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
"장담컨대 도라익은 이번 여름에 이적하지 못해요."
그러나 확신에 찬 발언 내용과 달리 표정과 말투는 그렇지 않았다. 철천지원수보다 조금 나은 사이인 오태범이 안쓰럽게 생각할 정도로 김상현의 발악은 애처로웠다.
"우선 맨유는 당연히 아니에요. 베르딩요를 영입하느라 엄청난 이적료를 썼을 뿐만 아니라 젊은 선수 셋을 바르사에 넘겼어요. 그 탓에 아직도 세대교체를 못 하고 있죠."
세대교체는 노장이 갑자기 사라지고 젊은 선수가 '짠' 하고 나타나 그 자리를 차지하는 방식이 아니다. 노장들이 벤치로 물러나는 동시에 경기와 훈련 중에 팀을 주도하던 역할을 하나씩 내려놓는 걸 말한다.
즉, 세대교체가 시작되어도 맨유의 노장 중 일부는 여전히 팀에 남아 고액의 연봉을 받는다. 그렇기에 베르딩요를 팔지 않는 한 맨유는 도라익을 영입할 여력이 전혀 없다.
유일한 방법은 베르딩요를 영입할 때처럼 선수를 얹어주는 거로 이적료를 깎는 방법밖에 없는데, 노장은 스토크시티가 주급을 감당하지 못하고 젊은 선수를 더 주면 세대교체가 또 밀린다.
"그럼 맨시티는요?"
"맨시티도 불가능해요. 맨시티는 몇 년 동안 공을 들여 팀을 구축했어요. 연령 구조도 합리적이고 모든 위치에 필요한 선수가 있어요. 만약 도라익을 영입하려면 주전을 내보내야 하는데, 맨시티를 떠나고 싶은 선수는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맨시티의 문제는 득점력이다. 공격수와 미드필더 모두 득점도 되고 패스도 되는 다재다능한 선수들인데, 확실한 득점자가 없다.
그런 면에서 도라익이 보여준 모습은 확실히 구미가 당길 만하다.
그러나 역시 재정 문제로 도라익을 영입하기 힘들다. 맨유보다 가능성이 훨씬 크긴 한데, 다른 팀들의 방해까지 있어 도라익을 영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리버풀 역시 도라익 선수를 영입하지 않을 거예요. 리버풀의 약한 고리는 키퍼와 센터백이니깐요."
킥 앤 러시의 리버풀. 도라익처럼 빠르고 드리블과 슈팅 능력이 좋은 선수를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도라익과 함께 실버 슈즈를 얻은 다칸이 있고, 남은 공격수들도 자기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도라익을 준다면 감사하다고 넙죽 절하며 받겠지만, 도라익의 영입에 목을 맬 정도는 아니다. 리버풀에 시급한 건 공격 비중이 훨씬 큰 두 풀백의 수비 공백을 잘 메꿔줄 개인 능력이 출중한 센터백, 그리고 수비 지휘에 능하고 높은 공 수비가 뛰어난 키퍼다.
"아스널은 고민할 필요도 없겠죠."
아스널은 도라익과 계약 협상을 벌여 두 번이나 실패한 팀이다. 도라익의 활약 때문에 당시 계약을 담당했던 직원들의 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 어쩌면 거북이보다 더 오래 살지도 모른다.
게다가 갓 끝난 시즌에 생긴 원한까지 해서 이적할 가능성이 다른 팀보다 현저히 작다.
"첼시 역시 도라익이 필요치 않습니다. 차라리 찰리 아담이라면 모를까."
첼시는 공격이 측면에 집중된 팀이다. 중앙에서 주로 활동하는 도라익과는 맞지 않는다.
세브첸코나 토레스 등 득점력으로 유명하던 공격수들이 첼시로 가서 어떻게 몰락했는지 생각하면 판단이 쉽다.
마라도나의 가르침을 받아 프리킥으로 유명한 지안프랑코 졸라나 벨기에의 아자르 등 첼시에서 성공한 선수를 보면 도라익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이 두 선수 모두 측면에서 활동하기 좋아했다는 걸 생각하면 크게 기대할 바는 아니다.
