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월야·변고
전진교는 일곱 개 지파가 있었다. 송나라가 사라지고 원의 통치에 들어선 후 몇 개 지파가 더 생겼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건 구처기의 전진용문파밖에 없었다. 남은 지파들은 명맥도 겨우 이어갈 정도인데, 용문파는 종남파라는 지파까지 생길 정도로 흥성했다.
현재 전진용문파 장문인 완안덕명이 종남파의 장문인 직까지 겸임했다. 종남파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종남검선이지만, 명분상으로는 완안덕명이 최고였다.
"대사형, 이번엔 고집을 꺾으시는 게."
"그만. 회임한 아내를 보러 가겠다는데 누가 날 말리느냔 말이다."
독고경천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사부인 종남검선밖에 없었다. 그러나 종남검선은 완안덕명의 초대장을 받고 점심 무렵에 태을산으로 향했다.
"대사형. 조금만 성질 죽이면 다음 대 장문인은 대사형이 틀림없습니다. 대의를 위해서라도 참으십시오."
"원 황실의 충견인 장문인과 같은 지붕을 쓰는 것조차 소름 끼치는 일이다. 난 부인 보러 갈 테니 너희나 연회를 즐겨라."
독고경천은 사제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원래부터 자리에 없었다는 듯 갑자기 사라진 독고경천의 경공에 모두 감탄했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강호 어디에 내놓아도 고수 소리를 들을 법한데, 누구 하나 독고경천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그러나 감탄은 감탄이고, 독고경천 설득에 실패한 사제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동시에 한숨을 크게 뱉었다.
"자. 대사형은 어제저녁에 부인 보러 하산하셨다. 누가 묻든 이렇게 대답해라."
이 사형 독심호리가 나서서 분위기를 수습했다. 독심호리(讀心狐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람 마음을 잘 읽어서 모든 사형제와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대사형은 장문인 직에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이 사형을 추대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허튼소리. 나는 모사꾼일 뿐 모두를 이끌 그릇이 되지 못한다. 대사형이 장문인이 되어야 우리 종남의 이름이 소림과 아미를 능가할 것이다."
밖으로 나가니 다른 사형제들이 새 도복 차림으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고경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거보라는 듯이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화도 나고 우습기도 해서 참지 못하고 킥킥 웃어버렸다.
"이 사형, 대사형은 어제저녁에 나가고 안 돌아온 겁니까?"
꾀쟁이 구 사제의 외침에 모든 사형제가 배를 끌어안았다.
"구 사제는 분명히 내 뱃속의 회충이 윤회했을 거야."
종리형은 독심호리 다음으로 영민한 자지만, 놀기를 좋아해 무공이 뛰어나지 못했다.
독고경천의 부재로 독심호리가 일행을 인솔해 태을산으로 출발했다. 전진교 정통을 자처하는 용문파는 태을전이 있는 태을산에 자리를 잡았고 종남파는 가장 높은 태백산에 둥지를 틀었다.
도를 닦는 도사가 훨씬 많은 용문파는 문규로 종남 경내에서 경공을 펼치는 걸 금지했다. 전부 무인인 종남 제자들은 용문파의 문규 따위가 안중에 없지만, 장문인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감히 무시하고 경공을 펼치지 못했다.
다음 대 종남파 장문인 자리를 얻어내려면 꼬투리 잡힐 일은 최대한 삼가야 했다.
빠른 걸음으로 태을산에 도착하니 커다란 산문이 일행을 반겼다. 산문에는 용문파의 젊은 도사 몇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우 여러분, 무기를 여기 맡기셔야 합니다."
새해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무기부터 끄르라고 했다.
"문규에서 종남의 제자는 상시 패검해도 된다고 명시했습니다."
독심호리가 나서자 용문파 도사들은 이마를 찌푸렸다. 무공도 만만치 않지만, 무공보단 언변이 훨씬 뛰어나서 말을 섞으면 피곤했다.
"설을 맞아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대도에서 오신 분이니 패검은 결례입니다."
