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월·강호행
잔월과 흑표는 나란히 평상에 누워 햇볕을 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수련이다. 몸과 무의식에 새겨진 수많은 것들이 쓸려 나지 않도록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다.
"잔월, 잔월. 네가 좀 시비를 가려봐."
담두천과 한자강도 마음이 들떠 수련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이 여기저기 놀러 다녔다.
"저기 동정호, 바다 맞지?"
한자강이 다짜고짜 질문했다.
"바다 아니라니까. 바다는 푸른색이야."
담두천이 반론을 제기했다.
"책에서 보니까 바다는 무척 커서 반대편이 안 보인다고 했어. 그러니까 동정호는 바다야."
"책에서 바다는 푸른색에 파도가 심하다고 했어. 그리고 바다면 동정해지 왜 동정호야."
"자강 형. 어제 말이야. 흑표가 쥐 한 마리 잡아 왔어. 그런데 쥐가 송아지만 한 거야. 그래서 내가 흑표를 꾸중했어. 송아지를 함부로 잡으면 안 된다고."
잔월의 말에 한자강이 펄쩍 뛰었다.
"거짓말, 세상에 송아지만 한 쥐가 어딨어. 그리고 흑표가 저리 작은데 송아지만 한 쥐를 어떻게 잡아."
"쥐가 아니야. 내가 잘못 말했어. 생긴 건 쥐지만, 크기를 보니까 분명히 송아지였어."
"쥐처럼 생기면 쥐지. 송아지만큼 크다고 송아지야?"
"형. 바다처럼 크니까 바다라며? 생긴 게 쥐여도 송아지만큼 크면 송아지 아니야?"
한자강이 입을 뻐끔거렸다. 담두천이 꼴 좋다고 킬킬거렸다.
"두천, 너도 틀렸어. 세상 모든 바다가 푸른 게 아니야."
"진짜?"
"책에서 봤는데 황해라고 누런 바다도 있어. 그리고 서역 상인한테서 들었는데, 홍해라고 붉은 바다도 있대."
기가 팍 죽었던 한자강이 어깨를 쭉 폈다. 결국엔 한자강이 틀렸지만, 담두천도 장님이 문고리 잡은 격이니 비긴 셈이라고 여겼다.
둘이 아웅다웅하며 떠나자 잔월은 눈을 감았다. 따스한 햇볕이 잔월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본인은 아직 실감하지 못했지만, 거대한 성취를 이룬 잔월은 이유 모를 상실감과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따뜻한 햇볕과 흑표의 체취가 그런 잔월의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갑자기 마음 편하게 하는 향기가 코로 스며들었다. 잔월은 저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눈을 살며시 떠보니 완청이 가까이 와 있었다. 잔월은 벌떡 일어나 질문했다.
"사부는 괜찮지요?"
"나쁜 기운이 다 사라졌어요.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완치인 거 같아요."
사부를 치료했다는 생각에 잔월 가슴은 뿌듯함으로 꽉 찼다.
"저기. 결례인 건 알지만, 청이 하나 있어 여쭤보고 싶습니다."
"말씀하세요. 어려운 거 아니면 들어드릴게요."
완청은 용기 내서 자기 사정을 털어놓았다.
"저는 어릴 적부터 기억력이 좋았어요. 덕분에 어린 나이에 모친이 남긴 수십 권의 의서를 암기하고 마을 사람들을 치료했죠. 의서에 적힌 대로 맥을 짚고 처방을 떼고 하니 병이 쉽게 떨어졌어요. 그래서 다들 저를 의선녀라고 불렀어요."
본인 생각에도 부끄러운지 완청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러나 의서에 없는 병은 치료할 줄 몰라요. 자꾸 찾아오는 환자에 부담을 느껴 결국 앓고 말았어요. 그래서 부친이 저를 데리고 인적이 없는 곳에 가서 지냈던 거예요."
완청은 쭈뼛거리며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겠지만, 조금 어른스러워진 잔월은 잠자코 기다렸다.
"이번에 기침요결을 보고 엄청 많이 배웠어요. 증상과 처방이 아니라 원인을 분석하는 책은 처음 봤어요. 게다가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를 적기보단 어떻게 치료할지 고민하는 방법을 적었어요. 그 책을 공부하면 진정한 의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잔월은 품에서 기침요결을 꺼내 완청에게 건넸다. 완청에게 있어 기침요결은 무림인에게 무극환허인이 갖는 의미만큼 무겁다. 절세의 심법이고 무공이고 경공인 셈이다. 잔월이 선뜻 내주자 오히려 우물쭈물하며 받지 못했다.
