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익의 고뇌
알론소는 전반전 마지막 5분 동안 경기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그리고 15분 휴식하는 중에도 무려 6분이라는 시간을 고민하는 데 할애했다.
"다들 너무 지쳤군."
고민을 마친 알론소가 입을 열었다. 자신의 결정에 확신이 없어 몹시 불안한 상황이지만, 여유 넘치는 표정을 연출했다.
"이대로는 우리가 진다. 뭔가 상대가 깜짝 놀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선수들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라익의 두 골은 개인 역량으로 넣은 거나 다름없고, 리엄의 헤딩은 상대의 실수가 빚은 결과다. 스토크시티라는 팀의 힘으로 만든 골은 하나도 없다.
반면, 뮌헨의 세 골 모두 팀 전술로 기회를 만들어 넣은 것이다.
이 차이는 몹시 크다. 운 좋게 한 경기에서 스토크시티가 뮌헨을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열 경기를 하면 최소 여덟 경기는 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경기에서도 문제가 된다. 경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토크시티의 승산이 낮아진다. 저쪽은 잘 짜인 전술로 팀이 골을 만드는데 이쪽은 선수의 개인 역량과 운에 기대야 하기에 연장전까지 어찌어찌 가도 승산이 전혀 없다.
"뮌헨을 이기려면 뭐가 필요할까?"
알론소의 말에 선수들이 전에 없이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반전에 실점하지 않고, 한 골 넣으면 돼."
대부분 선수가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연장전까지 가면 우리가 불리해."
연장전에 가면 선수 한 명을 추가로 교체할 수 있다. 이는 벤치 몸값이 스토크시티 구단 전체 몸값보다 더 높은 뮌헨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찰리 대신 줄리엔이 출전한다. 리는 계속 7번을 마킹하고, 토미와 도우는 오른쪽을 지원하는 걸 잊지 마."
찰리 대신 출전하는 줄리엔은 센터백 역할을 맡았다. 네 명의 센터백이 함께 뛰는 훈련에 시간을 꽤 할애했기에 자중지란이 될 가능성은 작았다.
"골은 어떻게 만듭니까?"
주장의 본분을 잊지 않은 도라익이 질문했다.
"세트 피스."
알론소의 대답은 명확했다.
"찰리를 내린 이유기도 해. 저들이 13번을 내려 리의 마킹을 벗겨냈듯이, 우린 찰리를 내림으로써 뮌헨에 혼란을 준다."
세트 피스라면 직접 프리킥, 간접 프리킥, 코너킥 및 페널티킥 등 공이 정지한 상태에서 상대의 방해를 안 받고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을 말한다.
그리고 모든 세트 피스 상황에서 핵심 선수는 찰리 아담이다. 비록 팀의 평균 신장에 부끄럽게 세트 피스 득점이 저조하지만, 찰리 아담의 존재는 늘 상대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그런 찰리 아담을 내려버리면 뮌헨 역시 혼란에 빠진다. 도라익과 레체르트 그리고 리엄과 마르코. 찰리와 비교하면 고만고만하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넷 모두 운이 아닌 실력으로 득점할 능력이 있는 선수다.
보통 스토크시티를 상대하는 팀은 찰리가 직접 헤딩하거나 찰리는 미끼가 되고 공이 다른 선수를 찾는 두 경우를 염두에 두고 수비하면 되는데, 찰리가 사라짐으로써 경우의 수가 부쩍 늘었다.
물론, 찰리의 부재로 스토크시티의 득점 가능성 역시 줄었지만, 어차피 찰리가 있어도 득점이 어려운 상황이기에 차라리 변수를 늘려 요행을 바라는 편이 낫다.
"먼저 실점하면 어떻게 대처합니까?"
도라익의 질문에 알론소의 얼굴이 굳었다.