"아무리 귀한 손님이어도 종남에 왔으면 종남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대도라면 원의 수도다. 수도에서 온 귀한 분이라면 십중팔구 황실 혈통이다.
"검선께서도 검을 놓고 가셨습니다."
사부인 종남검선을 들먹이자 독심호리도 할 말이 궁했다. 종남 제자들은 툴툴거리면서도 분분히 허리에 찬 패검을 끌러 용문파 도사들에게 건넸다.
"몸을 수색하겠습니다."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니오? 우리 종남이 언제 암기로 사람을 상하게 한 적이 있소?"
종남 무인은 암기를 숨겨 몰래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겼다. 얼마나 귀한 손님인지 몰라도, 용문파 도사들의 요구는 종남 무인들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렸다.
"사부님의 지시라 우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용문파와 종남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전진교를 대표하는 후기지수 상소룡이 독고경천의 검에 팔 하나 잘린 후 오가는 눈길이 서로 고울 수 없었다.
자칫 주먹다짐도 벌어질 분위기가 되었다. 독심호리의 가는 실눈이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좁혀졌다.
"자자, 구 사제는 어서 돌아가서 대사형에게 무기를 두고 오라고 전해라. 대사형 성격에 검을 절대 남의 손에 맡기려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우리도 용문파 도우들을 난처하게 하지 말고 수색받자고. 숨긴 것도 없는데 뭔 걱정이야. 대신 아무것도 못 찾아내면 당신들이 사과해야 해."
종리형은 평소 꾀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머리가 민활했다. 독심호리의 생각을 알아맞히진 못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는 확실히 알았다. 훌쩍 경공을 펼친 종리형의 신형이 빠르게 멀어졌다.
몸수색을 마친 후 기어코 용문파 도사들의 사과를 받아냈다. 태을전으로 향하다가 산문이 보이지 않는 위치로 계단이 꺾이자 독심호리가 일행을 멈춰 세우고 사제 다섯을 불렀다.
"은밀히 내려가서 검을 찾아오너라."
"이 사형, 들키면 큰일입니다."
"대사형이 없는데도 저들은 아무 말 없었다. 이상하지 않으냐? 모든 건 내가 감당할 테니, 너희는 시키는 대로 해라."
독심호리가 전에 없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장문인이 패검을 금지했는데도 일부러 검을 훔쳐 연회장에 가는 건 자칫 기사멸조로 몰릴 수 있는 중죄다. 운 좋아 목숨을 건지더라도 사지 중 한두 개는 잘리고 단전을 훼손당할 각오를 품어야 한다.
"검은 나 혼자 훔친 거로 할 테니, 너희 다섯은 어서 행동하거라. 대사형도 무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독심호리의 지목을 받은 다섯이 사라졌다. 평소 과묵한 삼 사제가 입을 열었다.
"사형, 왜 그리 확신하시오?"
"사부님은 장문인과 사이가 좋지 않다. 원래 사부님이 십팔 대 장문인이 되어야 하는데, 원 황실의 간섭으로 완안덕명이 장문인이 되었다. 완안덕명은 금나라의 황족 후손으로 원 황실에 충성한다. 사부님이 홧김에 용문파를 나와서 종남파에 몸을 담았는데 완안덕명이 종남파 장문인 직까지 겸임해버렸다. 평소 초대장을 보내도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이번엔 받자마자 출발하셨다. 이것부터 이상했다."
삼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대 장문인으로 거론되던 상소룡이 팔 하나 잃고 의기소침해서 칩거했다. 용문파 제자들은 대사형이 연관된 일이라면 아무리 작아도 트집을 잡아 허물을 만들려고 애썼다. 그런데 우리 일행 중에 대사형이 없는데도 모른 체 했다. 이것 역시 이상하다."
"그래도 너무 비약 아니오?"
"또 있다. 평소에 우리가 태을전을 방문할 일이 있으면 늘 무공이 강한 자들이 산문에서 트집을 걸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공이 약한 자들뿐이었다. 무공이 강한 자들은 따로 할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 대상이 사부님 혹은 대사형일 가능성이 크다."
