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이
경기는 3:1로 끝났다. 토트넘이 0:1로 패배하긴 했지만, 스토크시티가 승리한 것 때문에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홈팬들은 흥분을 괴성으로 발산하며 시상식을 기다렸다.
프리미어리그 우승 시상식이 끝나면 팬들은 경기장에 들어가서 잔디와 골 그물 중 하나를 잘라 기념으로 가져갈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덧없이 흐르기만 했다.
"무슨 일이지?"
"혹시 이름 새기는 분이 실수했나?"
우승이 미리 확정된 게 아니기에 스토크시티의 홈과 토트넘의 홈에 우승컵 하나씩 가 있다. 우승팀이 탄생한 구장의 우승컵에 팀명이 새겨지고 아닌 구장의 우승컵은 그대로 협회 창고로 돌아간다.
이름 새기는 데 시간이 조금 필요한 건 알지만, 이토록 오래 걸릴 일도 아니다.
"그럼 큰일인데. 런던에서 우승컵 가져오려면 3시간은 걸리잖아."
1초라도 빨리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싶었던 도라익이 울상을 지었다.
그때 경기장에 방송이 울려 퍼졌다. 대충 스토크시티 선수들에게 라커룸으로 돌아가서 대기하라는 내용이었다.
어리둥절해서 라커룸으로 돌아간 선수들은 흰 가운을 입고 나타난 낯선 사람들 때문에 한껏 긴장했다.
"채혈하겠습니다."
"왜요?"
도라익이 항변했다.
"도핑 검사에 필요합니다."
그때 구단주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자, 다들 진정해. 며칠 전에 보아스가 체포되고 도핑에 안 걸리는 약물이 발견된 건 다들 알고 있겠지?"
구단주의 말에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스의 고객 명단 중엔 선수도 몇 명 있지만, 대부분은 브로커야. 그중 대부분은 또 다른 브로커에게 약을 넘기는 형식이어서 조사가 언제 끝날지 몰라."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입니까?"
"리그위원회에서 우리 팀이랑 토트넘 선수 전체를 대상으로 도핑 테스트를 한 후, 문제가 없으면 바로 시상식을 진행하기로 했어. 테스트 안 받으면 조사가 끝날 때까지 우승 시상식 및 프리미어리그 순위 발표를 연기한다고 했거든."
"자, 저부터 뽑으세요."
도라익이 팔을 내밀었다.
다른 선수들도 의사들이 내미는 종이 쪼가리에 사인한 후 피 같은 피를 뽑혔다. 채혈한 의사들은 피를 들고 몰고 온 차에 가서 도핑 테스트를 시작했다.
"뭐가 이리 오래 걸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선수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새 종류의 약물이어서 테스트 방법이 조금 복잡하다는군. 그나저나 새로운 소식 하나 발표하지."
구단주도 검사 결과를 기다리느라 무척이나 떨렸다.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다음 시즌에나 발표하려 했던 공지를 미리 스포하기로 했다.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2천만 유로의 포상금을 걸 생각이야."
선수들이 환호했다.
"준우승은 천만 유로, 4강은 8백만 유로, 8강은 4백만 유로."
"16강은요?"
"16강 정도는 기본 아닌가?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이."
루이스가 가방을 뒤져 블루투스 스피커를 켠 다음, 퀸의 '위 아 더 챔피언'을 틀었다.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목청이 터지라 따라 부르면서, 경기장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창조력을 자랑했다.
-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특별한 38라운드가 아닌지 싶습니다.
- 리그위원회는 3시간 전에 우승 후보인 토트넘과 스토크시티 선수 전원에게 신종 약물에 대한 도핑 테스트를 결정했습니다.
- 그에 따라 토트넘과 스토크시티 선수들 모두 라커룸에서 채혈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스토크시티에 약물 선수 1명만 나오면 토트넘이 우승합니다.
- 그러나 토트넘에도 약물 선수가 나오면 계산이 또 복잡해지죠.
- 스토크시티 3명, 토트넘 2명이면 토트넘이 우승이지만, 토트넘이 3명 되는 순간 아스널이 우승 후보가 됩니다.
