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충·삼두사
"흑 장로. 정말 훌륭한 선택을 한 거요. 조금이라도 다르게 생각했다면 이후 크게 후회할 거요. 내가 보장하지."
당한백은 잔월이 강호 경험도 적고 인생 경험도 적음을 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생각이 깊지만, 인생을 우려서 나온 깨달음이 아니라 훌륭한 가르침의 소산이다.
"괜찮소. 오늘 일은 두고두고 곱씹을 거요. 내 잘못된 생각으로 큰 화를 빚는다면 그 책임을 피하지 않겠소."
"그렇다면."
"삼처사첩 얘기라면 됐소."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둘은 백충동에 이르렀다. 당한백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 가문이 독에 관해 더 잘 알고 독 다루는 솜씨도 오독교보다 나을 거요. 그러나 강한 독 만들어내는 건 오독교와 비교하기 힘드오."
"이 안에 어마어마한 독물이 있다는 뜻이오?"
"그렇소. 촉에 사는 일부 부족은 구덩이를 깊게 파고 안에 먹이를 잔뜩 넣소. 그럼 온갖 벌레와 짐승이 몰려오지. 그 벌레와 짐승을 먹으려고 또 벌레와 짐승이 모여드오. 그렇게 어느 정도 모이면 구덩이를 막아버리오. 그때부터 안에서 짐승과 벌레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거요."
"그게 독물이랑 무슨 상관이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상상 이상의 결과를 만들지. 최후의 승자가 독물이라면 어마어마한 독을 만드오. 원래는 물려도 제때 치료하면 살 수 있던 독이 냄새만 맡아도 목숨을 위협하는 독이 되는 거요."
"그럼 이 동굴이 구덩이와 같은 역할이라는 거요?"
"그렇소."
"밖에선 독성이 평범한 독물이라도 이 안에선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군."
"웬만한 독은 두렵지 않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소."
독 개미나 독거미 같은 것들은 고수여도 그 기척을 발견하기 어렵다. 조심에 조심을 거듭할 것을 서로 다짐하며 잔월과 당한백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독물이 적소."
"가을이니까. 만물이 소생하고 먹이가 귀한 봄에 유인을 시작하오. 여름 혹은 가을이면 결판이 나오. 거기에서 나온 독으로 맹수를 죽이면 겨우내 그 맹수 영역의 사냥감을 부족이 독차지할 수 있는 거요."
한참 걸으니 마 장로 시체가 보였다. 당한백이 시체를 살폈다.
[혈액 독이오. 혈액을 체내에서 굳게 만드는 독으로 해약이 없소. 물리면 열 호흡 안에 죽어버리니까.]
당한백이 소매에서 서각 가루를 꺼내 잔월과 자신 몸에 뿌렸다.
[독물도 영역이 있소. 최대한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겠소.]
잔월은 긴장을 놓지 않고 걸으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나 금강불괴인데. 독물이 아예 못 물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나 금강불괴라고 하기엔 잔월 몸엔 침이 꽂힌다. 아니라고 하기엔 무당에서 옥녀공 수련할 때 여섯 스승의 내공 잔뜩 실린 몽둥이도 잔월에게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
'구양진경은 소림 스님이 쓴 것이다. 불가의 가르침과 연관이 있겠지.'
한대붕의 타를 버리고 아만 남긴 붕산권이 생각났다. 구양진경에도 비슷한 구결이 있었다.
무타유아(無他維我). 타를 잊어 나를 지켜라. 한대붕이 바로 이 경지다.
유타유아(有他維我). 타가 있어도 나를 지켜라.
인타과아(因他果我). 타가 변하면 너도 변해라.
'그러니까 공격을 받든 안 받든 늘 금강불괴를 유지해야 한다. 금강불괴 최고의 경지는 상대 공격이 올 때만 펼치는 거지만, 일단 금강불괴를 늘 펼치는 경지부터 완성하자.'
'장삼풍께서 내가 완성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지. 그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장삼풍께서 말씀하신 완성이 내가 생각한 완성이 아니었구나. 내가 옥녀공을 제대로 익힌 건 맞는데, 구양진경과 결합하면 더 훌륭하게 익힐 수 있다. 이것 역시 완성이다.'
장삼풍이 말한 완성은 진정한 완성이었다. 잔월이 생각한 수준의 그런 완성이 아니었다.
잔월은 기성해의 움직임과 별개로 구양진경의 구결에 따른 진기의 움직임 하나 더 만들어냈다.
대주천반운(大周天搬運)이라고, 백회혈과 용천혈을 통해 천지의 기운을 반대편으로 보내는 운기 방식이었다.