"토트넘은 어떨까요?"
도라익을 영입할 가능성이 있는 팀은 토트넘밖에 안 남았다. 에버턴은 2시즌 연속 꽤 큰 지출을 했기에 이번 시즌은 큰 변동이 없을 예정이다.
반면, 선수와 감독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버틴 토트넘은 자금 상황이 꽤 좋은 편이다.
"아마 많은 국내 팬들은 도라익 선수가 토트넘에 가길 바랄 거예요. 지금이야 스토크시티 팬이 1위지만, 그 전엔 토트넘과 맨유가 훨씬 많았거든요. 그러나 토트넘 역시 도라익 선수를 영입하기 어려워요."
토트넘은 이적료를 짜낼 정도는 된다. 그러나 도라익에게 높은 주급을 주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토트넘은 챔피언스리그 출전 자격이 없기에 도라익의 고려 범위가 아니다.
따져보면 프리미어리그 팀 중엔 그나마 맨시티가 가능성이 있다.
"그럼 이젠 스페인으로 가보겠습니다."
진행자가 오태범에게 눈짓했다.
"저도 도라익 선수가 프리미어리그 팀으로 이적하는 덴 회의적입니다. 같은 리그로 이적할 땐 이적료를 좀 더 비싸게 받는 게 관행이거든요. 스토크시티가 리그 우승이나 챔피언스리그 자격을 노리는 팀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붙은 이적료가 부담이 될 겁니다."
"스페인 팀들은 재정 상황이 괜찮나요?"
"그럼요. 우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보겠습니다."
굳이 회계 업무를 몰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제작된 도표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수익과 지출이 천만 유로 단위로 적혔다.
"도라익을 영입하려는 구단 중에서 재정 상황이 가장 좋습니다. 더구나 도라익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서 굳이 기존 선수를 내보낼 필요가 없다는 점이 호재입니다. 새로운 선수의 영입을 위해 누군가가 떠난다면 팀 단합에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니깐요."
"확실히 그렇네요. 진행자가 한 명 느는 건 괜찮지만, 새로운 진행자가 절 교체하면 시청자들이 많이 불편해할 것 같습니다."
진행자의 재치에 방청객들이 폭소했다.
"그런 면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최고의 선택입니다. 더구나 유수의 공격수를 키운 대단한 구단 아니겠습니까? 아틀레티코 공격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영입한다고 해서 '아묻따'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였죠."
"오태범 평론은 도라익 선수가 아틀레티코로 이적하길 바라나요?"
"물론 팬으로서 저도 도라익 선수가 레알이나 바르사에서 뛰길 바랍니다. 그러나 축구 평론가로선 아틀레티코가 최고의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틀레티코는 축구 스타일이 스토크시티와 비슷한 점이 꽤 있어서 적응도 쉽습니다. 그리고 레알과 바르사라는 강한 적수가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솔직히 우리 대표팀이 토너먼트 진출을 장담할 정도의 강팀은 아니잖아요. 레알이나 바르사처럼 강한 상대와 경기하면 대표팀에서 도라익 선수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훨씬 잘 이해하지 않겠습니까?"
"오태범 평론은 선수뿐이 아니라 대표팀 걱정까지 하시네요. 그 마음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아틀레티코는 잠시 잊으시고, 같은 도시의 팀 레알 마드리드는 어떤가요?"
"레알 마드리드는 재정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팀에 선수가 넘치니깐요. 맨시티는 그래도 자기 스타일에 맞는 선수를 엄선해서 영입했지만, 마드리드는 그런 면에서 좀 더 충동구매가 심했다고 할까요."
"가능성이 작다고 봅니까?"
"그건 아닙니다. 솔직히 레알 마드리드는 다른 팀들과 다릅니다. 스페인 황실이 뒤에 버티고 있기 때문에 무리하면 도라익 선수를 영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도라익 선수가 레알 마드리드로 가는 게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라익 선수 개인에게 좋지 않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레알 마드리드는 선수끼리도 정치할 정도로 팀 내 사정이 복잡합니다. 도라익 선수처럼 올곧은 사람에겐 큰 스트레스가 될지도 모릅니다. 전문가들이 입 모아 칭찬하던 선수도 레알 마드리드에 가면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직 잠재력이 많이 남은 도라익 선수에게 적합한 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바르사는 어떻습니까?"
