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녀공·기성해
"통비권이다."
백원선사의 목소리엔 놀라움이 가득 섞였다. 잔월이 통비권을 익혀내고 쌍둥이에게 전수할 것을 기대했지만, 최소 이십 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잔월은 단순히 양팔로 다른 초식을 펼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독립된 내공으로 펼쳐 위력까지 보장했다.
'초식이 나보다 훨씬 정교하다.'
몸 쓰는 건 타고나는 부분이 구 할이고 수련은 일 할 정도다. 몸을 정교하게 쓰지 못하는 자들은 길고 무거운 병기를 익혀 부족함을 메운다.
탯줄 떼기 전부터 옥녀공 기초 수련을 시작한 잔월이기에 몸 쓰는 건 누구보다 타고났다. 혼연일체를 다섯 살 무렵에 이뤘으니 말 다 한 셈이다.
"타구봉법."
전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복룡은 건곤십팔타를 주로 익혔고 전칠은 타구봉법을 익혔다. 어차피 전칠은 더 강해지기 힘든 나이기에 생소한 타구봉법을 익혀 경험과 깨달음을 후대로 전하려 했다.
그러나 이 년 가까이 타구봉법만 익힌 전칠보다, 무공 수련도 멈추고 맨날 놀기만 한다던 잔월의 초식이 훨씬 정묘했다.
"대수인?"
엄복룡과 취접이 고개를 갸웃했다. 잔월이 펼친 장법은 누가 봐도 대수인과 많이 닮았다. 통비권에도 장법이 다수 포함되었지만, 둘을 헷갈릴 정도로 둘의 안목이 형편없지 않았다.
그 외에도 수많은 무공이 잔월 손에서 풀려나왔다. 공손평천은 뒷짐 지던 오른손을 꺼냈지만, 잔월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내공은 공손평천이 절대적 우위여도 초식은 나이가 한참 어린 잔월이 압도했다.
잔월과 공손평천 손이 가볍게 접촉했다. 공손평천이 기겁하며 내공을 쏟아냈다. 강한 내공이 공손평천과 잔월 손을 떼어버렸다.
"접평산? 저놈 장성천 같은 도둑놈이었어?"
잔월이 자신의 절초를 펼치자 취접이 버럭 화냈다.
"화산 제자 주제에 무당 무공을 더 많이 펼치기도 했고."
장군보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취접의 말을 받았다.
"공손평천, 당신이 익힌 첫 무공 첫 초식을 기억하시오?"
잔월이 숨을 고르며 질문했다. 몸으로 침투한 양은 적지만, 공손평천의 내공은 무척 질겨서 처리하기 어려웠다.
"글쎄.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공손평천은 강한 무공만 좇다 보니 기초 다질 때 무슨 무공을 수련했고 어떤 초식을 익혔는지 까맣게 잊었다.
"내 기운은 다 해소한 거요?"
잔월의 질문에 공손평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월은 내공이 절대적 열세인 상황에서도 흑룡추산과 독공을 흉내 내서 일부 기운을 공손평천 몸으로 침투시켰다.
순양의 기운이어서 저항을 덜 받았기에 거의 단전까지 침투할 뻔했다.
"내가 익힌 첫 무공으로 당신을 상대하겠소."
등에 멘 계도를 손에 든 잔월은 눈을 감았다. 원이 아닌, 치우침이 전혀 없는 둥근 구체가 심상에 떠올랐다.
'월영도법은 공간을 이용한 무공이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공간을 이용하는 무공인데 지금까지 평면만 떠올렸으니 본연의 위력을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 잔월이 강한 내공으로 펼쳤기에 고수 상대로도 효과를 봤지만, 일찍 깨달았다면 월영도법만으로 모든 적을 상대하고도 남았다.
잔월의 존재감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잔월은 분명히 앞에 있는데 존재감이 공손평천 뒤에서 느껴지기도 했다.
속을 정도는 아니지만, 집중력을 조금 갉아먹을 수준은 되었다.
"원래는 영결팔법이었는데 내가 만월을 만월과 공월로 나눠서 월영구법이 되었소. 그리고 지금은 아홉을 합치려고 하오."
공월, 신월, 아미월, 상현월, 영돌월, 만월, 휴돌월, 하현월, 잔월. 아홉이 평면이 아닌 공간에서 합쳐졌다. 잔월의 심상에 있던 구체에 빛이 깃들었다.
계도에 강기가 서렸다. 처음부터 내부에 서렸기에 눈으로 전혀 안 보였지만, 남궁창룡을 비롯한 고수는 전부 강기를 느꼈다.
공손평천이 판관필 두 개를 꺼냈다. 역시 강기를 머금은 두 판관필은 잔월의 계도와 쉴 틈 없이 부딪쳤다. 그러나 두 고수가 발산한 강한 기세가 충돌음까지 먹어버려서 큰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왜? 내가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잖아. 황제 자리를 너한테 물려준다니까. 넌 내가 쉽게 해칠 정도로 약하지도 않잖아. 왜 기를 쓰고 나를 적대해?"
