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월영·도청
원래 점심으로 끝내야 할 잔치가 저녁까지 이어졌다. 새해 첫날에 왕 원외와 단무전의 결의가 겹쳐 잔치 열기가 식을 줄 몰랐다.
"흑표, 아까 그 여자애 진짜 이쁘다. 그치?"
공손무기는 막내딸과 총관 세 명 그리고 무사 스물을 데리고 왕가장에 방문했다. 공손무기의 막내딸 공손완아는 옷을 갈아입는다고 공손무기보다 반 시진이나 늦게 나타났다.
버드나무 잎을 연상케 하는 진하면서도 얇은 눈썹 밑에 별을 담은 호수와 같은 눈이 반짝였다. 코가 좀 작은 게 흠이지만, 아직 어린아이라 귀엽기만 했다. 볼은 연지라도 찍은 듯 붉었고 입술은 볼보다 훨씬 붉었다.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하얀 이가 무척 고왔다.
"너는 별로라고? 왜? 난 지금까지 본 여자애 중에서 가장 이쁘던데."
잔월과 함께 놀던 아이들은 점심을 먹은 후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왕가장은 왕 공자가 병으로 혼인을 하지 않았기에 또래 아이가 없었다. 북채를 제외한 곳의 눈은 다 쓸어버려서 잔월은 흑표와 함께 별채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너 그 여자애 지금 어딨는지 찾아낼 수 있지?"
흑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말만 아니면 웬만해서 다 알아듣는 흑표였다. 단무전은 영물이라고 부를만한 짐승을 꽤 봤기에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잔월 역시 흑표가 자기 말을 알아듣는 데 의문을 품은 적 없었다.
"가자. 그 여자애 찾아서 같이 놀자."
잔월과 달리 흑표는 공손완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느릿느릿 움직였다.
미적거리는 흑표를 재촉해 서쪽 별채로 갔다. 잔월이 현재 머무는 북채는 사실 왕 원외의 별채 중에서 가장 초라했다. 단무전이 독초와 약초를 다루느라 동떨어진 곳이 필요해서 귀한 손님임에도 북채에 머물게 된 것이었다.
서채는 가산과 연못 그리고 화원까지 있는 무척 멋진 별채였다. 겨울이어서 조금 삭막했지만, 여름만 되면 백화가 만발하고 연못에 다양한 물고기들이 노니는 별천지였다.
"가만히 뒤에 가서 깜짝 놀래주는 거야."
잔월의 말에 흑표는 몸을 활처럼 구부리고 조심조심 걸었다. 잔월도 흑표를 흉내 내며 느리게 서채의 가장 큰 집으로 다가갔다.
살금살금 접근한 잔월은 키보다 훨씬 높은 창문을 난관으로 맞이했다. 공손완아가 안에 있는지 몰래 확인하려 했는데, 창문이 쓸데없이 높은 곳에 달렸다.
"가주. 내게 할 말이 없습니까?"
창문으로 왕 부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잔월은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왕 부인이 잔월에게 무섭게 군 적이 없지만, 모든 사람이 친절한데 혼자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래서 잔월은 왕 부인이 유독 어려웠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공손무기의 목소리에 잔월은 긴장이 조금 풀렸다. 잔치 내내 잔월에게 친절하게 대했던 공손무기였다. 질문도 많이 하고 잔월의 질문에도 진지하게 대답해줬다. 잔월에겐 무척 상냥한 아저씨로 기억되었다.
"왕가장이 무력도 없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전대부터 쌓은 인망과 재물이 모이는 족족 가난한 자를 돕는 데 써버린 선행 때문입니다. 재산은 좀 있지만, 전답을 빼면 귀물이라곤 없죠. 그런데 갑자기 벽사주가 생겼다는 소문이 퍼지면 관과 도적들이 왕가장을 넘볼 게 뻔하잖아요. 설마 무곡산장 가주께서 이런 얕은 이치도 모르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사람들 없는 자리에서 몰래 건넸어야 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어릴 적부터 주목받기를 즐겼잖으냐."
"가주. 내가 멍청한 여자로 보입니까?"
왕 부인의 목소리에 담긴 분노가 전혀 줄지 않았다.