"바르사는 몇 년 동안 큰 영입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지난 시즌 노장을 과감히 정리하며 팀의 재정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딱히 문제라면."
"바르사도 문제가 있나요?"
"노장이 없다는 겁니다. 바르사에 간다면 도라익 선수는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발전할지 직접 고민해야 합니다. 물론, 코치와 감독이 조언하겠지만, 그래도 현역으로 뛰며 현재 축구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는 경험이 풍부한 노장보다는 덜 정확할 겁니다."
"저는 반대 의견이에요."
김상현이 프리미어리그 팀을 담당하고 오태범이 기타 리그를 담당하기로 사전에 약속했다. 제작진이 보기에도 도라익이 프리미어리그 팀으로 이적할 가능성이 작기에 좋은 말을 할 리 없는 김상현에게 배당한 것이다.
그런데 약속과 다르게 라리가 분석 중에 김상현이 난입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는 공격수가 4명 있어요. 이 중 3명은 포워드로만 뛰는 선수예요. 도라익 선수가 미드필더로 뛰기도 했지만, 아틀레티코는 미드필더 역시 넘치는 팀이에요. 그러니 도라익 선수를 영입하면 아틀레티코도 3명의 포워드 중 2명은 정리할 거예요. 아무도 방출 안 하고 도라익을 영입할 능력이 있을 뿐, 도라익을 영입하고도 선수를 안 내보내는 게 아니거든요."
"레알 마드리드는 훨씬 심각해요. 임대 보낸 공격수만 3명이나 있거든요. 아틀레티코든 레알이든 잉여 공격수를 처리하기 쉽지 않아요. 몸값이 싸지 않고 주급 역시 높게 받는 선수들이거든요. 두 팀 모두 도라익을 영입할 능력은 되지만, 도라익을 영입한다고 끝이 아니잖아요. 도라익을 영입한다고 리그 우승 절로 하고 챔피언스리그 우승 절로 해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오태범은 반박을 포기했다. 김상현이야 어떻게든 도라익을 깎아내리려고 억지를 부려야 하지만, 오태범은 아니었다.
"바르사는요?"
의외로 김상현의 입에서 그럴듯한 말이 나오자 제작진도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바르사는 지난 시즌 리그 2위를 했어요. 챔피언스리그도 4강에 들면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구요. 이게 다 비싼 이적료를 주고 영입한 스타 선수들을 과감히 정리하고 자체 육성한 젊은 선수를 대량으로 발탁한 덕분이죠. 실력도 경험도 부족함이 있을지 몰라도 단합은 최고였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큰돈을 들여 도라익을 영입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아니죠. 도라익 한 명만 영입하는 거라면 선수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쉬워요. 남은 건 도라익 선수가 플레이로 증명하면 되는 일입니다."
"오태범 평론 말대로 바르사가 이번 여름에 도라익 선수 한 명만 영입한다고 쳐요. 이적료가 1억 파운드 넘죠? 주급은 아마 30만 파운드는 줘야 할 거 같은데. 그런 선수를 영입해서 남은 10명과 똑같이 대우할까요? 그저 다른 10명만큼만 뛰어주길 바랄까요?"
오태범은 도라익의 입장에서 고민하여 바르사보다는 아틀레티코가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기에 더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반면, 김상현은 삭발 사태 때문에 도라익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가는 축협 임원들의 사주를 다수 받아 어떻게든 도라익에게 불리한 점을 찾아내 확대해야 한다.
그렇기에 의외로 오태범이 김상현에게 밀리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각 팀의 사정으로 도라익 선수는 이번 여름에 이적하지 못할 거예요."
말투에 배인 단호함은 도라익이 이적했다간 김상현이 피 토하고 죽는 게 아닌지 걱정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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