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천·순양
"칠신병, 우릴 어떻게 찾았어?"
치료가 급했기에 알았다고 말하고 바로 작별했다. 붉은 머리 남자를 따라 땅굴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심마해 남쪽에 있는 남화산으로 나왔다.
"천리향 냄새. 색깔 머리들이 큰 싸움 났다고 해서 가봤는데 냄새 맡았다."
그간 신경을 안 썼더니 천리향이 묻은 가죽을 넣은 물통에 금이 생겼다. 온천 헤엄치며 물이 들어가 가죽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저들은 왜 공손평천을 죽이려 해?"
칠신병이 고개를 저었다.
"들었는데 너무 어려워 까먹었다. 멸세교 만든 사람이 호법 장로 할아버지다."
삼백 년 전이라고 했으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쯤 될 것 같았다.
"혹시 공손평천이 어디 있는지 알아?"
"몰라. 난 공손평천 본 적도 없어."
"왜?"
"여기 만 명 넘게 살아. 그리고 난 비슷한 놈들하고만 싸웠어. 센 놈과 싸우다 죽으면 안 되거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칠신병은 적당히 몸을 사렸다. 그저 싸우고 싶어 안달 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치밀한 놈이었다.
"난 화산 처음 봐."
시커먼 연기를 끊임없이 뿜어내는 화산은 무척이나 더웠다.
"곧 겨울인데 이렇게 더울 수 있다니."
아까 땅굴보다 더 더운 것 같았다.
"여긴 눈이 안 내려. 겨울에도 비만 와."
화산은 세 가지 색이었다. 밑은 나무와 풀이 많아 푸른색이었고 꼭대기는 연기와 바위로 검은색이었다. 둘 사이는 황갈색이었다. 황토천은 대부분 황갈색 바위 지대에 있었다.
"저기 황토천 있다."
"저기 연기 나는 곳?"
"응. 연기 난다고 꼭 황토천 있는 건 아닌데 황토천 있으면 꼭 연기 난다."
빼곡한 숲을 헤치고 황갈색 지대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둘은 경공을 펼치지 않고 천천히 접근했다.
"사람 없다."
누런 흙이 거품을 툭툭 터뜨리며 굳어갔다.
"이대로면 얼마 안 가서 마를 것 같은데?"
"맞아. 이 황토천은 곧 말라 사라질 거야. 다른 황토천 찾아야 해."
황토천은 고정한 위치에 계속 있는 게 아니라 무작위로 생기고 일정 기간 존재하다가 사라졌다. 거의 마르는 황토천은 치료 효과가 별로라며 칠신병은 다른 황토천을 찾았다.
"누가 공격하지 못하게 높은 곳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황토천 지역에선 싸우지 못한다는 규칙이 있다. 그런데 잘 안 지킨다. 잘 보이는 곳으로 가는 게 좋다."
둘은 황갈색이 검은색으로 변하는 곳까지 빠르게 올라갔다.
"저기 새것이다."
칠신병은 나무 막대기를 황토천에 밀어 넣었다. 바닥까지 닿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안 깊다. 넣어도 된다."
밧줄을 풀고 당한백을 안에 밀어 넣었다. 깊이를 측정하던 막대기는 가로로 놔서 당한백 턱을 받쳤다. 덕분에 당한백 머리는 황토천 밖으로 드러났다.
"그날 싸우다가 몇 대 맞았는데 내상을 입었다. 그래서 소교주한테 사부 말 잘 들으라고 타이르고 여길 왔다."
"시험은 어떻게 통과했어?"
"난 내상 입어도 내공 쓸 수 있다. 몹시 아프다뿐이지."
잔월도 그간 있었던 일을 간단히 말해줬다. 결국, 교주와 소교주를 죽였다는 말에 칠신병이 한참 침묵을 지켰다.
"믿는다. 사부는 옳다."
칠신병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틀이 지나 황토천이 조금씩 말랐다. 잔월과 칠신병은 당한백을 끄집어낸 다음 미리 봐둔 다른 황토천에 집어넣었다. 하루 더 지나고서야 당한백이 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흑 장로, 칠 대협. 어떻게 된 거요?"
잔월은 의문의 사내와 대결한 일 그리고 칠신병과 서역인 도움으로 황토천까지 온 일을 간단히 정리해 알려줬다.
"칠 대협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소. 이 은혜는 꼭 갚겠소. 그리고 흑 장로도 내상을 입은 것 같은데 어서 치료하시오."
"널 지키느라고 치료 못 한 거야. 약해빠진 놈."
칠신병의 타박에 당한백은 멋쩍게 웃었다.
