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독·해독
절간은 붉은 벽에 하얀 처마를 했고 처마 밑에 눈에 잘 안 띄는 부분은 노란색으로 칠해졌다. 지붕은 기와 대신 돌을 다듬어 만들었다.
잔월은 물론 천희연도 처음 보는 건축 양식이었다.
절간 문으로 들어가니 불상을 모신 불당이 바로 나타났다. 불상이 놓인 단상을 지나니 문이 하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상에 덩치는 큰데 뼈와 살만 남은 노인이 느린 숨을 쉬며 누워있었다.
"내공을 주입하면 독이 날뜁니다."
노인의 제자로 추정하는 스님이 말했다. 잔월은 내공을 주입하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그저 손가락으로 완맥을 짚었다. 맥박이 조금 느린 걸 제외하면 모든 게 정상이었다.
'독은 인체에 해로운 기운을 말한다. 독이 있으면 몸은 알고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이 노인의 맥은 조금 느린 걸 제외하면 전혀 문제없다.'
이미 발작하여 작용 중인 독인데 아무런 신체 반응도 없는 건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굳이 독이 아니라 몸에 좋은 음식을 많이 먹어도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게 사람 몸이다.
오 년이나 되는 기간 깨지 못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독이라면 몸이 그에 상응하는 증상을 보여 무슨 독인지 단서를 줘야 이치에 맞는다.
"중독 맞습니까? 맥이 정상입니다."
"오독교 교주가 독이 맞는다고 했습니다. 본인도 독 이름을 모르고 해독에 실패했지만 말입니다."
잔월은 기침요결을 머리에 떠올렸다. 기침요결은 그냥 증상과 해결 방법을 적은 일반적인 의서와 달랐다. 병의 뿌리를 파헤쳐 처음 보는 증상도 해결책을 찾아내게 하는 어마어마한 책이었다.
비록 단무전이 창졸간에 적어서 중언부언이 많았지만, 잔월은 단무전의 대화 습관을 잘 알기에 이해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천 소저, 제 내공을 감지해 보세요.]
천희연은 잔월의 기운에 주의를 기울였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 전음으로 대답했다.
[내공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잔월은 몸에 최대한 많은 음양환을 만들었다. 잔월 몸에서 기운이 엄청 복잡하게 흘렀지만, 천희연은 내공을 발견하지 못했다.
'음양이 균형 비슷한 걸 이루면 외부에선 내공이 없는 것으로 느끼는구나. 독도 음양이 균형을 맞추면 십이경맥과 기경팔맥에 영향을 안 주는 건가?'
"내공을 주입하면 독이 어떤 식으로 발작합니까?"
잔월의 부족한 견식으론 맥만 짚어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사부 몸엔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모릅니다. 내공을 주입한 자는 독이 내공을 타고 단전에 침투하여 열 호흡을 넘지 못하고 죽어버립니다."
잔월은 천장을 보며 길게 고민했다. 그러나 기침요결의 내용을 아무리 떠올려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무슨 독인지조차 모르니 섣불리 손쓸 수 없습니다."
스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잔월과 천희연을 밖으로 안내하려는 거였다. 그때 취협이 품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확 찢었다.
"왕달 사숙. 뭐 하는 겁니까?"
스님이 황급히 침상 앞에 가서 손을 휘저었다. 어찌나 빠른지 손바닥 잔상이 커다란 벽을 만들었다. 봉투에서 나온 약 가루는 노인에게 닿지 못하고 모두 바닥에 떨어졌다.
황급히 호흡을 멈췄다. 그러나 주변의 약 가루들이 자석을 본 철분처럼 달려와서 잔월 몸에 들러붙었다. 약 가루 자체는 독이 아니었다. 술 혹은 안주를 통해 몸에 들어간 여러 독이 발작게 하는 촉매였다. 천희연의 인당에서 자색 기운을 발견한 잔월은 상대를 방심케 하려고 일부러 기성해를 눌렀다.
"환멸대수인이 대성을 바라보고 있구나."
취협의 말에 잔월 뇌리에 번개가 스쳤다.
"환멸대수인? 저 노인이 대륜법왕?"