공손평천의 악문 이 틈새로 새어 나온 말엔 화가 듬뿍 담겼다.
"독고 성은 선비족 후손이야. 네가 황제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내 손녀랑 혼인하고 성을 공손으로 바꿔. 그럼 넌 황제 할 수 있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손을 멈추고 저들을 죽여. 그럼 널 황제 시켜준다고. 내가 널 황제 시켜준다니까."
"내가 알기론 홍건군이 일어서고부터 죽은 사람이 천만 명이 된다고 하오. 그 많은 사람이 왜 죽었는지 아시오?"
"약해서, 약해빠지니까 죽은 거겠지."
"아니오. 세상을 다스릴 황제 자격이 있는지 검증한 거요. 수많은 목숨으로. 그렇게 많은 목숨으로 검증하여 막바지에 다다랐소. 그런데 당신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힘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한다고? 그럼 세상은 힘으로 돌아가게 되오. 힘을 제외한 수많은 고귀한 것들이 사라진다고."
"그게 뭐? 그런다고 세상이 망해?"
"내 자식과 후손에게 좋은 세상 물려주고 싶소. 내가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잖소."
공손평천 눈이 뻘겋게 충혈되었다. 잔월 계도에서 오는 충격보다 말로 주는 충격이 훨씬 컸다.
그러나 공손평천 역시 평생 황제 자리를 갈망한 자였다. 무형지독도 훔쳤고 무극환허인도 훔쳤으며, 괜찮은 무공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어떻게든 방법을 대서 훔치거나 빼앗았다. 비고의 수천 권 비급 중 삼 할 정도는 공손평천이 가주로 있을 때 얻어온 거였다.
잔월의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집만 점점 크게 키워갔다.
"어쩔 수 없구나. 너희를 다 죽여야겠다."
"상생상극(相生相剋) 멸건곤(滅乾坤)."
공손평천 머리 위에 둥근 원이 떴다. 원에 고르게 분포한 다섯 점이 서로 이어졌다. 오행신공의 절초 멸건곤이었다.
"전력을 다해."
무극존자가 외치면서 봉황내의를 펼쳤다. 봉과 황이 머리 위에 떠 오르더니 하나로 합쳐졌다. 처음부터 하나가 된 거랑 하나와 하나가 합쳐서 하나 된 건 위력이 열 배 정도 차이가 났다.
백원선사 머리 위에 백원이 나타났다. 잔월이 백원동에서 본 백원과 달리 근육이 울퉁불퉁하고 얼굴이 사나운 원숭이였다.
"제기랄."
구시렁대는 취접 머리 위에 빨간 나비가 나타났다. 취접이 딱 한 번만 펼쳐본 취접장의 절초 일접홍(一蝶紅)이었다.
예전에 광명좌사의 추산장을 받을 때 처음 펼쳤는데, 추산장이 아닌 일접홍의 반동에 내상을 입고 보름이나 누웠다.
당한백이 머리에 꽂은 은비녀를 뽑아 흑룡추산을 펼쳤다. 당한백의 견정혈과 호구혈에서 김이 뿌옇게 일었다. 흑룡추산을 펼치는 데 가장 중요한 두 혈도가 버티기 힘들다고 당한백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이었다.
흑룡은 뱀이 비웃을 정도로 작았다.
"쌍룡출해."
전칠과 엄복룡이 동시에 건곤십팔타를 펼쳤다. 건곤십팔타의 열여덟 초식을 특정 순서로 순식간에 펼치니 황룡이 나타났다.
엄복룡의 황룡은 웬만한 개는 쉽게 삼킬 크기인데, 타구봉법에 몰두한 전칠의 황룡은 당한백의 흑룡 정도 크기였다.
장군보의 머리 위에 태극이 떠 올랐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음양태극이었다. 음양이 서로 어울리고 섞이더니 강기로 된 검이 생겼다.
"혜검(慧劍)이다. 사부 마지막 깨달음이지. 난 서른 글자나 읽었어."
장군보의 자랑은 잔월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잔월 역시 광풍살을 펼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계도는 어느새 등의 칼집에 꽂혔고 잔월 양팔이 여느 때보다 더 빠르고 격렬하게 움직였다.
봉황내의, 쌍룡출해, 흑룡추산, 태극혜검, 백원노후, 일접홍, 광풍살이 공손평천을 향해 날아갔다. 그 위급한 순간에 공손평천이 웃었다.
"상극은 멸건곤인데."
거의 동시에 도착한 절초들이 공손평천의 원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방향을 바꿔 잔월을 덮쳤다.
"상생은 건곤변(乾坤變)이야."
공손평천이 지금까지 건곤대나이로 속였던 게 사실은 오행신공의 건곤변이었다. 건곤대나이와 다른 점이라면, 자신의 내공보다 약한 공격만 돌릴 수 있다.
건곤대나이는 기술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힘도 방향을 바꿔 돌려주지만, 건곤변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공격은 어찌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공손평천의 내공이 남은 여덟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는 뜻이다.