- 그러면 또 아스널 선수들 상대로 도핑 테스트를 해야겠네요.
- 그러나 저는 프리미어리그와 선수들을 믿습니다.
- 저도 믿습니다. 당연히 두 팀 다 테스트를 전원 통과할 겁니다.
- 아, 현장 촬영팀이 라커룸에 진입한다고 합니다.
- 혹시 나체의 선수가 있을지 몰라 신호 송출이 조금 늦어지는 점 양해 바랍니다.
라커룸 문이 벌컥 열렸다. 어느새 힙합을 틀고 엉덩이를 흔들던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멈칫했다.
그러나 넥타이를 벗어 가랑이에 비비며 신나게 춤추던 구단주는 미처 카메라의 등장을 의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신나게 흔들어댔다.
촬영팀이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신호를 정확히 해석한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언제 멈췄나 싶게 머리를 돌리고 몸을 흔들었다.
- 역시 젊은 구단주라 선수들과 잘 어울립니다.
- 육십부터 청춘이라는데 오십 조금 넘으면 소년이죠.
- 오, 도라익 선수 춤 선이 이쁩니다.
- 루이스 선수도 장난 아닌데요.
섹시 댄스에 빠졌던 구단주는 카메라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벌러덩 넘어졌다.
선수들이 넘어진 구단주를 재빨리 부축했다. 구단주는 가랑이에 대고 비비던 넥타이를 황급히 목에 매고 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생방송입니다."
그러나 리포터의 말에 당장 넥타이를 풀어 머리에 질끈 묶은 다음, 카메라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우리가 챔피언이야. 우리가 챔피언이라고. 빨리 우승컵 내놔."
경기를 지켜보는 내내 긴장해서 와인을 홀짝홀짝했는데 긴장이 풀리면서 취기가 머리를 때렸다. 구단주는 이때다 싶었는지 평소 매사 정확히 계산하느라 받았던 스트레스를 여감 없이 풀었다.
"에릭, 당장 팬들 입장 시켜. 잔디랑 그물 나눠줘."
원래는 우승컵을 들고 수상 소감도 발표하고, 선수들이 우승컵을 들고 구장을 몇 바퀴 돌고 퇴장한 다음에야 진행하는 행사다.
- 정말 특별한 우승입니다.
- 우승컵을 공식적으로 받기 전에 우승 세리머니가 진행됐습니다.
팬들이 구장에 들어가 플라스틱 모종삽으로 잔디를 조금씩 베서 기념품으로 남겼다. 일부 팬은 골대 뒤의 그물을 잘랐다.
아무리 보안 요원들이 애쓰고 대부분 팬도 질서를 지키려 노력했지만, 꼭 아닌 사람이 있었다. 팬 숫자가 수만 명이어서 경기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다행히 보안 요원들과 일부 팬의 노력으로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다.
팬들의 우승 세리머니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스토크시티 구장은 잔디가 모두 사라져 밑에 배수 시설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물도 꼬투리 하나 안 남을 정도로 깨끗이 사라졌고, 코너킥 포인트의 깃발도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섹시 댄스로 땀을 한껏 낸 구단주는 취기가 싹 날아갔다. 비록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었지만, 자신이 부린 추태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났다.
'다음 주말에 성당 나가면 사람들 얼굴 어떻게 보지?'
구단주는 와인을 자제해야겠다고 속으로 거듭 다짐했다.
"결과 나왔습니다."
그때 라커룸 문이 열리며 의사가 들어왔다. 세 대의 카메라는 각각 의사와 구단주 그리고 도라익을 잡았다.
"결과가 뭡니까?"
구단주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전원 통과입니다."
선수들이 지른 환호에 라커룸이 흔들리는 착각이 생겼다.
- 아, 구단주의 세리머니.
우승 확정 소식에 신이 난 구단주가 자신을 찍는 카메라를 부여잡고 부비부비 댄스를 췄다. 영활한 골반 움직임을 보니 부인에게 더없이 사랑받을 것 같았다.
- 선수들도 세리머니 합니다.