"연우야."
"내 남편과 아이를 처리하고 왕가장을 삼키려고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세요."
"오해가 있구나. 형봉이는 내 하나밖에 없는 생질이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우리 형제가 널 얼마나 아꼈는데. 내가 네게 해코지하면 형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무곡산장의 가주 공손무기는 남자 형제 중 막내였다. 왕 부인 공손연우는 막내이자 유일한 여자 형제였다. 공손무기의 말대로, 아무리 가주 신분이라고 해도 공손연우에게 해코지하면 형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는 형봉이가 가망 없다고 해서 매제에게 손을 썼던 거다. 이젠 형봉이가 다 나을 텐데 어찌 매제를 해할 생각이나 하겠느냐."
공손무기의 말에 왕 부인은 화를 누그러뜨렸다.
왕형봉이 처음 병에 걸렸을 때 공손무기를 비롯한 오라비들이 무던히도 애썼다. 아무리 애써도 차도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왕 원외를 해치고 낙양에서 인망이 드높은 왕가장을 차지할 생각을 했다.
공손연우 역시 그 계획에 동의했었다. 그러다 아들의 병세에 차도가 생기자 마음이 바뀌었다. 심약한 아들에겐 든든하게 버텨줄 부친이 필요했다.
"왕 원외는 첩도 안 들이고 아이도 못 낳는 나에 대한 의리를 지켰어요. 게다가 봉아는 아직 어려서 부모의 그늘이 필요해요. 무곡산장이 재물이 그렇게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이제부턴 예전처럼 지냈으면 해요."
첫 아이를 낳고 아기집을 다쳐 더는 회임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왕 원외는 주변의 권고를 뿌리치고 첩을 들이지 않았다.
"벽사주는 어떡할 거야?"
"몰래 빼앗아서 봉아에게 줘야죠. 외인한테 줄 귀물이 아니잖아요."
"그럼 이 일은 오라비에게 맡기거라. 내가 꼭 뒷끝 없이 처리하마."
"왕 원외나 대부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요."
"벽사주를 조금 더 다듬으면 된다. 한쪽 면만 다듬으면 벽사주의 색이 변하니 아무도 모를 거다."
'아저씨랑 아줌마 나쁜 사람이구나.'
잔월은 둘에게 들킬세라 조심스럽게 서채를 벗어났다. 평범한 아이였다면 공손무기에게 들켰겠지만, 잔월은 혈도가 굳어서 기운이 미약하기에 공손무기의 감각에 걸리지 않았다.
'외숙공이 받은 이쁜 구슬을 빼앗겠다고? 줬다 뺏는 게 어딨어.'
나이에 비교해 영특하지만, 잔월은 갓 네 살이 된 아이였다. 경천동지할 음모의 내막을 들었지만, 제대로 이해한 내용은 벽사주를 빼앗겠다는 부분뿐이었다.
그것도 그냥 애들이 줬다 뺏는 정도로만 여겨 크게 개의치 않았다.
'외숙공한테 다 일러바칠 거야.'
잔월이 북채로 돌아가고 조금 지나 단무전도 돌아왔다. 잔월은 단무전이 챙겨온 음식을 먹으며 고자질했다.
"외숙공, 공손 아저씨가 벽사주를 빼앗겠대요."
단무전은 미리 짐작했던 일이라 놀라지도 않았다.
"걱정 말아라. 벽사주는 왕 공자에게 몰래 줬다. 빼앗고 싶으면 왕 공자를 찾아가라고 하지 뭐."
"공손 아저씨는 왕 공자 외숙이잖아요. 외숙이 생질 물건을 빼앗아도 돼요?"
"안돼. 안되고말고."
벽사주를 빼앗길 일이 없다는 생각에 잔월은 서채의 일을 단무전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잔월이 말하지 않아도 단무전은 공손무기를 의심했다.
심장에 한기를 몰래 넣을 수 있는 고수는 흔하지 않다. 왕 원외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라면 가까운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왕 원외의 죽음으로 이득을 얻는 자여야 한다. 꼭 공손무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세 조건 모두 부합하는 공손무기의 혐의가 클 수밖에 없었다.
"잔월은 여기가 마음에 들어?"
