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거리 슈팅
전반전 30분.
도라익이 공을 잡았는데도 쿠웨이트 선수들이 복귀가 느렸다. 몸이 지치기도 했지만, 도라익이 매번 드리블하다가 공을 뒤로 돌린 바람에 시큰둥해진 면도 있었다.
- 도라익 선수 가속합니다.
슬렁슬렁 드리블하던 도라익이 불시에 치고 달렸다. 갑자기 변한 템포에 쿠웨이트 수비수들이 허둥댔다.
도라익은 쿠웨이트 수비수들이 수비 위치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사이에 또 한 번 치고 달렸다. 길게 차고 달리는 간단한 방식으로 수비수 세 명을 한꺼번에 벗겨냈다.
상대가 당황하며 수비진이 해체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시도였다.
수비수 세 명이 허수아비가 되자 키퍼가 어쩔 수 없이 달려 나왔다. 그러나 도라익은 복잡하게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골라인 쪽으로 공을 툭 친 도라익은 순식간에 6미터의 거리를 질주하여 빈 골대에 슈팅했다.
슈팅 각을 좁히려고 달려 나오던 키퍼는 역동작이 걸려 미끄러져 넘어진 채 고개를 돌려 골을 확인했다.
- 도라익 선수, 또 야구 세리머니 나왔습니다.
오늘 가족뿐 아니라 스페인에서 깊은 우애를 다진 형들도 경기장에 왔다. 도라익의 덕담대로 1군으로 간 선수는 한 명도 없지만, 스페인에서 했던 훈련 덕분에 2군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다고 했다.
- 도라익 선수 동생 도라현이 야구부 에이스 타자입니다.
- 동생한테 응원의 의미로 하는 세리머니인가요?
사정을 모르는 해설들은 동생을 위한 세리머니라고 오해했다.
그리고 경기 45분.
두 번째 실점을 기점으로 다시 똥개가 되어 앞뒤로 뛰어야 했던 쿠웨이트 선수들이 풀타임을 뛴 사람처럼 퍼졌다.
'공격수라면 어떤 위치에서도 득점해야죠.'
비행기로 오는 동안 본 영상에서 어떤 선수가 한 말이다.
'어떤 위치에서도 득점할 수 있으면 그걸 이용해 상대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쿠웨이트의 공격이 무산되었다. 공을 빼앗은 한국팀은 간단하게 두 번의 패스로 공을 도라익의 발밑에 전달했다.
공을 잡은 도라익이 몸을 돌리자 쿠웨이트 수비수들이 뒷걸음쳤다. 속도가 빠른 도라익을 상대로 거리를 벌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제쳐진다.
속도만 빠른 게 아니라 몸이 단단하고 힘도 세서 탱크처럼 밀고 지나가기에 어떻게든 공을 건드려야지 사람을 막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도라익은 이들이 생각도 못 한 선택을 했다. 공을 짧게 치고 가속한 도라익은 왼발을 뒤로 높이 들었다가 강하게 휘둘렀다.
도라익의 평평한 발등에 맞은 공이 쏘아진 포탄처럼 날아갔다.
- 도라익 선수 슛!
- 골! 리버풀 경기에서 넣은 골보다는 가깝지만, 꽤 먼 거립니다.
- 38미터라고 나오네요. 저희가 보기엔 40미터 조금 넘은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죠.
키가 도라익보다 작은 쿠웨이트 키퍼는 집중력이 저하됐는지 원거리 슛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워낙 잘 찬 공인 데다가 키퍼의 실책까지 겹쳐 멋진 골이 되었다.
'이젠 어쩔 거야?'
상대를 지배한다는 말이 와닿지 않았는데, 원거리 슈팅으로 골을 넣고 나니 확 체감되었다. 속도가 빠른 도라익 상대로 수비수들은 거리를 어떻게 조절할지 머리가 아플 것이다.
게다가 키퍼도 도라익이 공만 잡으면 골대를 지켜야 하니 이혁신처럼 속도가 빠른 선수에게 침투할 공간이 커진다. 수비수들은 도라익에게 접근해야 하고 키퍼는 뒤로 물러나야 하니까.
재개된 경기에서 쿠웨이트는 전의를 상실한 채 무의미하게 공을 돌렸다. 그때 도라익의 등이 카메라에 잡혔다.
- 도라익 선수 유니폼이 찢겼습니다.
- 느린 화면 나옵니다. 경기 38분에 수비수 세 명과 몸싸움하다 넘어지면서 째진 거네요.
유니폼이 째진 걸 늦게 발견한 중계 감독이 지난 화면을 찾아 내보냈다. 어차피 한국팀도 어느 정도 지쳐서 강한 압박을 하지 않고 있기에 경기 장면은 볼거리가 없었다.
- 혼자서 셋과 몸싸움 했는데 이겼죠?
- 같이 넘어지긴 했습니다만, 도라익 선수가 마지막까지 버텼으니 이긴 거나 마찬가지죠.
- 쿠웨이트 선수들 입장에선 정말 허탈할 겁니다. 키도 크고 속도도 빠르고 기술도 좋고 슛도 잘 때리고. 거기에 힘까지 세거든요.
- 얼굴도 잘생겼습니다.
- 공부도 잘했다고 하네요.
- 중국 팬들이 도라익의 유일한 단점이 중국인이 아닌 거라고 했죠.
- 그것도 장점 같은데요?
하프 타임.
한국 선수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늘 침대 축구로 애먹이던 쿠웨이트를 전반전 내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재롱을 부리게 했다.
심지어 차 감독도 꽤 놀란 눈치다. 고작 데뷔한 지 일 년이 조금 넘은 도라익이 공을 차는 게 아니라 경기를 '운영'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낮은 단계부터 차근차근 밟아야 한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
도라익도 감회가 깊었다.
