 전술 보완을 안 하고 시즌 초기의 전술 그대로 밀어붙였다.
합이 맞으면 어떤 팀도 이길 수 있는 대단한 전술이고, 도라익과 찰리 모두 몇 경기만 제외하면 평균 이상의 컨디션을 보였다.
그러나 윌슨이 쓰러지며 도라익을 비롯한 몇몇 선수가 심적으로 흔들리는 바람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약점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클루카스. 지금 와서 전술을 수정하는 건 어렵겠지?"
"그럼요. 하려면 2월에 했어야죠."
"그럼 지금 도라익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제가 출전했다면 6번 귀를 혀로 핥았을 겁니다."
수석 코치가 껄껄 웃었다. 그리고 내심 클루카스의 은퇴가 아쉬웠다. 클루카스가 1년만 더 팀에 남아 도라익을 가르쳤다면 맹수의 이빨이 더 날카롭게 자라고 발톱도 훨씬 단단했을 것이다.
"제가 아니어도 에드워즈가 있고 리엄이 있고 대니가 있습니다. 스토크시티의 정신은 여전히 그라운드에 남아있죠."
수석 코치는 곧 클루카스의 의미를 알아챘다.
- 산토스 선수 얼굴이 피로 낭자합니다.
- 조금 낮은 공을 에드워즈 선수는 발을 들었고 산토스 선수는 머리를 들이밀었습니다.
- 에드워즈 선수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상대는 머리고 에드워즈 선수는 발이지만, 충돌 이후 허리부터 떨어졌습니다.
주심은 산토스에게 그라운드 밖으로 나가 지혈하라고 손짓한 뒤 에드워즈한테 옐로카드를 제시했다.
홈팬들이 야유와 욕설로 거세게 항의했다.
심판이 카드를 주머니에 넣자마자 에드워즈가 벌떡 일어났다. 주심의 동정을 사려고 아픈 척했던 거였고, 연기를 중단하고 바로 일어난 건 상대 팀 선수와 홈팬을 도발하려는 목적이다.
"에드워즈를 교체해야 할 것 같은데요."
"상대 팀 보복을 걱정하는 건가?"
"아니요. 에드워즈가 작정한 것 같습니다. 이미 옐로카드 한 장 받은 상황에 상대 팀 선수 한 명을 끌어들여 같이 퇴장할지도 모릅니다."
에드워즈가 다가와서 항의하는 상대 팀 선수들을 삐딱한 자세로 도발했다. 도라익으로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정신 차리자. 팀 분위기를 살려야 할 주장이란 놈이 서리 맞은 배추처럼 시들해서 어쩌자는 거야.'
모든 게 순조로운 상황에 윌슨이 쓰러졌다면 애석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을망정 이토록 흔들리진 않았을 것이다. 윌슨이 쓰러진 건 단지 도화선일 뿐이고, 도라익은 팀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음을 은연중에 느낀 탓에 여태껏 정신을 못 차렸다.
"지금 에드워즈를 교체하면 팀 사기가 엉망이 될 것 같은데."
"하긴. 6번이 붕대를 감고 다시 출전 준비를 하는데 에드워즈가 교체되면 우리만 우습겠네요."
상처가 길어 피가 많이 흘렀지만, 깊이가 얕고 경기에 영향을 주는 부위도 아니다. 6번이 붕대를 두껍게 감고 다시 출전하려고 하자 홈팬들이 발을 구르고 고함을 지르며 야단법석이었다.
'앨런의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문득 이틀 전 중뿔나게 전화해서 도라익이 모르는 스토크시티의 예전 얘기를 늘어놓던 샘 앨런의 의도가 불현듯 이해됐다.
"자자. 오늘 우린 스토크시티의 방식으로 경기한다."
손뼉으로 선수들의 주의를 끈 도라익이 외쳤다.
"스토크시티의 사나이들은 싸움에서 물러나는 법이 없지."
대니와 리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임스 역시 입맛을 다시며 수아레즈를 닮은 표정을 지었다. 상대 선수들과 언쟁을 벌이던 에드워즈 역시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스페인에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냈지만, 아일랜드의 거친 바다를 보며 자란 선장의 아들 맥자넷이 어깨에 힘을 줬다.
"도우. 널 알고 가장 마음에 드는 멘트였어."