"제가 조만간 강호로 나갈 생각입니다. 귀한 물건을 몸에 지니고 다니다 분실할 것 같아서 그러는데, 이것도 함께 보관해주시겠어요?"
잔월은 아예 옥녀소수공이 적힌 가죽도 함께 건넸다. 섬전도는 두고두고 곱씹어야 하기에 몸에 지니고 다닐 생각이지만, 기침요결과 옥녀소수공은 사부께 맡길 작정이었다. 마침 완청이 기침요결을 배우고 싶어 하니 차라리 완청에게 맡기기로 했다.
"고마워요. 은혜에 꼭 보답할게요."
기침요결과 옥녀소수공을 받아든 완청이 인사를 하자마자 몸을 돌려 빠르게 도망갔다.
'얼굴이 빨간 거 보니 찬바람 맞아 열이 나나 보다. 스님이 자기 머리 못 깎는다더니, 의원도 병에 안 걸리는 건 아니구나.'
엄청 중요한 물건을 선뜻 맡긴다는 게 어떤 의민지 모르는 잔월은, 완청이 찬바람을 맞아 열이 나서 얼굴이 빨개진 거로 여겼다.
며칠 더 누워있으니 슬슬 좀이 쑤셨다. 인생 다 산 노인처럼 의욕이 싹 사라졌었는데, 이젠 활력이 넘쳐 마구 날뛰고 싶었다.
잔월은 사부에게 외숙공 찾으러 낙양에 가겠다고 허락을 구했다.
"내가 요 며칠 월영도법을 고민하다가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월영고랑은 엉뚱한 화제를 끄집어냈다.
"어떤 문제입니까?"
"월영도법은 이론적으론 완성에 가까운 무공이다. 이론대로만 되면 세상에서 제일 강한 무공이 될 것 같지.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 내가 악한 자들과 몇 번 싸워본 적 있는데, 싸움이 내 생각대로 진행되진 않더라."
잔월은 월영도법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수만 자나 되는 구결 덕분에 몸을 안 움직여도 무공을 수련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월영도법을 익힌 월영도랑은 이론과 실전의 괴리를 은연히 느끼고 있었다.
"월영도법은 쾌를 바탕으로 한다. 거기에 힘을 싣고 변과 환을 보조로 하며 허실을 통해 상대를 속이고 공간을 제압하는 무공이다. 이 많은 무리(武理 - 무공의 이치)를 모두 노화순청에 이를 정도로 능숙하게 펼쳤으면 좋으련만, 그게 불가능함은 너도 느꼈을 것이다."
잔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쾌에 힘을 싣는 것부터 어려웠고 변은 훨씬 어려웠다. 환은 그나마 괜찮은데, 허와 실의 변환은 잔월이 아직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완전한 무공을 익히는 게 목표가 아니라 강호에 발을 디딜 생각이라면 취사 선택을 해야 한다. 월영도법에서 버릴 건 버리고 알맹이만 남겨서 상대를 제압하고 죽이는 도법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어른스럽게 변한 잔월이 대견하기도 하고 천진난만하던 모습이 사라져서 서운하기도 했다.
"쾌다. 월영도법의 근간이 되는 건 쾌고, 남은 것들은 쾌가 부족하여 내 선조들이 집어넣은 무리다."
"초식을 빠르게 펼쳐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월영고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뽑았다. 느릿느릿 움직여 탁자 다리 하나를 베었다.
"빠르더냐?"
"느렸습니다."
"그런데 탁자는 피하지 못했다."
탁자야 움직이지 못하니 당연히 피하지 못한다.
"쾌(快)는 본래 빠르다는 뜻이 아니다. 날카롭다는 뜻이고 잘 벤다는 뜻이다."
"어떤 무리든 상관없이 잘 베기만 하면 된다는 뜻인가요? 그럼 굳이 다른 무리를 버릴 필요 없는 거 아닌가요?"
월영고랑은 잔월이 대견했다. 말하는 대로 듣는 게 아니라 자기 주관이 뚜렷했다. 말을 잘 듣는 제자는 사부를 뛰어넘기 힘들다. 월영고랑은 몇 년 안에 잔월이 자신을 뛰어넘을 거라는 예감이 불쑥 들었다.