잔월은 고개를 분주히 끄덕였다. 왕 부인 빼면 다 친절했고 음식도 맛있었다. 그리고 책이 무척 많았다. 모르는 글자가 많아 마음껏 읽을 수는 없었지만, 글자를 익혀 저 책들을 다 읽으면 세상에 모르는 게 없다는 생각에 신났다.
"외숙공이 중요한 일이 있어 그러는데, 잔월은 흑표랑 함께 여기 머무는 건 어때? 중요한 일을 끝내면 외숙공도 돌아와서 잔월이랑 함께 여기서 살 거야."
단무전 혼자라면 아무 산에나 가서 집을 짓고 살아도 되지만, 아이는 사람 사이에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헤어져야 해요?"
잔월이 눈물을 글썽였다. 태어나 기억이 생기고부터 외숙공과 하루도 떨어진 적 없었다. 그저 의견을 묻는 것뿐인데, 잔월은 이별이 정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물을 머금었다.
"잔월이 생일 두 번 세면 돌아올 거야.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거든."
잔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잔월 생일 즈음이면 왕 공자의 병이 다 나을 거야. 치료 끝나면 외숙공이 잠깐 다녀올게. 일이 잘 풀리면 더 빨리 올 수도 있으니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돼."
당장 이별하는 게 아니라는 말에 잔월은 금세 기분이 풀렸다.
"잔월, 우리 보물 숨기기 놀이할까?"
보물 숨기기가 뭔지도 모르지만, 놀이라는 말에 잔월은 신났다. 아껴 먹던 다과를 급히 입에 쑤셔 넣었다.
"여기 보면 가죽 두 개 있지? 이걸 함에 넣어서 땅에 파묻는 거야. 그리고 그걸 나랑 잔월만 아는 거지. 이후 잔월이 글자 많이 익혀서 어려운 책도 막 읽을 때면 꺼내도 돼."
단무전은 옥녀소수공과 섬전도의 구결이 적힌 가죽을 땅에 묻기로 했다. 직접 가지고 다니자니 빼앗길 위험이 너무 컸고, 어린 잔월에게 맡기려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좋아요. 땅은 내가 팔게요."
나무뿌리를 피해 널찍한 공터 중간에 땅을 파고 나무함을 묻었다. 곡괭이나 삽 같은 공구를 사용하지 않고 나무 꼬챙이와 흑표의 발톱으로 파냈다.
함을 묻은 후 땅을 다지고 그 위에 단무전의 도움을 받아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었다. 단무전이 내공까지 써가며 눈을 다졌기에 무척 크고 튼튼한 눈사람이 생겼다.
"잔월아, 오늘 보물 숨긴 일은 우리 셋만의 비밀이야. 우리 셋을 제외하면 누구라도 알아선 안 돼."
"누구한테도 말 안 할게요."
비밀이 생긴 잔월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잔월과 흑표 모두 흙투성이가 되었다. 장작을 태워 솥에 물을 끓인 단무전은 잔월과 함께 나무 욕조에 들어가 목욕했다. 흑표도 물 묻히는 걸 싫어하지 않고 욕조에 텀벙 뛰어들었다.
"잔월은 커서 어떤 사람이 될 거야?"
"금강불괴에 만독불침의 고수가 될 거예요."
"진짜? 그건 외숙공이 늘 하던 말이잖아. 다른 소원은 없어?"
"외숙공처럼 아픈 사람도 척척 치료하는 훌륭한 사람이요."
잔월 대답에 단무전은 크게 웃었다. 만독불침을 이루려고 하나뿐인 여동생을 오독교 소교주 첩으로 보냈다. 묘연향을 통해 옥녀소수공을 배워 금강불괴를 이루려 했지만, 묘연향은 죽음이 정해지고 나서야 구결을 알려줬다.
욕심부리던 자신이 아니라 잔월이 금강불괴와 만독불침을 이룰 것으로 생각하니, 명명 중에 하늘의 뜻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부터 침술 가르칠게. 잔월도 의술 배워 신의가 되는 거야."
殘月嬰 잔월 아기
盜聽 엿듣다
- 작가의말
하늘의 뜻이 아니라 조연의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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