'지금까지 옥녀공은 내가 외부의 타격에 대비할 때만 발동했다. 구양진경의 금강불괴체(金鋼不壞體)는 자면서도 몸을 보호한다고 했다. 기성해에 옥녀공에 금강불괴체까지 합치면 독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조금 앞에서 걷던 당한백은 뒤에서 느껴지는 세찬 흐름에 등골이 오싹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잔월이 눈을 반쯤 감은 채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운기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깨달음 얻어 수련한다고?'
잔월처럼 어려서부터 세뇌에 가깝게 넌 금강불괴에 만독불침이 될 거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시도하기 어려운 일이다. 근본 없는 단무전의 조기 교육으로 잔월은 주화입마나 심마에 관한 걱정이 없다시피 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잔월의 내공 흐름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잔월이 모르는 사이에 하나가 된 기성해와 옥녀공은 완성도 높은 심법이 되었지만, 그 위력은 부족했다. 거기에 구양진경이 섞이며 차츰 변화하는 중인데 잔월이 주도적으로 결합을 시도하니 그 진도가 빨라졌다.
갑자기 멈춘 잔월은 숨을 반 각 가까이 내쉬었다. 과식한 아이처럼 똥똥하게 부풀었던 잔월의 배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흑 장로. 좋은 거 있으면 나눕시다."
"독물에 물리지 않으려는 생각에 골몰하다가 뭔가 이룬 것 같소."
옥녀공과 금강불괴체가 합쳐졌다. 금강불괴체는 옥녀공과 달리 늘 몸을 보호한다. 잔월이 감지하지 못한 공격이 오면 금강불괴체가 일단 막아내고 곧바로 옥녀공이 발동한다.
작은 공격은 금강불괴체가 해결하고, 아직 성취가 부족한 금강불괴체가 해결할 수 없는 공격은 옥녀공이 해결한다. 옥녀공은 대성을 넘어 극성으로 가고 있기에 잔월의 내공이 허락하는 한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다.
잔월의 말은 당한백에게도 도움을 줬다.
'독을 다루는 가문에서 자라다 보니 머리가 굳었다. 독을 분석해 해독할 생각만 하고 아예 독에 당하지 않는 건 염두에 두지 않았구나. 피독주를 연구해 어떤 독도 접근하지 못하는 물건이나 무공을 만들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했구나.'
좋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당한백은 가슴에 꼭꼭 묻어뒀다. 공손용기를 찾아내 제거하는 게 우선이고, 여유가 되면 백충동의 강한 독물을 없애는 게 목표다. 잔월 덕분에 떠오른 생각은 이후 여유가 있을 때 고민해도 괜찮다.
'교주한테 뭔지 물어봤으면 좋겠지만, 방법을 알고 나면 나부터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것 같구나.'
당한백은 교주한테 비결이 뭔지 묻고 그에 연관된 것을 모조리 없애고 싶었지만, 알고 나면 자신이 흔들릴까 봐 묻지 못했다.
무곡신공 운기 경로는 어떻게든 강호에 퍼지게 되어 있다. 무곡신공을 익힌 자가 수백 명이 되는데 비밀이 지켜질 가능성은 아예 없다. 어쩌면 남궁가는 이미 운기 방법을 얻어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무곡신공을 익히게 하는 약물을 없애는 것이다.
물론, 약물을 없앤다고 끝이 아니다.
임조영의 손을 거치기 전 옥녀공처럼, 운기 구결만 알아서는 쓸모없는 게 무곡신공이다. 그러나 약물 도움 없이는 익히지 못하는 옥녀공을 임조영이 약물 없어도 어느 정도 익힐 수 있게 바꿨다.
자부심이 대단한 자들은 무극환허인 비급을 연구하여 무곡신공을 약물 없이도 익힐 수 있는 무공으로 바꾸려 할 것이다. 그렇기에 무극환허인 비급도 어떻게든 찾아서 없애야 한다.
'그게 아니어도 무곡산장과 연관된 일은 최대한 훼방 놓고 싶다.'
당한백이 무곡산장에 느끼는 증오는 잔월보다 훨씬 강렬했다.
[흑 장로. 흔적이 둘로 갈라졌소.]
[운 장로와 공손용기가 갈라진 거요?]
[공손용기가 독물에 당한 것 같소. 둘의 흔적 수준이 비슷하오.]
운 장로는 무공 고수가 아니다. 무공을 안 익힌 건 아니지만, 중원 기준으론 고수라고 부르기에 조금 부족하다. 그런데 두 곳의 흔적이 비슷한 수준이라면, 운 장로가 갑자기 강해졌다고 여기기보단 공손용기가 중독으로 정상이 아니라고 여기는 게 맞는다.
[강한 독물이 있는 쪽으로 가는 게 좋겠소. 공손용기를 만나면 좋고, 아니어도 독물을 제거할 수 있소.]