샴페인을 터뜨리고, 두루마리 휴지를 사방으로 던지고, 미리 준비한 분사기로 밀가루 폭탄을 기폭했다.
흩날리는 액체와 가루, 불규칙적으로 비산하는 두루마리 휴지 때문에 카메라에 흐릿한 실루엣만 잡혔다.
그 흐릿한 화면에 자막이 입혀졌다.
36-37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 - 스토크시티
36-37시즌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 도우
36-37시즌 프리미어리그 도움왕 - 도우
36-37시즌 프리미어리그 MVP - 도우(아직은 공식 발표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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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익아.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어."
우승의 기쁨으로 며칠째 즐거운 가운데, 최경호가 진지한 얼굴로 도라익을 찾았다.
"뭔데?"
"도핑 조사 말이야."
"우리 그거 다 통과했는데?"
"너 이번 여름에 이적할 예정이잖아."
"그건 지난여름에 얘기 끝났잖아."
"어느 팀으로 가고 싶은데?"
"레알이나 바르사 혹은 뮌헨으로 가기로 했잖아."
최경호는 잠깐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보아스 조사받고 있잖아. 조사가 최소 2달은 걸릴 예정이래."
"그래서?"
"프리미어리그는 가장 마지막에 끝났잖아. 다른 리그는 우승이랑 강등이 이미 정해진 상황이야."
도라익은 최경호가 말하려는 게 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내 이적이랑 무슨 상관이야?"
"약물 선수가 나오면 다음 시즌 리그 점수를 깎을 거래."
그제야 도라익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내가 간 팀에 약물 선수가 많이 나오면 우승 가망이 사라지겠네?"
"어쩌면 챔피언스리그 참가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몰라. 구단 차원에서 약물을 한 팀도 있다는데, 최소 2부리그, 심하면 4부리그로 떨어질 수도 있어."
우승을 노리고 이적했는데 최악의 상황에 4부리그를 뛸지도 모른다.
"계약서 작성할 때 미리 대비하는 건 어때?"
"네 이적료가 최소 2억 유로인데, 어느 팀이 하위리그로 떨어지면 널 놓아주는 조항을 넣어 주겠니."
"다시 이적하는 건?"
"같은 이적 시즌에 2번 이적하면 반년 동안 경기에 출전할 수 없어."
꼼짝없이 스토크시티에 남아야 할 판이다.
"우리 팀이 했던 것처럼 전체 도핑 검사를 하면 되잖아."
"그거야 스토크시티랑 토트넘이 동의했으니까 가능했던 거지."
"우승컵을 빌미로 협박하는데 동의 안 하는 팀이 어딨어."
"라리가랑 세리에 A 그리고 분데스리가 모두 전체 검사를 거부했어."
"아니, 왜?"
도라익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깔끔하게 검사해서 자신들이 깨끗하다는 걸 밝히는 게 위기를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 아닌가?
"뭉개서 두루뭉술하게 넘길 예정이거든."
세 나라는 협회 차원에서 전체 검사를 거부했다. 괜한 스캔들로 리그 인기가 내려가면 본인들만 손해다.
게다가 약물 선수가 많이 나온 팀을 하부리그로 내려보내야 하는데, 중계료를 많이 버는 팀이 강등하면 금전적으로 너무 큰 손해다.
도핑 때문에 2년의 자격 정지를 받은 선수들을 대체할 자원을 구하기도 어렵다. 리그에 어울리는 선수를 제때 수급하지 못하면 경기 퀄리티가 떨어질 거고, 당연히 리그의 몰락이 따른다.
괜히 전체 테스트에 응했다간 리그 자체가 몇 년에서 십 년 정도 침체기를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리그앙은 세계 5대 리그의 5위를 벗어날 좋은 기회라 여겨 기꺼이 전체 테스트에 응했다.
"아니. 다들 정직하게 살면 얼마나 좋아. 왜 약물 같은 거 해서 일을 이리 복잡하게 만드는 건데."
"누구나 너 같은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고 너처럼 노력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우승은 몇 시간만 딜레이됐지만, 도라익의 이적은 한 시즌 더 딜레이되게 생겼다.
"형이 최대한 알아볼게.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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