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속승·지도
며칠 더 지나면 봉황산에 온 지 일 년을 꽉 채우는 시점에 불청객이 나타났다. 커다란 덩치에 손발이 큼직하고 귓불이 축 늘어진 부처상을 한 스님이었다.
"시주, 아니지. 소형제, 여기 혹시 무극존자 계신가?"
"가출했어요. 스님이에요?"
"스님 아니라네."
"와, 대머리다."
잔월의 말에 스님 차림을 한 손님이 울상을 지었다.
"스님 하다가 어제 그만뒀네. 대머리는 아니라네. 십 년 동안 머리 길러본 적 없어서 확신은 힘들지만, 아마 머리가 풍성하게 자랄 걸세."
"나이 많아요? 말투가 왜 그래요?"
"내가 소림사에서 나이 든 스님하고만 지내서 그래."
소림이라는 말에 잔월이 기대를 품고 질문했다.
"무공 강해요?"
스님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나도 모른다네. 십 년 전에 무극존자한테 지고 소림사에 가서 중노릇 했지. 약속대로 무공도 안 수련하고 내공도 쓰지 않았네. 십 년 동안 내공과 무공을 다뤄본 적 없어서 지금 실력이 어느 정돈지 가늠하기 힘들다네."
그때 시장에 갔던 셋이 돌아왔다. 곧 겨울이어서 장작을 장만해야 했다. 직접 산에 올라 나무를 베어 가져왔지만, 전부 생나무여서 태우면 연기가 심했다.
그래서 장작을 사기로 하고 셋이 시장으로 갔다. 과장 좀 보태서 작은 집채만 한 장작을 멘 셋이 헐떡거리며 산장 문 앞에 퍼더버렸다.
"대형, 손님 왔어."
스님이 진선을 향해 반장하다가 급히 포권으로 바꿨다.
"대머리 아냐. 소림사 스님이었대."
강호에는 소림과 아미 그리고 종남의 명성이 대단했다. 그러나 편벽한 촉의 땅에 있는 아미파와 달리 소림과 종남은 강호와 세속의 풍랑을 피하지 못했다.
십여 년 전 소림사는 유복통의 명교에 공격받았다. 이유는 소림사가 원 황실의 명을 받고 홍건군의 군대를 막은 적 있기 때문이었다.
소림은 항거하는 대신 중요한 경전을 수습해 하북 경내에 있는 북소림사로 도망쳤다. 그러나 하북에서 봉기한 다른 홍건군의 공격을 받아 또 도망쳐야 했다.
한림아의 세력이 크게 위축하여 안휘 경내의 작은 땅에 머무르자 소림은 다시 숭산 소실봉으로 돌아갔다. 원 황실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과거의 성세를 되찾아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진선의 말투는 무척 차가웠다. 홍건군의 한 갈래인 천완군의 일원으로서 원 황실을 돕는 소림사가 반갑지 않았다.
"십 년 전에 무극존자와 비무해서 졌네. 그때 십 년 기약을 맺었는데, 이곳에 계신단 말을 듣고 다시 비무하러 왔다네."
"언질도 없이 떠난 지 반년이 됩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여기서 신세 좀 져도 되겠나? 내가 십 년 동안 소림사에서 스님 하면서 무공 한 초식도 수련하지 않고 내공 수련도 안 하면 다시 비무해준다고 약속했거든."
진선은 처음과 달리 스님에게 호감이 생겼다. 소림사에 들어간 것도 비무에 져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게 분명했고, 무극존자가 약속을 지키리라 철석같이 믿는 걸 보면 본인도 약속을 잘 지키는 성품임이 틀림없었다.
"아무 빈방이나 쓰시면 됩니다."
"고맙네. 그리고 나 이제 스님 아니니까 고기 먹어도 된다네."
스님은 말을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커서 문으로 들이기 힘든 장작을 풀어 안으로 나르려는데 스님이 말렸다.
"공짜로 얻어먹기도 그러니 내가 도움 좀 드려야겠네."
스님은 셋이 낑낑거리며 겨우 메고 온 장작더미를 한 손으로 번쩍 들었다. 무게를 가늠하고 나서 바로 안으로 던졌다. 장작더미는 반 장이 넘는 담벼락을 가볍게 넘어갔다.