셋은 시야가 트여 접근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곳 위주로 돌아다녔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조건에 부합하는 황토천을 찾고 잔월이 몸을 담갔다.
'아니, 여기에 왜 순양의 기운이?'
기성해의 흐름을 따라 몸에 훅 들어오는 순수한 기운에 잔월은 깜짝 놀랐다. 순양의 기운이 들어오자 기성해가 구양신공 운기 경로로 내공을 돌렸다.
예전에는 잔월이 의식적으로 구양신공을 펼쳐야 했는데 염라탕을 마시며 깨달음을 얻고 충맥과 대맥을 운기 경로에 포함한 이후로 기성해가 알아서 운기를 바꿨다.
운기를 바꾸자마자 용천혈로부터 강한 기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에 상응해 백회혈도 활짝 열렸다. 용천혈로 들어오는 기운처럼 순수하진 않지만, 백회혈로도 양의 기운이 썰물처럼 몰려왔다.
'그래. 꼭 해보고 싶었는데 이 기회에 하자. 문제가 생겨도 황토천이 치료해 줄 테니까.'
잔월은 순양의 기운을 구인류의 여덟 인으로 돌렸다. 예전에는 깨달음도 부족했고 내공도 부족하여 여덟 인을 함께 돌리는 게 쉽지 않았다.
깨달음도 충분하고 외부에서 기운이 물밀 듯 들어오는 지금은 여덟 인을 동시에 펼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여덟 인이 동시에 돌아가며 잔월의 기운이 순양과 순음으로 변했다. 순음이 혈도와 경맥을 치료하고 순양은 강화했다. 치료하며 약해진 혈도를 순양이 강하게 단련하고, 단련하는 과정에 다친 혈도를 순음이 치료했다.
잔월은 명정 상태에 들어 순양과 순음의 기운이 움직이는 경로를 머리와 마음에 새겼다. 두 기운은 아주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움직였다.
새벽이 밝아올 즈음, 잔월은 아쉬운 마음으로 운기를 멈췄다. 좀 더 오래 했으면 무극인을 얻을 듯했는데 들어오는 기운이 약해지더니 급기야 사라졌다.
'방법은 알았으니 다음 기회에 시도해보자. 기운이 센 황토천을 찾으면 돼.'
잔월이 들어간 황토천도 어느새 딱딱하게 굳었다. 잔월은 내공을 방출해 흙을 깨고 밖으로 나왔다.
밑에서 위로 부는 바람에 잔월 몸에서 누런 먼지가 펄펄 날렸다.
"흑 장로. 무릎 아래가 없는 자를 발견했소. 나무 지팡이 두 개를 짚고 움직이는데 나보다 빠르오."
당한백도 경공이 대단하다. 지팡이로 움직이는데 당한백보다 빠르다면 웬만한 수준이 아니다.
"전음으로 하지 않는 걸 보면 먼 거리에 있는 모양이오?"
"우릴 기준으로 감과 간 사이에 있소. 거리는 육 리 정도 되오."
"어두워진 다음에 움직이는 게 좋겠소."
셋은 공손평천으로 의심되는 자가 움직이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다. 다시 저녁이 되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었다.
"칠신병. 넌 여기서 기다려. 기척 들키면 안 되니까."
칠신병은 싫은 표정이었지만, 잔월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잔월과 당한백은 기척을 숨기고 조심스레 움직였다.
목적한 곳에 도착하니 부글부글 끓는 황토천에 커다란 머리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황토천 곁에는 굵은 나무 지팡이 두 개가 놓였다. 새로 만들었는지 지팡이 밑동의 자른 부분에 생기가 남았다.
[암기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소?]
당한백의 전음에 잔월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어서 빨라 보이는 거요. 암기하고 비교하면 몹시 느리오.]
섬전도가 빨라 보이는 건 은밀함과 부드러움이 잘 섞이고 예측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절대 속도는 웬만한 쾌검보다도 느렸다.
그때 황토천에 몸을 담근 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암기? 여긴 철이 귀해서 암기 쓰는 자가 적은데. 그리고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운은 뭐지?"
암기는 잃어버리면 끝이다. 망가져도 끝이다. 만들기도 병장기보다 훨씬 어려워서 철이 귀한 심마해에는 암기 쓰는 자가 적었다.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는 뭐지?'
잔월은 자신이 공손평천을 만난 적 있는지 고민했다. 그러나 제갈속 말에 따르면 공손평천은 십여 년 전에 심마해로 들어온 이후로 떠난 적이 없었다.
"공손평천 개라면 어서 덤비거라. 개고기 안 먹은 지 오랜데. 네놈들 고기로 오늘 포식해야겠다."