"상황에 따라 잘 베는 방법이 제각각이다. 힘없는 작은 모기보다 드센 멧돼지가 더 베기 쉽다. 수많은 상황을 따져보면 가장 잘 베는 무리는 빠름이다. 내 말은 낡은 구결에 구애받지 말고 쾌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월영도법을 네가 만들라는 뜻이다. 너라면 능히 월영도법을 능가하는 무공을 만들 수 있다."
잔월은 수만 글자나 되는 구결을 버리고 처음부터 쌓아간다는 게 너무 부담됐다. 자신이 그럴 능력이 있는지도 의심되었다.
"당장 하라는 게 아니다. 월영도법을 펼치다가 부족한 점이 느껴지면 과감히 변화를 시도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도법의 바탕이 되는 쾌가 단순히 빠른 쾌가 아님을 명심하라는 뜻이다. 잘 벤다는 쾌에 일심을 두고 무공을 익히고 고치고 완성하거라."
사부의 당부에 잔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문제가 생겼다. 성취가 갑자기 오르면서 운기나 무공 펼치는 게 점점 힘들구나. 그게 아니면 너랑 함께 가주고 싶은데. 미안하구나."
말을 마친 월영고랑은 기다란 함 하나 꺼냈다. 잔월은 모르지만, 동정호가 있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내내 월영고랑이 직접 메고 내려온 함이었다.
"송나라 때 일대 기협인 무송 대협이 사용하던 설화빈철계도(雪花鑌鐵戒刀)다."
월영고랑은 무송의 후예였다. 월영도법은 무송보다 더 먼저 선조가 만들었지만, 완성은 무송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래 한 쌍인데, 하나를 분실하고 하나만 남았다. 다행히 월영도법은 칼 한 자루만 쓰는 도법이다."
무송이 쌍도를 사용한 건 전장에서 약한 자들을 많이 죽이기 위함이었다.
"칼집은 백상어보다 더 귀하다는 청상어 가죽으로 만들었다. 가볍고 튼튼한 데다 얼핏 보면 귀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 쓸데없는 시비를 줄일 수 있다. 이제부터 이건 네 칼이다."
공손히 칼을 받아든 잔월은 칼자루를 잡았다. 손에 맞춘 듯 착 감겼다. 슬쩍 뽑아보니 눈처럼 하얀 도신이 눈부시게 빛났다.
"북해라는 곳의 깊은 바다에서 나는 철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사람 힘으로 채취하는 건 어렵고 물고기들이 잘못 삼킨 걸 모아서 칼로 만들었다."
"네가 갖고 있던 칼은 완청에게 주거라. 길이가 짧아 아이나 여인이 사용하기에 적합한 칼이다."
무극존자가 아이가 크면 선물로 주려고 직접 만든 칼이었다. 잔월을 보며 자꾸 죽은 아들이 생각나서 소중히 간직했던 칼을 줬다.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잔월은 선뜻 칼을 끌러 사부에게 건넸다.
"네가 직접 주거라. 난 피곤해서 이만 쉬련다."
찾아가서 칼을 건네니 새빨간 얼굴로 받는 완청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월영고랑을 돌보느라 피곤해서 몸이 잠시 허해진 거겠지 생각했다.
잔월의 감언이설에도 담두천과 한자강은 하가촌에 남아 무공을 수련하겠다고 버텼다. 직접 손을 섞은 적은 없지만, 자신들과 잔월이 지금 얼마나 큰 격차가 나는지 확실히 알았다.
잔월을 넘기는 힘들겠지만, 형 체면에 너무 약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수련을 선택했다.
하얀 눈이 천지를 소복하게 덮은 날, 잔월은 설화빈철계도를 등에 메고 강호로 발걸음을 깊숙이 내디뎠다.
殘月 잔월이
江湖行 드디어 강호 가요
- 작가의말
월영고랑의 성이 폭로되었습니다. 이름은 좀 늦게 공개합니다.
쾌검신룡에서 목표로 세운 게 강호를 그려보자 였습니다. 원래 목표는 가장 밑바닥의 강호를 살짝 묘사하고 다음에 소림을 비롯한 큰 문파와 세가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역량 부족과 당시 속 타는 일이 있어서 글에 완전히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두 글을 동시에 연재했는데, 함께 읽은 분이라면 특정 기간에 두 글 모두 조금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으셨을 겁니다.
공교롭게도 두 글 모두 완성한 후 모든 일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유기와 꿈나비라는 인기 저조한 두 글을 통해 연출이나 표현 그리고 대규모 전투에 관한 묘사 능력도 조금 높였습니다.
이번 글에서 쾌검신룡에서 제대로 펼치지 못한 강호를 더 자세히 펼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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