갑자기 프리미어리그를 뛰게 되며 전술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한 도라익이다. 그러나 프리미어리그에선 여전히 빠른 판단이 어렵고 실수가 잦았다.
다행히 공격 상황에선 머리가 돌아가 부족한 부분이 있음에도 좋은 모습을 지속하여 보였다.
그런데 쿠웨이트 상대로 배운 걸 간단히 써먹었더니 효과가 만점이었다. 고작 전반전이 끝났음에도 깨닫고 느끼는 점이 프리미어리그 열 경기 뛴 것보다 훨씬 많았다.
'프리미어리그에선 원거리 슈팅 몇 번 해보고 골이 안 들어가면 포기했겠지.'
실패를 통해 배운다고도 하지만, 실패만 하면 오히려 옳은 방법을 틀렸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상대가 다르면 상대하는 방법도 달라야 하는데, 프리미어리그를 출발선으로 삼은 도라익은 경기 중 변통하는 법이 서툴렀다.
"도 감독. 후반전에 어떻게 뛸까?"
차 감독의 농담에 선수들이 편하게 웃었다.
도라익의 징계와 박창식의 부상으로 꽤 오랜 기간 득점에 어려움을 느끼며 자신감이 눌렸다. 오늘 경기에 박창식과 도라익이 동시에 복귀하며 기대감이 컸는데, 전반전에 기대 이상의 결과를 확인했다.
"초반부터 몰아쳐서 기세를 확실히 꺾어야 합니다. 그러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쿠웨이트가 빠른 교체를 할 겁니다. 갓 교체한 때를 노리면 득점이 어렵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다 들었지? 후반전에 혁신이 왼쪽으로 간다. 창범이하고 혁신이 크로스 많이 올려. 그리고 미드필더들은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 흘러나오는 공을 주워 슈팅하거나 측면으로 보내 다시 크로스 올리게 한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한국팀은 라인을 한껏 올리고 쿠웨이트 골대를 폭격했다. 쿠웨이트에 속도 빠른 선수가 셋이나 되지만, 어느 하나 중앙선에서 한가하게 공을 기다릴 생각을 못 했다.
집채 같은 파도가 연신 몰려와서 방파제에 보탤 조약돌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경기 53분, 쿠웨이트 감독은 한꺼번에 두 명의 선수를 교체했다.
- 오창범 선수 크로스!
- 키퍼가 쳐냅니다.
- 오창범 선수 안 본 사이에 크로스가 일취월장했습니다.
흘러나온 공을 잡은 고명준이 뒤로 넘겼다.
- 도라익 선수 공 잡았습니다.
- 슈우웃!
- 골!
- 마지막에 공이 가라앉았습니다.
- 무회전 슛입니다.
크로스바보다 높게 뜬 공이 갑자기 가라앉으며 골이 됐다.
- 도라익 선수 어느새 저기로 갔죠?
- 고명준 선수가 뒤로 패스한 걸 보면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 교체로 어수선하여 도라익 선수 마킹이 제대로 안 된 것 같습니다.
화면이 공 위주로 나가기에 도라익의 이동은 누구도 주의하지 않았다. 갓 두 명의 선수를 교체하며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쿠웨이트도 도라익이 빠져나간 사실을 몰랐던 듯했다.
도라익이 원거리 슈팅으로 2득점을 하자 쿠웨이트는 막무가내로 라인을 내릴 수도 없었다. 도라익이 뒤로 물러나면 라인을 올려야 하고, 도라익이 앞으로 가면 라인을 내려야 했다.
전반전에 공으로 하던 똥개 훈련을 후반전엔 도라익이 몸소 뛰며 했다.
- 아쉽지만, 경기가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 거든요.
- 후반 65분에 도라익 선수가 박창식 선수로 교체됩니다.
- 3골 1도움. 익숙한 데이터를 남기고 도라익 선수가 퇴장합니다.
- 관객들이 기립 박수로 응원합니다.
박창식의 골과 오창범의 프리킥으로 한국팀은 6:0 대승을 거두며 조 1위를 굳히고 3라운드 진출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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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해설 어제 도라익 선수 사인을 받았다면서요?
- 네. 제 거 하나 아들 거 하나. 두 개나 해주셨습니다.
- 저나 최 PD 생각은 개나 줘버린 모양이군요.
- 어허. 그럼 이건 그냥 찢어버려야겠네요.
- 형님,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강철민은 박만호나 최 PD는 물론, 스텝들 몫까지 사인을 챙겨왔다. 덕분에 중계 스튜디오 분위기가 엄청 좋았다.
- 서울 월드컵경기장이 보수 공사를 하면서 관객석 일부가 폐쇄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해설 석이 거기에 포함되었습니다.
- 원래 경기 전에 공사가 마무리되어야 하는데 여러 이유로 늦어졌다고 하네요.
-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보고 싶지만, 더 나은 해설을 위해 이렇게 중계 스튜디오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 도라익 선수는 경기를 벤치에서 시작합니다.
- 박창식 선수가 선발로 출전했습니다.
- 두 선수가 함께 뛰면 위력이 엄청날 것 같은데요.
- 도라익 선수도 놀랍지만, 박창식 선수는 부상에서 회복한 후에 전보다 훨씬 뛰어난 모습을 보여줘서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죠.
- 수술이 끝난 후에 훈련을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합니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약점이던 몸싸움이 보완되며 리그앙에서도 주목받는 포워드가 되었죠.
발목 부상으로 쉬면서 상체 운동에 집중한 덕분에 박창식의 몸싸움이 훨씬 강해졌다. 발목도 의사가 놀랄 정도로 깔끔하게 나아서 전화위복이 된 상태다.
- 작가의말
프랑스 외인부대 소속이 민방위 훈련에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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