잔월과 당한백은 손가락으로 허공에 글을 써서 대화했다.
- 내가 흑룡추산을 펼치겠소. 보호해 주시오.
- 차라리 내가 공격하는 게 나을 것 같소.
- 흑 장로는 초식 펼친 다음 잠깐 쉬어야 하오. 그때 저자가 덮치면 난 막을 자신이 없소.
그때 사내가 지팡이를 짚고 둘이 있는 곳을 덮쳤다. 황토천에서 나오는 연습만 수십 년 한 것처럼 잔월과 당한백이 반응도 못 했다.
오십 장이나 되는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잔월이 앞으로 뛰쳐나가고 당한백은 암기 하나를 오른손에 잡고 느리게 뒤를 따랐다.
'정노월(井撈月).'
미처 계도를 뽑지 못한 잔월은 통비권의 정노월을 펼쳤다. 원숭이가 우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는 다급하면서도 신중한 손놀림에서 영감을 얻은 초식이다.
펑 소리와 함께 잔월 몸이 뒤로 사정없이 튕겼다. 잔월 양손에 주먹을 부딪친 사내는 전혀 느려지지 않은 속도로 당한백을 덮쳤다.
무릎 아래로 다리가 없는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무극존자!"
당한백은 손에 든 암기를 상대 명치로 던졌다. 머리나 목을 겨누면 쉽게 피할 수 있고 심장을 노리면 상대가 쉽게 막을 수 있다. 피하기도 어렵고 상대가 예상하기 힘든 명치를 노리는 게 가장 효과가 좋다고 짧은 순간에 판단했다.
암기를 던진 후 양팔을 빠르게 휘둘러 난발초(亂拔艸)의 수비 초식을 펼쳤고 백화만개로 상대 내공을 흩트릴 준비를 했다.
톡 소리와 함께 당한백이 뒤로 밀려나고 사내도 몸을 멈췄다.
"잔월? 네가 여길 어떻게?"
무릎 아래가 없는 사내는 공손평천이 아닌 무극존자였다. 당한백은 짧은 접촉 순간에 넘어온 강대한 내공을 어렵게 흩어버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왜 이렇게 강해졌어? 너 설마 심마해 무공 익힌 거야?"
"아니오. 들어온 지 며칠밖에 안 되고 천주봉 무공은 하나도 익히지 않았소."
무극존자는 글자를 읽지 못해 천주봉 무공을 익힐 수 없었다. 그리고 꼭 익히고 싶을 정도로 간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다리는 어떻게 된 거요?"
"몇 년 전에 내가 공손평천을 기습했다. 그리고 평수를 이뤘지. 그 뒤로 서로 기습 기회만 노렸다. 얼마 전에 운 좋게 내공이 한 단계 올라서 자신 있게 찾아갔지. 그런데 더러운 놈이 독을 쓰더라고. 다행히 그놈도 중독되어서 목숨은 부지하고 다리만 잘렸다."
"흑룡곡 당한백이오. 무극존자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겨우 기운을 수습한 당한백이 무극존자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다."
잔월은 가죽 주머니에서 무극환허인 하편을 꺼냈다.
"무곡산장에서 찾은 거요."
무극환허인을 받아 든 무극존자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잔월에게 돌려줬다.
"내용을 읽어 줘."
잔월이 이백 글자를 쭉 읽자 무극존자가 허허롭게 웃었다.
"가짜야. 표지 색깔이 어쩐지 다르더라고."
'제기랄. 공손완아가 외운 무극환허인 하편도 가짜였구나. 상편도 가짜 하편도 가짜.'
그래도 대부분 구결이 진짜였기에 아무 쓸모도 없는 건 아니었다. 잔월은 무극환허인 하편을 손바닥 사이에 끼운 다음 내공으로 태워버렸다.
黃土泉 황토천에
純陽 순양의 기운이 있다
- 작가의말
“그래, 오빠 혼자서 미용에 좋다는 황토팩 했다는 말이지?”
반지 오해는 풀렸다. 그러나 스포 절대 안 한다고 다짐하며 떼쓰는 천희연에게 남은 이야기를 들려줘야 했다.
“뭔 소리야. 정력에 좋다고 해서 한 거지. 황토천엔 순양의 기운이 있었어.”
“진짜? 그럼 나 먼저 씻을게.”
잔월은 엄습하는 오한에 다급히 말했다.
“아니, 거짓말이었어. 칠신병이라는 가이드가 거짓말한 거였어.”
“어떤 년이야? 정력에 좋은지 아닌지 알게 해준 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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