왕달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대사형이 환멸대수인을 익혔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몇 안 되는데. 과연 평범한 놈이 아니었구나."
남궁가 무림대회에서 독심호리가 한 이야기를 통해 온 강호가 다 알았다. 이들은 변방이어서인지 관심이 없어서인지 강호 소식에 어두웠다.
"사숙. 사부께서 혼수상태에 빠진 데 관련해 최대 혐의자가 사숙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행동을 확실히 해명하지 않으면 동문의 정을 잊었다고 원망치 마십시오."
스님의 말에 왕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이 두 사람한테 해명할 일이 있다."
"난 취협이 아니다. 취협이라는 자는 내 손에 죽었다."
"왜?"
"이선을 마찬가지로 속이려 했는데, 황금을 줘도 내 말을 듣지 않더구나.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잔월은 당당하게 말하는 왕달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봤다.
"대사형이 쓰러지고 내가 최대 혐의자가 되었다. 대사형과 싸우고 환속했거든. 그러나 내가 독 다루는 수준을 다들 알기에 그저 모든 혐의자 중에서 좀 더 큰 혐의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다 최근 오독교로부터 독편복과 관련한 자가 강호에 출몰했다는 서신을 받았다."
'또 독편복.'
"오호. 과연 너도 독편복을 아는구나. 독편복은 주로 변방에서만 활동하여 중원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잔월의 표정을 읽은 왕달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독편복 혹은 관련한 자를 찾으러 강호로 나갔다. 독편복이 해결하지 못하는 독이라면 신선이 와도 소용없다. 사람 찾기엔 의혈맹이나 개방이 최고지. 난 우선 서안으로 가서 의혈맹에 의뢰를 넣었다."
의혈맹은 혈풍의 또 다른 신분이다. 의혈맹이 따르는 자가 금나라 황실 후손인 완안덕명이기에 서안에 문파를 차렸다.
"그러다 우연히 옥면금강이라는 자가 무형지기로 완안덕명을 쓰러뜨렸다는 말을 들었다. 고작 열네 살 정도인 소년이 무형지기를 다룬다는 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난 옥면금강이 독편복 본인이거나 관련한 자라고 판단했다. 오독교에 초상화를 보내라고 부탁했다."
초상화로 잔월을 찾아낸 거였다.
"널 어떻게 여기까지 데려올까 고민하며 화산 부근을 서성였다. 하늘이 무심치 않은지 둘이 새벽에 옥녀봉을 내려오는 걸 발견했다. 둘의 대화를 엿듣고 봉상부에 갔다. 이선이라는 자에게 황금 열 냥을 주고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하라고 했다."
잔월은 기가 찼다.
"이선이 돈 받고 거짓말한 거라고?"
"거짓말은 아니지. 난 너희 둘이 가출한 가문의 철부지라고 말했다. 호위대가 집결하기엔 시간이 필요하니 평량으로 보내 시간 좀 벌어달라고 했지. 실력을 조금 보이니 내 말을 철석같이 믿더구나. 너희가 임조부로 향하는 걸 확인한 다음 나는 한발 먼저 가서 취협이라는 자를 만났다. 너희한테 해준 얘기는 실제로 취협이 나한테 해준 얘기 그대로다."
"나는 독편복이라는 자와 전혀 모르는 사이오. 맹세하오."
잔월 말에 왕달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오독교 소교주의 대공자가 네 앞에서 독공을 펼치다가 독이 역류했다는 말을 들었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단전까지 밀어 넣었다면서?"
"내 무공 특성이오. 독은 물론 내공도 똑같이 돌려줄 수 있소."
"이젠 네가 독편복과 연관이 있는지 중요하지 않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다. 오독교에서도 독공으론 세 손가락에 드는 묘운우를 네가 아주 쉽게 이겼다. 오독교 교주도 독공으로는 묘운우를 그리 쉽게 해치우지 못한다."
삼불살도 잔월을 독편복으로 의심했었다. 왕달 말까지 들어보니 묘운우 독을 돌려준 일이 확실히 대단한 듯했다.
"오독교 교주도 어쩌지 못할 독이라면 독편복 수작이 아니겠소? 내가 어떻게 해독한단 말이오?"