그때, 잔월 존재감이 황궁이 아니라 대도 전체를 꽉 채울 정도로 커졌다.
"잔월홍(殘月紅)."
잔월 머리 뒤에 있던 후광이 뭉쳐 둥근 구가 되었다.
봉황이 구체에 빨려 들어갔다. 백원은 물론 세 마리 용도 마찬가지였다. 취접의 붉은 나비와 장군보의 조금 찌그러진 검 역시 잔월 머리 위의 구체로 들어갔다. 광풍살 역시 구체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건곤변과 함께 공손평천이 쏘아낸 멸건곤도 잔월 머리 위 구체로 들어갔다.
"하하. 외숙공은 천재야."
옥녀공이 천지의 기운을 모조리 끌어와 전신 혈도와 경맥을 보호했다. 구체로부터 전해진 아홉 고수의 내공이 경맥을 타고 혈도에서 혈도로 흐르는데도 버텨냈다.
"기성해(氣成海)라."
잔월의 몸은 말 그대로 기의 바다가 되었다. 기성해로 돌린 아홉 기운이 기경팔맥 남은 여섯을 타통했다. 깨달음이 전혀 없이 힘으로 타통한 거여서 무공 위력은 강해져도 영원히 장삼풍처럼 세상의 진리를 몸으로 깨닫는 경지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잔월은 슬픔보다 환희를 느꼈다.
'큰 세상을 보는 것보단 다른 사람과 같은 세상을 보는 게 훨씬 즐겁지.'
기성해로 제압한 아홉 기운이 다시 구체로 돌아갔다. 머리 위의 구체가 일그러졌다. 종래에는 눈썹을 닮은 잔월이 되었다.
'과하면 결핍이 된다.'
동그란 구체가 과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여 위축했다. 종래에는 잔월 심상에 뜬 잔월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공손평천, 바른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강한 힘을 갖춰도 소용없다."
붉은 잔월이 공손평천을 덮쳤다. 공손평천은 두 팔을 벌리고 저항을 포기했다. 설사 이번 공격을 받아냈다고 해도 저항할 힘이 사라진다. 무공 모르는 자여도 공손평천을 쉽게 죽일 수 있다. 공손평천은 잔월에게 죽는 게 훨씬 멋지다고 생각했다.
'제길. 서두르지 말걸.'
공손평천의 십이경맥이 동시에 망가졌다. 잔월은 공손평천의 몸을 훼손하지 않고 경맥만 터뜨렸다.
'빚지는 건 죽어도 싫은데.'
온전한 시체를 남기게 된 공손평천은 빚진 기분이었다.
공손평천 입술이 달싹였다. 십이경맥이 이미 망가졌기에 진원을 끌어다가 남은 목숨을 태웠다.
[오행신공은 여기 감췄다. 부디 찾아내서 익히고 후세에 전해라.]
"잔월!"
장군보가 달려가 쓰러지는 잔월을 안았다. 당한백과 취접은 내상으로 손가락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
무극존자 역시 봉과 황을 체외에서 합체하며 무리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백원선사는 짧은 사이 십수 년은 늙었다. 얼굴 주름이 훨씬 깊어졌고 눈에 보이던 정심한 기운이 사라졌다.
"제자야, 개고기 먹고 싶구나."
두 거지 역시 바닥에 드러누웠다.
"남궁 도위, 확인해라."
남궁창룡이 다가가 공손평천 시체를 확인했다.
"폐하, 피가 전부 탔습니다."
"그럼 밖으로 나간다. 황궁에 불을 지르고 원 황제가 도망쳤음도 알려라. 투항하는 자는 직함 그대로 유지하여 아군으로 받아준다고 전해라."
주원장은 남궁가 무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처음엔 그저 빠른 공방이 신기했는데, 마지막에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을 보니 두려움이 가득 생겼다.
그러나 대전 밖으로 나온 주원장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전 앞 넓은 광장에 얼핏 잡아도 천 명을 훌쩍 넘을 숫자의 주검이 있었다.
"남궁 도위. 아는 거 있나?"
"당한백이라는 자의 소행 같습니다."
"이자들은 다 멸세교라는 혹세무민하는 마교의 종자들 아닌가?"
"혼자서 일반 병사 열 감당할 자들입니다."
"유기. 대책을 세워라."
유백온은 몸이 떨려 대답을 못 하고 억지로 허리를 굽혔다. 황제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건 불경이지만, 유백온도 주원장도 따질 기분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자기 목숨을 취할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다.
'좋은 세상 물려주고 싶다고 했지. 좋은 세상 만들자.'
玉女功 옥녀공과
氣成海 기성해가 다 했다
- 작가의말
이번 편이 주는 교훈은 초심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올챙이 적 기억을 잊은 공손평천 개구리는 초심을 잃지 않은 잔월 개구리에게 패했습니다.
그리고 단무전이 천재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단무전의 선견지명대로 금강불괴와 만독불침을 통해 천하제일이 되었습니다. 공손평천이 잔월에게 한 공격을 독으로 볼 수 있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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