원래부터 쌈닭 기질이 강한 루이스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도라익의 눈빛이 거세게 거세게 타올랐고 선수들의 분위기는 뜨겁게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라익은 붕대를 감고 출전한 6번 산토스가 엉덩이를 만지자 몸을 돌려버렸다.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에 물컹한 게 닿자 산토스가 기겁하며 뒷걸음쳤다. 도라익은 그런 산토스를 열흘 굶주린 범과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절대 물러서지 마라!"
공중볼 경합이 있을 때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공을 차지하기보단 몸을 부딪치는 데 열중했다.
난 다쳐도 좋아. 그런데 네가 더 다칠 거야.
스토크시티의 태도는 명확했다.
충돌로 제대로 착지하지 못할 경우 발이나 발목 그리고 무릎 부상의 위험이 크고 잘못 넘어지면 팔이 부러질 수도 있다.
- 분위기가 뒤집혔습니다.
- 이건 마치 스토크시티가 홈 경기를 펼치는 양상입니다.
- 홈팬들의 응원이 원정팀을 위한 것 같은 착각이 드네요.
점잖은 산체스마저 분위기에 동화되어 몸싸움을 빈번하게 벌였다. 찰리 역시 체력을 아끼지 않고 긴 다리로 겅중겅중 뛰며 공을 잡은 수비수들을 덮쳤다.
점차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경기 승패를 잊었다. 우리가 공을 잡으면 상대 골대에 넣을 생각만 하고, 상대가 공을 잡으면 어떻게든 빼앗을 생각을 떠올렸다.
팀 전체가 하나의 생각으로 뛰니 윌슨이 구상했던 최대의 위력이 나왔다.
- 도라익 선수, 질풍같이 달립니다.
- 바람이 도라익 선수를 힘겹게 따라가네요.
공을 잡은 도라익은 바로 산체스에게 패스했다. 산체스는 중앙으로 조금 드리블하다가 오른쪽 측면에 공을 보냈다.
- 찰리 아덤 선수가 크로스를 올립니다.
오른쪽으로 간 찰리가 공을 받아 잠깐 조정한 후 크로스를 올렸다.
의외의 상황이다. 보통은 산체스나 제임스가 에드워즈를 지원해 오른쪽으로 갔다.
- 골! 골이에요!
- 도라익 선수 날았습니다.
- 점프력이 더 강해진 느낌입니다.
찰리의 다소 느리고 높은 공에 수비수들은 키퍼가 나와서 처리하라고 자리를 비켜줬다. 그 덕분에 도라익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편하게 점프했고 키퍼가 달려 나오며 비워진 골대로 어려움 없이 공을 집어넣었다.
- 도라익 선수가 달려오는 선수들을 진정시킵니다.
- 오랜만입니다. 침묵 세리머니가 나왔습니다.
세리머니가 없었지만,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경기장을 질주하는 세리머니를 벌인 것보다 훨씬 흥분하고 격동했다.
-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 뭔가 달라진 게 화면을 뚫고 느껴집니다.
- 처음엔 맹수끼리 영역을 다투는 싸움이었는데 이젠 사냥 축제로 바뀌었습니다. 스토크시티가 맹수이고 포르투는 사냥감입니다.
- 스토크시티는 이길지 질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멋지게 이길지만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보름 정도 답답했던 분위기에 화룡점정으로 윌슨이 쓰러졌다. 포르투와 벌인 원정 경기를 계기로 그간 억눌렸던 것들이 한꺼번에 분출되었고, 도라익이 적절하게 유도한 덕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 후반 68분. 오창범 선수가 다리를 다친 에드워즈 선수를 교체하며 스토크시티에서 데뷔전을 치릅니다.
88분에 산체스가 만든 페널티킥을 찰리가 넣었다. 그리고 93분에 코너킥에 실점하며 점수가 2:1이 되었다.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2:1로 승리한 스토크시티가 유로파리그 8강에 합류했다.
- 이 승리는 단지 유로파리그 8강 진출이 아닙니다. 스토크시티와 도라익 선수는 뭔가 더 대단한 걸 얻어갔습니다.
- 작가의말
성에 관대한 주심 탓에 승리를 위해 고추를 내준 도라익. 우린 그의 위대한 희생을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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