"독편복은 우리랑 전혀 접점이 없다. 아무 이유도 없이 밀종 종주인 대륜법왕에게 하독한다고? 풍뇌사가 있는 곳에선 부처처럼 떠받들리는 분이다. 그리고 이 정도 독이면 얼마나 귀할지 너도 짐작할 텐데."
"독편복이 아니면 누가 하독했겠소? 그리고 삼불살도 처음엔 나를 독편복으로 의심했소. 미루어보아 독편복이라는 자는 아무래도 위장에 능한 자가 아닐까 생각하오. 아마 주변인으로 위장하여 은밀하게 하독했을 거요. 그냥 강한 독이 아니라 아주 치밀한 독이란 말이오. 그걸 나보고 해결하라고?"
잔월은 짜증이 치밀어 왕달을 향해 소리 질렀다. 장원에서 봤던 핏물 가득한 옷이 취협이라는 무고한 사람의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리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은 왜 죽여?"
"사숙, 이자가 독편복과 연관이 있다면 치료를 맡길 수 없습니다."
잔월과 왕달의 기세 싸움에 스님이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 둘 다 중독되었다. 치료에 실패하면 한 줌 핏물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죽기 싫다면 해독해야겠지."
왕달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본인도 잘한 일이 아님을 알기에 잔월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 보는 게 힘들었다.
잔월이 고개를 슬쩍 돌려 천희연을 바라봤다. 천희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잔월을 향해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독을 누르는 게 어렵다는 신호였다.
"좋소. 그러나 나는 해독해줘야 하는 게 아니오? 장담할 순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려면 중독 상태여서 되겠소?"
잔월은 화를 억지로 눌렀다.
"입을 벌려라."
잔월은 고분고분 입을 벌렸다. 약은 혀에 닿은 순간 바로 녹아 목구멍을 넘어갔다. 약을 삼킨 잔월이 천희연에게 다가갔다.
"희연, 내 꼭 치료에 성공하여 그대를 구하겠소."
잔월이 천희연 손을 꼭 잡았다. 예상 밖의 언행에 천희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맞잡은 잔월 손에서 청량한 기운이 넘어왔다.
약 기운을 그대로 보존한 잔월이 노궁혈로 천희연에게 넘긴 것이었다.
"저는 괜찮으니 본인 안위부터 챙기세요."
왕달과 스님은 둘의 꼴사나운 모습에 눈을 돌렸다. 그때 천희연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가짜 해약이라고? 독 기운을 일시적으로 누를 뿐 진정한 해약이 아니라니. 왕달 저 새끼 진짜 나쁜 놈이구나.'
잔월은 기성해를 본격적으로 운기 했다. 독이 느릿느릿 사라졌다. 복합 독이어서 해독이 쉽지 않았다. 간단한 독이면 기성해로 순식간에 제압하고 몸 밖으로 버릴 텐데, 복합 독은 성질이 제각각인 기운이 복잡하게 얽혀 흩어버리는 게 쉽지 않았다.
'내 독도 이렇게 힘든데 천 소저를 해독하려면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천희연을 해독하면 기성해로 자기 독도 몰아낸 후 대륜법왕을 인질 삼아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왕달이 일시적으로 독을 누르는 해약으로 잔월을 속였다.
해독하는 사이 고민이 깊었다. 상대가 천희연 목숨으로 협박하면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었다. 천희연과 달리 대륜법왕은 반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죽을 가능성이 큰 대륜법왕이기에 상대에게 협박이 먹힌다는 보장도 없었다.
"호법 부탁하오."
잔월은 옥녀공을 대성하며 십이경맥 모두 타통했다. 다음 단계가 그 어렵다는 임독양맥 타통인데, 무혈지체인 무극존자 외엔 그 경지에 확실히 닿았다고 알려진 자가 없다.
임독양맥을 타통하지 못했기에 위험한 치료 이전에 소주천을 돌리면서 내공을 길들여야 했다.
내공이 한 톨 한 톨 느껴질 정도로 감각이 곤두선 후에야 잔월은 치료를 시작했다.
