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왜 형이 나와
1월 29일.
스토크시티는 원정에서 위건과 대결했다.
리버풀과 펼친 경기에서 레드카드로 2명 퇴장, 맥자넷이 시즌 5번째 옐로카드 획득, 제임스가 시즌 10번째 옐로카드 수집.
대니 밧스는 3경기 결장이고 제임스는 2경기 결장이며 루이스와 맥자넷은 1경기 결장이다. 거기에 근육 경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달리기를 멈추지 않은 도라익 역시 컨디션 난조로 벤치에 앉았다.
"도우. 오늘은 출전하지 않는 게 좋겠어."
단지 주전 몇 명이 출전하지 못한 문제가 아니다. 윌슨의 전술은 두 윙백이 쉴 새 없이 잽을 날려줘야 한다. 그러나 에드워즈와 워드 모두 오버래핑을 즐겨 하는 풀백이 아니다.
루이스와 제임스 대신 출전한 쇠렌센과 토미 역시 바뀐 포맷에 적응하지 못하고 엉망인 모습을 보였다.
윌슨은 후반 50분에 찰리와 산체스를 내리고 줄리엔과 리 그레고리를 올렸다.
"미스터 윌슨. 질 것 같은 경기라고 너무 빨리 주전을 교체하면 팬들의 원성이 클 뿐이 아니라 주심들도 우리한테 불리한 판정을 할 겁니다."
참다못한 공격 코치가 윌슨한테 말했다. 시즌 전체를 고민해야 하는 건 맞지만, 한 경기라도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그러나 합리성만 추구하는 미국인 윌슨은 공격 코치의 말을 흘려들었다.
처음 듣는 얘기도 아니어서 대수롭지 않았고, 윌슨의 머릿속에는 리그보다 유로파리그 생각으로 가득한 탓이다.
결국, 코너킥 수비에 허점을 드러낸 스토크시티는 0:1로 위건에 패배했다.
###
2월 1일.
스토크시티는 홈에서 1월 8일에 1:0 승리를 거둔 좋은 기억이 있는 버밍엄을 만났다.
채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두 팀의 변화는 거대했다. 페어린던과 제임스 그리고 대니 밧스의 부재, 산체스의 컨디션 난조로 스토크시티는 시종 수동적인 모습이었다.
한 경기 쉰 도라익 역시 좋은 모습을 보이진 못했으나 출중한 스피드를 이용해 상대 수비진을 연신 찢었다. 비록 공격 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백패스로 난전을 유도하여 토미의 골을 도왔다.
그러나 타이먼이 또 핸드볼 반칙을 하여 페널티킥 판정을 받았고, 결국엔 1:1 무승부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뒤 스토크시티가 간단한 입단식을 거행했다.
"도우, 아는 사람이야?"
"응. 친한 형이야."
스토크시티가 영입한 선수는 오창범이었다. 이적료 200만 파운드의 사나이 오창범은 2월 1일에야 스토크시티에 도착했다.
다급한 스토크시티는 오창범이 병원에서 받은 건강 진단서로 피지컬 테스트를 대체하고 29일에 한국에서 미리 계약을 체결했다.
1월 31일까지 리그사무국에 시즌 후반기 출전자 명단을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창범은 대표팀에 꾸준히 불려갔고 강팀 상대로는 아니지만 약팀 상대로 자주 뛴 선수다. 도라익이나 우디르처럼 워크퍼밋 때문에 수많은 자료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하는 동생 라익이와 같은 팀에서 경기를 뛰게 되어 참 기쁩니다. 제 모든 재능과 열정을 바쳐 스토크시티의 승리에 기여하겠습니다."
오창범은 꽤 기고만장한 모습이었지만, 스토크시티의 선택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워크퍼밋 취득이 쉽기 때문이다.
"콜 미 제임스 오."
도라익에 비해 간단하고 초라한 입단식을 치른 오창범은 스토크시티 선수들과 인사를 나눴다. 스토크시티와 계약하며 오창범은 급하게 영어 이름을 지었는데, 007 광팬인 아버지 의견을 받아들여 제임스로 했다.
"난 제임스 체스터."
스토크시티의 오창범과 한국팀의 제임스의 첫 만남이었다.
"오는 다음 경기에 출전하지 않을 거야."
수석 코치의 말에 오창범은 슬그머니 도라익에게 다가가 질문했다.
"뭐라는 거야?"
"다음 경기에 형은 출전 안 한대."
"왜? 카드 때문에 사람이 부족하다고 들었는데."
"형 워크퍼밋이 아직 안 나왔을걸. 나도 그것 때문에 첫 경기에 출전 못 했어."
오창범의 워크퍼밋은 5일에서 7일 사이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비록 스토크시티와 계약하고 프리미어리그 출전자 명단에도 등기했지만, 오창범은 아직 영국에서 수익 활동을 벌일 자격이 없다.
"형 주급 얼마야?"
"2만4천 파운드. 네 3배라고 그러던데 맞아?"
"맞아. 일본보다 많아?"
"2배 안 돼. 중국 가면 더 받을 수 있는데, 나도 젊을 때 영국물 좀 먹어보고 싶더라."
도라익은 샤워를 마치고 마사지까지 받았다. 그새 오창범은 영어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벌써 몇몇 선수와 친분을 쌓았다.
프랑스어가 훨씬 편한 우디르, 먼저 다가가는 일은 없어도 말 걸면 다 받아주는 제임스, 페어린던의 이적으로 절친을 잃어 마음 한구석이 공허한 맥자넷 등이 오창범의 친구 목록에 새로 이름을 올렸다.