"한 골 먹으면 계속 수비하면서 동점을 목표로 뛴다. 그러나 두 골 먹으면 줄리엔이 공격수 자리로 가고 리를 교체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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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크시티는 후반전에 4실점을 하여 결국 3:7로 패배했다. 2골을 먹은 후 리 그레고리를 내리고 제임스를 올리며 공격을 강화했지만, 뮌헨의 영리한 운영에 목줄을 잡혀 경기 내내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리고 경기 이튿날, 도라익과 오창범은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형. 에릭슨 자료 다 외웠어?"
아직 프리미어리그에서 선발을 논할 정도는 아니지만, 오창범의 수비 능력은 일취월장했다. 서울에서 중국과 벌이는 월드컵 3차 예선 첫 경기에서 선발로 출전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중국과 이란, 카타르, 태국, 사우디아라비아, 북한 및 시리아와 같은 조에 속했다. 그런데 시리아와 북한이 불참을 선언하는 바람에 6팀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급히 B조의 이라크를 A조로 옮겼다. 그간의 준비가 허탕이 된다는 이유로 반발이 큰 다른 팀들과 달리 이라크는 조를 옮기는 데 별 저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료는 다 외웠고 최근 경기 영상을 분석하고 있어. 그런데 이놈 살이 찐 거 같은데 맞아?"
도라익은 오창범의 패드에 나오는 에릭슨을 봤다. 얼굴은 별로 티가 안 나는데 가슴과 허리는 확연히 실해졌다.
"형한테 좋은 소식은 아니야. 어차피 속도는 원래 형이 더 빨랐어. 몸무게가 늘면 형만 더 괴롭지."
"이 새끼 브라질 출신이지? 포르투갈 말로 살찐 돼지가 뭐지?"
오창범이 동영상을 멈추고 번역기를 켰다.
"형. 그런 거 이제 안 하기로 했잖아."
"안 쓰더라도 알아둬선 나쁠 거 없잖아."
도라익은 다시 자기 패드에 집중했다. 2년 전 아시안컵에서 준우승한 중국팀은 감독을 교체했다.
새로 부임한 감독은 귀화 선수의 개인기에 의지하던 전술을 완전히 뜯어고쳐서 중국 팀을 아주 탄탄하게 바꿨다.
"근데 중국 진짜 강해졌더라. 얼마 전에 일본이랑 한 친선 경기에서 6:4로 이겼어."
심심했는지 오창범이 말을 걸었다.
"형. 경기를 어떻게 하면 뮌헨 같은 팀을 이길 수 있을까?"
동문서답도 아니고, 동문서문이었다. 그러나 오창범은 도라익의 호응이 반갑기만 했다.
"객관적으로 120분 내내 수비만 해서 무승부를 이룬 다음 페널티킥으로 이기는 방법밖에 없지 않을까?"
"내가 맨유에 했던 것처럼 몇십 미터 드리블한 다음 득점하면?"
"그럼 뮌헨도 기를 쓰고 공격해서 득점하고 말겠지."
"내가 또 득점하면?"
"뮌헨이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또 득점하겠지."
객관적으로 뮌헨의 공격이 스토크시티보다 강하고, 뮌헨의 수비 역시 스토크시티보다 강하다.
"그러니까 꼭 이긴다는 생각은 버리고. 뮌헨 같은 팀 상대로 난 어떻게 뛰는 게 맞을까?"
다소 실없는 대화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도라익은 오창범과 대화하며 생각을 꽤 정리했다. 팀이 뮌헨을 이기는 방법은 감독과 코치가 고민해야 할 문제다. 겨우 선수인, 그것도 아직 애송이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도라익으로선 자신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게 훨씬 낫다.
"그냥 내 생각인데."
도라익의 고민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는 오창범이 경솔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너라면 중앙선에 대기하면서 상대 선수 두세 명을 잡아두는 거로 수비 역할을 할 것 같아."
"그런데 우리 팀엔 찰리가 있잖아."
속도가 느리고 수비도 별로인 찰리가 있기에 도라익은 수비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후반전에 찰리를 뺀 게 아닐까? 너랑 찰리의 사이가 나빠지는 걸 경계해서 세트 피스를 핑계로 댄 건 아닐까?"