쿵 소리를 예상하고 모두 이마를 찌푸렸지만, 아무 소리도 없었다. 어느새 안으로 들어간 스님이 장작더미를 손으로 받은 거였다. 남은 두 더미도 똑같은 방식으로 안에 던졌다.
"장작을 어디에 쌓아두려는 게인가?"
"저기요."
"저긴 지대가 낮아서 눈이 녹기라도 하면 장작이 젖을 걸세. 내 생각엔 저기가 나을 텐데."
"왜요?"
"내가 소림사에서 십 년 부엌 지기로 지냈다네. 소림사에선 다 장작을 저런 곳에 쌓아두지. 이유는 나도 모른다네. 생각해본 적도 물어본 적도 없거든."
"그럼, 저기에 쌓도록 하겠습니다."
진선은 언제 차갑게 대했냐시피 스님의 말에 고분고분했다. 그러나 일행이 장작을 묶은 밧줄을 풀려고 접근하기도 전에 스님이 일을 끝냈다.
부드럽게 손목을 돌리며 장작더미를 때리니 장작들이 날아서 차곡차곡 쌓였다. 마치 자로 잰 듯 가지런히 쌓인 장작에 잔월 일행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이게 진짜 되네? 상상만 했었는데."
정작 제일 놀란 사람은 스님이었다. 십 년 동안 초식 수련도 내공 수련도 안 하고 맨날 상상만 했었다. 그런데 상상했던 일이 쉽게 이뤄지니 어안이 벙벙했다.
"스님, 아니 대협. 제자 받을 생각 없습니까?"
담두천이 실실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자네들은 무극존자의 제자 아닌가?"
"배사지례를 올린 적도 없고 초식은커녕 자세조차 한 번 잡아준 적 없습니다."
"그래도 무극존자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봉황산장에 온 지 일 년이 다 되는데 초식은커녕 지도 한 번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수련에 한창 몰두해야 하는 시기가 황폐되었죠. 제자로 안 받으시더라도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일초반식이라도 가르쳐 주시면 평생 은혜를 가슴에 품고 살겠습니다."
잔월은 담두천의 말솜씨에 입을 딱 벌렸다. 둘이 맨날 실없는 소리만 주고받아서 저렇게 훌륭한 언변을 갖추었는지를 몰랐다.
"그래. 그럼 자네들이 익힌 무공을 보여주게. 내가 조언을 하지."
스님이 진선을 바라봤다. 장유유서라고, 가장 나이가 많은 진선부터 봐줘야 할 것 같았다.
"저는 무공을 익힌 적 없는데요."
내공을 배운 적도, 초식을 익힌 적도 없다. 전투에 필요한 투로를 배우긴 했지만, 그건 무공이라고 하기엔 너무 조잡하고 간단했다.
"그다음은 누군가?"
한자강이 가전 무공을 선보였다. 스님은 한자강이 펼친 무공을 보고 주먹 쥐는 법과 호흡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혼연일체의 구결도 전수했다.
혼연일체(渾然一體)는 몸이 늘 하나가 되는 법이었다. 내공도 아니고 무공 초식도 아니다. 그저 무학의 이치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한자강은 물론 남은 셋도 들으면서 깨우치는 게 많았다.
"어떤 방위에서 어떤 공격이 들어오더라도 최소 세 개 선택은 있어야 하네. 반격, 수비, 회피. 반대로 공격할 땐 상대의 선택을 제한해야지. 피할 수밖에 없는 공격, 막을 수밖에 없는 공격. 이런 거로 상대의 혼연일체를 깨서 반드시 적중하는 공격에 이르는 게 초식이고 투로라네."
"자넨 외울 필요 없네. 이미 혼연일체를 이뤘으니까."
눈을 감고 웅얼거리는 잔월에게 스님이 말했다.
"어떻게요?"
"그건 나도 모르지. 자네 나이가 몇인가?"
"열한 살하고 반이요."
"내가 십이 년 수련하고 혼연일체를 이뤘네. 자넨 천잰가 보군."
스님의 눈에는 질투나 시기와 같은 감정이 한 톨도 섞이지 않았다. 순수하게 감탄하는 스님에게 잔월은 호감이 커졌다.