"형 집은 구했어? 태워줄게."
"아니. 너랑 같이 살기로 했는데. 경호 형이 얘기 안 했어?"
"응? 아무 말도 없던데."
"나 경호 형이랑 계약했어. 이제부터 우린 진짜 식구야."
최경호가 오창범의 에이전트가 된 건 오창범이 아닌 스토크시티의 부탁 때문이었다.
괜찮은 선수 대부분은 주급을 높게 부르든지 까다로운 조건을 걸든지 했고, 그렇지 않은 남미 혹은 아프리카 선수들은 워크퍼밋이 걸렸다.
그런 선수들을 다 배제하니 몇 안 남았는데, 그나마 가능성이 가장 큰 오창범은 에이전트가 말썽이었다. 오창범의 원래 에이전시는 영국보다는 돈을 많이 주는 중국으로 이적시키려 했다.
스토크시티는 최경호를 통해 오태범과 연락한 후, 오태범을 통해 오창범을 설득했다.
"형, 여기선 내가 선배니까 빨래랑 청소는 형이 도맡아야 하는 거 알지?"
"야. 도쿄 있을 때도 난 너 심부름 안 시켰어."
"여긴 영국이고 스토크 온 트렌트야. 난 스토크시티 주장이고."
오창범은 도라익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렸다. 오창범이 아는 도라익은 거짓말을 진짜처럼 하는 재주가 있고 진짜를 거짓말처럼 하는 재주도 있는 상큼한 또라이다.
"그럼 밥이랑 술은 선배가 다 사는 거지?"
"동생한테 얻어먹고 싶어? 주급도 더 높은 주제에?"
그제야 도라익이 농담임을 확신한 오창범은 헤드록을 걸고 턱으로 도라익의 머리를 헝클었다.
짧은 1년 사이에 도라익의 위상이 너무 달라져서 농담 같은 말도 허투루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근데 환영회 같은 거 안 열어?"
"다들 지쳤어."
도라익은 12월 박싱데이부터 지금까지 일정을 자세히 얘기했다. 22일부터 현재까지 스토크시티는 총 12경기를 치렀다.
"근데 근래 가장 편한 스케줄이었대. 여름 유로컵 때문에 시즌 초반에 일정을 타이트하게 짜서 다른 시즌보다 쉬운 편이래."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최경호는 둘을 싣고 빠르게 집으로 복귀했다. 입이 하나 늘어서 식사 준비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질 것으로 예상한 탓이다.
"이거 형이 산 거예요?"
"구단주가 타라고 준 거야. 그리고 창범이도 말 편하게 해."
집까지 확인한 오창범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상상한 적도 없는 프리미어리그 입성에 구단주가 내준 차와 구단주가 내준 집.
천생 관종인 오창범한텐 너무나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다들 지쳐서 당분간은 모여서 영상 분석만 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몸 풀고 싶으면 저기 잔디에서 혼자 훈련해. 4일에 원정 경기가 있고 5일부터 15일까지 휴식기거든. 8일부터 새 구장 훈련장을 사용할 수 있으니 그때 모여서 단체로 훈련할 거야."
###
"왜 이렇게 설렁설렁해?"
피를 토할 각오를 다지며 영국으로 날아온 오창범에게 팀 훈련은 너무 평범했다. '훈련도 실전처럼'을 어려서부터 귀에 박고 살아온 오창범이 기대하던 불꽃 튀는 훈련 경기는 없었다.
"프로 선수가 가장 억울한 일이 훈련에서 다쳐서 경기 결장하는 거야."
"다칠까 봐 몸 사린다는 거야?"
"다음 시즌 시작할 때 기대해. 그땐 설렁설렁하자고 무릎 꿇고 빌고 싶을걸."
한국과 일본은 봄에 리그를 시작해 가을에 끝낸다. 그래서 프리미어리그 후반기인 지금은 오창범에게 시즌을 준비하며 몸 만들 때다.
즉, 오창범의 신체 컨디션이 아주 좋은 시기다.
오창범은 최고점에 가깝고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현재 바닥 근처에서 헤매고 있다. 3월 초까지 육체적으로 가장 안 좋은 시기를 겪고 3월 중순부터 반등하여 괜찮은 모습을 보인다.
"형은 일단 팀 리듬을 익히는 데 주력해. 난 운이 좋아서 처음부터 프리미어리그 리듬이었거든. 그래서 적응이 빨랐던 거야. 팀 리듬하고 따로 놀면 뭘 해도 안 돼. 내 컨디션이 나쁘거나 팀 컨디션이 나쁠 때 겪어봐서 잘 알아."
"선배님 말씀 귀담아듣겠슴돠."
다행인 점은 오창범의 경쟁자인 톰 에드워즈마저 아주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올해 33살인 에드워즈는 스토크시티 아니었으면 프리미어리그 선수가 되기도 어려웠음을 알기에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영국 생활과 팀 전술에 빠른 적응을 보였다.
그리고 2월 4일.
짧은 휴식기를 맞이하기 전의 원정 경기에서 도라익의 골로 리그 19위의 풀럼에 1:0 승리를 거두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쉬게 되었다.
그리고 정식 경기에서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확인한 오창범이 새벽같이 일어나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설마 당장 경기를 뛰게 하진 않겠지만, 혹시라도 감독이 올려보낸다면 막말로 '개쪽'을 당할 것 같았다.
- 작가의말
비중 있는 조연 오창범이 정식으로 등장했습니다. 주요 업무는 ‘주인공 돋보이게 하기‘입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