대륜법왕의 독은 한자강을 치료할 때와는 조금 다르다. 그때는 상대 독을 가져다가 일부는 없애고 일부는 몸 밖으로 배출했다. 그러나 지금 독은 밖으로 배출할 수 없다. 배출한 독에 천희연이 중독될 수도 있기에 무조건 잔월이 해치워야 한다.
'대륜법왕을 치료하며 방법을 대 천 소저도 치료해야 한다. 치료에 성공했다고 왕달이 진짜 해약을 준다는 보장도 없다.'
천희연의 독을 해독하는 게 우선이다. 중독만 해결하면 걱정 없이 저들과 싸울 수 있다. 대륜법왕을 인질로 잡든 저들 모두 제압하든 상황을 봐가며 쉬운 방법을 고르면 된다.
'널 음양독이라고 부를게. 내겐 음양환이 있고 옥녀공으로 튼튼한 몸이 있고 기성해가 있다. 게다가 무극인을 제외한 구인류도 있고 내공 흐름을 빠르게 할 수 있는 섬전도도 있다. 내가 널 이긴다.'
그리고 양의심공으로 마음을 나눠 천희연도 해독할 작정이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서천주를 치료할 때처럼 상대 단전에 외혈을 만드는 거다. 그러나 단전이 사라지다시피 한 서천주와 달리 대륜법왕은 심후한 내공이 단전에 그대로 있었다. 괜히 외혈을 만들었다간 내공 충돌에 대륜법왕이 즉사할 수도 있다.
잔월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준 후 왼손으로 대륜법왕 오른손을 맞잡았다. 천희연의 손을 잡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과 기분이었다. 깍지를 단단히 껴 노궁혈을 맞댄 잔월은 극양의 내공을 주입했다.
'이거 위험하구나.'
陰陽毒 음양독을
解毒 해독하려 하다
- 작가의말
세상이 참 좁습니다. 서천주는 잔월에게 외혈을 체내에 형성해 단전 역할을 하는 게 가능함을 알려줬습니다. 대륜법왕은 잔월에게 어떤 기연을 안겨줄지 기대하세요.
그리고 외혈로 단전 만드는 거 제가 너무 간단하게 쓴 거 같네요. 이야기 줄거리랑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어서 여기서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단전은 체내의 모든 혈도의 상호작용으로 생깁니다. 그러나 단전 형성에 필수인 혈도 몇 개 있습니다. 기해혈이 그중 하나입니다.
마치 만유인력에서 모든 질량 가진 물체가 상호작용하지만, 우린 지구의 중력을 주로 받기에 태양이나 달로 끌려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해혈은 단전에 있어 지구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전이 되는 조건 중 하나가 모든 혈도와 연결되는 겁니다. 내공심법 수련은 단전과 각 혈도의 연결을 강화하는 과정입니다. 빠르고 손실이 적은 내공 전달을 목표로 수련하는데 궁극적인 목표는 단전의 내공이 원하는 혈도로 바로 전달되는 무혈지체입니다. 수련자는 그저 내공 양을 불리려고 수련하다가 고수가 되면 그제야 궁극적인 목표를 깨닫고 노력하는 방향을 바꿉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가 대부분이고요.
외혈은 단전과 마찬가지로 모든 혈도가 투영된 가상 혈도입니다. 충분한 내공이 있어야 외혈과 모든 혈도의 연결이 명확해져서 단전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초보 수준의 외혈은 몇 개 혹은 십수 개 혈도와만 연결되었기에 단전과 같은 역할을 해낼 수 없습니다.
잔월이 서천주 단전에 만든 외혈 역시 진짜 단전 역할을 한 게 아니라, 단전인 것처럼 가까운 혈도에 내공을 제공하고 그 내공이 혈도에서 혈도로 옮겨간 겁니다. 단전 역할의 일부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잔월은 내공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기에 필요한 건 내공 양입니다. 내공만 많으면 외혈로 단전을 만들어 통비권을 펼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내공이 충분해도 외혈을 단전처럼 만드는 게 어렵습니다.
- 노벨 물리학 수상후보논문 ‘잔월이 주인공인 이유 - by 글쇠’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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