오창범은 깊이 고민하지 않고 되는대로 지껄였지만, 듣는 도라익에겐 청천벽력이었다.
'후반전에 난 직접 수비로 뛰는 것보다 공격 포지션에서 상대를 견제했어야 했구나.'
물론. 도라익은 전술 코치에게 해당 사항을 전달받았다. 그러나 팀의 상황이 어려운 게 눈에 보이고, 팀의 수비 공백이 환히 보이는 상황에 중앙선에 대기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미드필더로 뛰라고 하니까 뭐라도 된 것 같았어.'
도라익은 미드필더에 약간 환상이 있다. 공격수가 날카로운 창이고 수비수가 단단한 벽이라면, 미드필더는 팀을 지휘하고 경기를 운영하는 사령관 같은 느낌이다.
더구나 본인이 강력히 요청하여 미드필더 자리로 갔기에 뭔가 해내야 한다는 강박도 어느 정도 있었다.
'이상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두 발은 현실에 단단히 붙이고 현실을 걸어야 한다.'
도라익도 되고 싶은 모습이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지, 벌써 그 모습이 된 것처럼 굴어선 안 된다.
"형, 고마워. 덕분에 머리가 맑아졌어."
오창범은 전화기로 환하게 웃는 도라익의 모습을 찍어 SNS에 올렸다. '유럽 상공에서 머리가 맑아진 도라익'이라는 엉뚱한 제목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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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라익 선수 눈빛이 날카롭습니다.
- 연패를 겪어 심리적인 타격이 있지 않을지 걱정했는데, 기우였습니다.
공을 잡은 도라익은 상체 페이크로 중국 수비수를 속인 다음 급가속했다. 이미 옐로카드 한 장 받은 중국 수비수는 손을 내밀다 말고 몸을 돌려 도라익을 쫓았다.
- 급제동에 이은 급가속!
다른 수비수가 길을 막자 갑자기 멈췄던 도라익은 방향을 바꿔 중앙으로 컷인 했다.
센터백 한 명에 미드필더 두 명이 있고, 조금 먼 곳에 박창식과 중국팀 왼쪽 풀백이 있다.
'창범이 형 안 왔네?'
전술대로면 박창식이 중앙으로 달려 수비진을 흔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오창범이 박창식의 현재 위치에 와서 중국팀 풀백을 잡아둬야 한다.
'이럴 땐 내가 알아서.'
결심을 내린 도라익은 상체를 두 번 흔드는 거로 중국 선수가 못 다가오게 묶어둔 후, 오른발을 짧고 강하게 휘둘러 슛을 때렸다.
시야를 방해받은 중국 키퍼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야신존을 강타한 도라익의 슛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양팔을 벌려 수비수들에게 불만을 전달했다.
골에 성공한 도라익은 오른손 검지만 세운 채 높이 점프했다. 필요할 땐 보이지도 않던 오창범이 어느새 달려와 도라익의 곁에 붙어 열 손가락을 쫙 폈다. 그리고 박창식 역시 달려와 손가락 하나를 보탰다.
"형, 뭐야?"
도라익이 검지만 세운 건 첫 골이라는 뜻으로, 골을 더 넣겠다는 예약 세리머니였다.
"우리는 팀이지만, 저들은 11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창범과 박창식은 아시안컵 결승에서 승리한 후 MOM 인터뷰에서 도라익이 했던 말을 잊지 않고 11을 보태는 거로 세리머니를 완전히 다르게 변형했다.
'그래. 전술대로 안 풀릴 땐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거야. 그게 팀을 위하는 일이라면 말이지.'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비행기에서 오래 고민한 게 무색하지 않게 도라익은 나름대로 대안을 찾아냈다.
- 도라익 선수 슛!
- 골입니다.
- 도라익 선수 해트트릭 축하합니다.
도라익의 3골과 박창식의 2골에 힘입어 한국팀은 중국을 5:3으로 이겼다. 5:1의 점수를 75분까지 유지하다가 마지막에 귀화 선수의 개인 돌파를 못 막아 연속 2골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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