"그리고 자네들도 구결을 억지로 외울 필요가 없네. 이 구결은 나한테 맞게 만든 거야. 자네들은 나랑 다르니까 요점만 알고 직접 알맞은 구결을 만들어내게. 내 구결은 그저 조금 참조만 하게나."
다음으로 담두천의 무공을 봐줬다. 담두천은 자신이 익힌 육합권을 열심히 펼쳤다. 잔월이 보기에도 지금까지 펼친 가운데 가장 출중했다.
"그냥 육합권이 아니구만. 명문이 오랜 세월 다듬은 무공이 틀림없네. 내가 손봐줄 부분은 전혀 없다네. 그 육합권에 혼연일체의 무리를 섞으면 대단한 무공이 될 걸세."
마지막으로 잔월이 나섰다. 담두천한테서 배운 육합권을 시전하자 스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발을 허우적거렸다.
"내가 배우는 게 많네. 담 시주, 아니, 담 소형제는 잔월 소형제의 경지를 목표로 수련하게. 하지만 똑같이 하라는 말은 아니야. 사람마다 신체 조건이 다른데 무조건 따라 하는 건 오히려 독이 되네."
담두천의 요구에 잔월은 육합권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시 펼쳤다. 담두천은 이마를 찌푸리고 고민하다 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대협. 아무리 봐도 특별함이 안 보입니다. 오히려 저보다 힘이 없고 초식 펼치는 속도도 느려 보입니다."
스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일세. 그러나 아까 내가 했던 말을 상기해 보게나. 혼연일체가 뭐라고 했지?"
"상대의 공격을 받을 때 세 개 선택지가 있도록 몸을 가누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무공도 그렇고 학문도 그렇고. 선생이나 사부가 모든 걸 가르쳐줄 수는 없네. 선생의 것이 모두 맞는 것도 아니고, 누누이 말하다시피 사람마다 다르다네. 하나를 배웠을 때 그걸 하나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곳에 적용해보는 도전 정신이 매우 중요하다네."
스님은 손으로 잔월을 가리켰다.
"내가 아까 잔월 소형제가 혼연일체를 이뤘다고 하지 않았나? 방금 펼친 육합권에 혼연일체가 이미 섞여 있었네. 공격받을 때는 물론, 공격할 때도 허초, 실초, 양공(佯攻 - 거짓 공격), 성동격서 등이 있다네. 잔월 소형제의 육합권은 언제든 허초나 실초를 쏟아낼 수 있고 양공을 하거나 성동격서를 할 가능성을 품었다네."
수비뿐 아니라 공격에도 혼연일체가 적용될 수 있었다. 담두천은 머리가 윙윙 울렸다. 스님이 훌쩍 다가가더니 혈도 몇 개를 가볍게 쓸었다. 담두천이 선홍빛 피를 한 모금 뿜어내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 내 탓이야.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받아들이면 가끔 이렇게 심마가 생긴다네."
오성이 조금 부족한 진선이나 한자강은 괜찮았지만, 담두천은 스님의 가르침을 다 이해했다. 지금까지 무공에 관해 쌓아온 것들이 한꺼번에 쓸려나가자 그만 심마가 찾아왔다.
다행히 스님의 대처가 적절했고 담두천이 내공을 쌓지 않은 몸이었기에 큰 위험은 없었다.
잔월은 머리로는 몰라도 몸으로 이미 이룬 경지기에 아무렇지 않았다. 한자강이 완치하고 나서부터 냉대를 받던 침이 담두천 목과 가슴 혈도에 꽂혔다. 담두천의 호흡이 점점 고르게 변했다.
"오늘 잔월 소형제 덕분에 새로 깨우친 게 있다네. 보답으로 초식 하나 알려주겠네. 초식 이름은 없다네. 소형제들이 알아서 만들게나."
스님은 넷의 수준에 맞춰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품은 맨손 초식을 하나 전수했다. 초식의 기본 뼈대를 가르치고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변화와 허초를 세세히 알려줬다.
還俗僧 중노릇 그만둔 스님
指導 가르침을 내리다
- 작가의말
소림에서 불 때다 온 스님.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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