[흩어져 따로 가는 건 어떻소?]
[좋은 생각이 아니오. 공손용기뿐 아니라 독물도 우리 적이오. 만일을 대비해 서로 도움을 줘야 하오.]
잔월의 말에 당한백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공손용기가 중독된 것 같고,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독물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죄로 자신을 억누르고 살다 보니 가끔 주체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평소엔 알아서 조심했는데 잔월이 의지가 되니 경각심이 옅어지며 실수할 뻔했다.
오른쪽을 선택한 둘은 흔적을 따라 거침없이 움직였다. 걷다가 벽에 기댄 사람이 보였다.
[옷은 운 장로요. 그러나 공손용기일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하오.]
[점혈하는 게 좋겠소.]
잔월은 구양진경에 있는 구결에 따라 격공으로 점혈했다. 청람불면(淸嵐拂面)의 방식으로 내공을 상대 혈도로 스며들게 한 다음 매듭을 맺었다. 직접 타격하는 점혈과 달리 효과를 보는 혈도가 서른도 안 된다. 잔월은 두 개 혈도를 점혈한 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운 장로. 내 말이 들리오?"
운 장로가 머리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붉고 검고 푸른 얼굴을 보니 가망이 없어 보였다.
"누구시오?"
"공손용기 죽이러 온 사람이오."
"그럼 어서 돌아가시오. 여긴 무극존자가 와도 어찌할 수 없는 독물이 있소."
"어떤 놈이오?"
"뱀이오. 머리가 셋 달렸소. 대가리 쪽에 둘 있고 꼬리에도 하나 있소."
"그럼 교주는 어떻게 접근한 거요?"
"교주의 비결은 무공이오. 독이나 약 따위가 아니오. 난 공손용기를 죽이려고 여기로 유인한 거요. 무극환허인도 얻고 공손용기도 죽이는 것이오. 그럼 다음 대 교주 자리는 내 거라고 했소. 그런데 나한테 오른쪽 동굴로 가라고 했소. 왼쪽으로 가면 뱀이 있다고."
운 장로는 교주에게 속은 게 분했는지 이를 갈았다.
"교주가 그 무공을 언제부터 익혔소?"
"이십 년 정도 되는 것 같소."
"흑 장로. 실수가 없다면 교주는 최근 십 년 정도 기억만 지워졌을 거요. 그 전의 기억도 지워질 수 있지만, 아닐 수도 있소."
"속았네."
잔월은 화가 치밀었다.
"약한 척 불쌍한 척 나를 속인 거였어. 내 어머니를 팔아가면서 가족이라고 날 속였어."
운 장로 눈에 빛이 깃들었다. 회광반조의 현상이었다.
"너 연향이 꽤 닮았구나."
"내 모친이오."
"연향이 여기 있을 때 맨날 구박받았는데. 교주가 연향이 어미를 그렇게 좋아했거든. 그런데 연향이 세 살 즈음에 결국 병으로 죽었어. 그때부터 교주가 연향이를 학대했지. 단무전 아니었으면 죽였을지도 몰라."
"흑 장로. 일단 돌아가서 교주랑 소교주부터 제지해야겠소."
"삼두사 조심해. 삼두사는."
마지막 말을 못 마친 운 장로가 고개를 떨궜다. 잔월은 운 장로 눈을 감겨준 후 몸을 돌렸다. 그때 허벅지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당 대협. 독물이요."
"제길. 아무 기척도 없었는데."
당한백이 품에서 약을 꺼내 연신 입에 넣었다.
百蟲 백충동에 사는
三頭蛇 머리 셋 달린 뱀
- 작가의말
“삼두사 조심해. 삼두사는.”
마지막 말을 못 마친 운 장로가 고개를 떨궜다. 잔월은 운 장로 눈을 내리 쓸었으나,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운 장로 눈꺼풀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허벅지에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당 대협, 대물이오.”
“제길. 너 빼면 나보다 굵은 놈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한백이 무릎을 꿇고 좌절했다. 연신 비아와 그라를 꺼내 먹었지만, 지구력만 증가하고 굵기는 여전했다.
“나랑 비교하면 어떻소?”
“네가 나아.”
잔월은 환한 얼굴로 돌아서서 바지를 내렸다. 허벅지를 비비며 도발하던 상대는 황급히 바지를 올려 귀여운 그것을 감췄다.
“괴물이닷!”
도망가는 상대 목에 삼두사 문신이 있었다. 운 장로를 부끄러움과 자괴감으로 죽게 만든 범인은 오래 못 가고 쓰러졌다.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 괴물 두 글자만 반복했다.
- 헬스장에서 허벅지 부심 부리던 삼두사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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