"사부님이 일부러 우리와 함께 안 움직이고 혼자 태을전을 찾아간 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겠소?"
"그러실 거야. 단순히 무공만 강한 분이 아니시니까. 그래서 오히려 문제다. 대사형이나 사부님은 자부심이 너무 강해. 아마 완안덕명이 초대장으로 사부님 자존심을 제대로 긁었을 거야."
경공이 특출난 다섯 사제가 일행의 검을 훔쳐 돌아왔다.
"경공을 펼쳐 태을전으로 향한다. 막는 자는 죽인다."
독심호리의 눈이 흉악하게 빛났다. 만약 완안덕명의 함정이 아니고 본인의 오해라고 해도 검으로 뒤집을 작정이었다. 완안덕명을 죽인 후 자신만 기사멸조의 죄를 뒤집고 자결하면 사부님이 장문인 자리를 차지한다. 당연히 다음 장문인은 독고경천이 될 것이고, 종남의 이름이 소림과 아미를 능가해 독수천하(獨秀天下 - 홀로 우수함) 할 수 있다.
태을전이 가까워지니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사부님이 무사한 모양입니다."
"아니야. 사부님 무공에 병장기 부딪힐 일이 뭐 있겠어. 지금 위기에 처하셨다는 뜻이야. 서두르자."
꽉 닫힌 태을전 문이 일행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줬다. 평소엔 밤에도 열어놓는 태을전 대문이었다.
"사부님 안위가 제일 중요하다. 악적들은 언제든지 주살할 수 있다."
독심호리의 당부가 끝나기도 전에 종남의 제자들은 경공을 펼쳐 태을전 담벼락에 올랐다. 독심호리도 지체하지 않고 높은 담벼락에 올라섰다.
"사부님, 우리가 왔습니다."
독심호리의 중기 충만한 외침에 종남검선과 싸우던 중년 사내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종남검선의 숱 많은 흰 수염이 일부 사라졌다. 즐겨 입는 흰색 도포도 갈가리 찢겼다. 왼쪽 어깨가 붉게 물들었고 입가에도 핏방울이 살짝 맺혔다.
반면, 종남검선을 상대하던 중년은 소매와 옆구리의 옷만 날카롭게 베였다.
'흑발에 백염. 누구지? 사부님과 일대일로 손을 섞을 정도라면 무명은 아닐 텐데.'
장내를 둘러보니 알만한 사람 몇 있었다.
'저자는 서안 화룡표국의 표국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자지만, 직접 본 적은 없고 소문만 들었다. 그러나 소문이 하도 자자하여 보는 순간 화룡표국의 표국주임을 알 수 있었다.
대나무처럼 깡마른 몸매에 길이가 사 척이나 되는 긴 죽절검을 들었다. 죽절검은 날이 없이 둥글둥글한 찌르기 전용 검이었다.
쓰임새가 제한되어 위력에 한계가 있는 검인데, 화룡표국의 서천주는 그 한계를 깨고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검수가 되었다.
'저자는 설마 대륜법왕인가?'
토번 제일의 고수 대륜법왕. 머리와 눈썹까지 다 밀었지만 수염을 기르는 괴짜였다.
'대사형이 빨리 와줘야 하는데.'
날이 짧은 겨울이라 어느새 하늘에 달이 떴다. 한 달 전에 주원장이라는 자를 도울 때와 마찬가지로 잔월이었다. 다만, 그날보다 붉었다.
불길한 생각을 억지로 털어내며 독심호리는 사제들과 함께 사부 곁으로 갔다. 검선의 거친 숨소리가 독심호리의 불안을 키웠다.
殘月夜 그믐달이 뜬 밤에
變故 변고가 생기다
- 작가의말
이건 자랑이 아닙니다. 완결 걱정 없애는 청심환입니다. 슬럼프가 와도 두 달은 버틸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죠. 취향에 맞는다면 걱정 없이 달리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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