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곡·난투
"왕달, 난 네 사숙이다. 우리 복수는 강호의 법도에도 문파의 법규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고집 그만 부리고 함께 태장종과 풍뇌문의 부흥을 우리 손으로 이뤄내자. 우덕에겐 대수인을, 너겐 독공을 전수하마."
대수인이라는 무공이 너무 유명하여 풍뇌문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게다가 대륜법왕하고 같은 배분으로 알았던 독편복이 왕달 사숙을 칭하니 잔월과 천희연도 살짝 놀랐다.
풍뇌문은 대수인 때문에 독에 깊은 조예가 있음이 강호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독교와 친분이 돈독하고 독편복과 같은 절대에 가까운 독공 고수를 배출했으면 왕달 역시 독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독처럼 위험한 물건을 다루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면 짧은 기간에 절대 불가능하다. 천희연은 아미에서 강호 각 문파에 관해 공부를 꽤 했는데도 풍뇌문이라는 이름과 대수인 전승자들이 독을 잘 쓴다는 사실을 몰랐다.
"난 몇 년 전에 문파를 나왔다. 넌 내 사숙이 아니다. 넌 그저 복수에 미친 괴물일 뿐이다. 대륜이 잘못했다면 대륜만 벌하면 될 일이다. 왜 애꿎은 사람을 죽이고 풍뇌문을 쇠락하게 만드느냐."
왕달은 구양진경을 소림에 돌려주는 걸 반대하다가 실패하자 환속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고집이 센 놈이었다. 정이 깊은 대륜법왕과도 사형제의 연을 서슴없이 끊었을 정도로 성질 더러운 놈인데 자기 사부를 죽이고 대사형까지 죽인 독편복을 사숙이라고 공경할 리 만무했다.
"꼭 그렇게 권하는 술을 마다하고 벌주를 마셔야겠느냐."
"너희가 우덕을 잡아둬라. 내가 독편복을 죽이겠다."
미리 전음으로 상의를 마쳤는지 왕달 무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왕달은 독편복을 덮치고 남은 자들은 우덕을 공격했다.
"해독단을 먹었다. 네 독은 당분간 소용없다."
왕달은 원래부터 독에 관심이 많았는데 대륜법왕이 쓰러진 뒤엔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대륜법왕을 깨우려고 노력하다 보니 약한 독은 바로 해독하고 센 독도 느리게 퍼지도록 억제하는 해독단을 만들어냈다.
왕달 일행은 해독단을 하나씩 먹었는지 모두 멀쩡해 보였다. 우덕은 극양의 기운을 몸에 둘러 독의 침입을 막았다. 잔월은 내공도 부족하고 깨달음도 부족하여 펼치지 못하는 재주였다.
"이거 먹어요."
잔월은 급히 독편복이 줬던 해독단을 천희연에게 먹였다.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극독이다.'
독편복이 뿌린 독은 어마어마하게 강했다. 잔월의 내공이 전에 없이 빠르게 돌아가며 해독에 열중했다.
"괜찮아요?"
잔월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에 익숙해지며 점점 나아졌다.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무공을 펼쳐도 될 정도로 여유가 생길 것이다.
독편복은 온갖 독을 뿌리며 도망 다녔다. 왕달은 독편복만 죽이면 된다는 생각인지 독 가루를 전혀 피하지 않고 우직하게 쫓았다.
우덕 역시 손속에 뒀던 정을 거뒀다. 그러나 우덕을 상대하는 여러 스님 역시 목숨 걸고 싸웠기에 쉽사리 뿌리치지 못했다.
그때, 돌부처가 깜짝 놀라 펄쩍 뛸 일이 생겼다. 심장이 멈추고 숨도 끊어졌던 대륜법왕이 갑자기 일어나 독편복을 공격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독편복은 대륜법왕의 환멸대수인에 제대로 맞고 시뻘건 피를 연속 게워냈다.
끝장을 보려고 독편복을 쫓는 왕달과 달리 대륜법왕은 바로 잔월을 공격했다. 원래는 좀 더 나은 기회를 기다리려 했는데 피부로 흡수된 독편복 독 때문에 심하게 중독되었다.
독편복 죽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잔월이나 천희연이 갖고 있을 불경 확보하는 일도 무척 중요하기에 독편복은 왕달에게 맡기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잔월을 공격했다.
'이것만 막으면 된다.'
대륜법왕 역시 중독으로 눈알이 뻘겋고 입가에 침도 흘러나왔다.
'환멸대수인이라. 여덟 인을 이런 식으로 조합했구나.'
잔월의 기환이 체내로 들어온 대륜법왕의 기운을 빠르게 해소했다. 그러나 침투한 내공이 너무 많았다. 일부 내공을 해소하지 못한 잔월은 피 한 모금 게워냈다.
'독만 아니면 이길 수 있는데.'
오랜 기간 중독으로 누워있었고 우덕의 대수인을 무방비로 맞은 대륜법왕이다. 게다가 독편복이 마구 뿌린 독에 중독되어 전력을 다하지 못했다.
해독하느라 대부분 내공이 묶이지 않았다면 대륜법왕의 내공을 모두 해소해 그대로 돌려준 뒤 공격을 이어가 승기를 잡았을 것이다.
그때 우덕이 끈질기게 달라붙는 사제들을 무시하고 대륜법왕을 덮쳤다. 확실히 자신보다 약한 왕달보다는 대륜법왕을 먼저 해치우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실질적으로 누가 더 강한지는 싸워봐야 알겠지만, 오랜 기간 사부로 모셨던 대륜법왕에게 심리적으로 위축감을 느꼈기에 빨리 해치우고 싶었다.
우덕의 기습을 피한 대륜법왕은 잔월을 버리고 독편복을 덮쳤다. 여전히 입으로 피를 흘리며 왕달에게서 도망치던 독편복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기습에 실패한 우덕은 무리하게 경공을 펼쳐 독편복 앞을 막았다. 대륜법왕만 주시하느라 왕달의 공격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왕달의 대수인이 우덕의 왼쪽 팔뚝에 적중했다. 내상을 입은 우덕은 입가로 가는 핏줄기를 흘렸고 왕달은 반탄력에 당했는지 손목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대륜법왕 상대로 살심이 생긴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대륜법왕의 심공은 공령환허를 상대할 목적으로 고민하다가 얻은 것으로, 공령환허를 익힌 잔월에게 효과가 특별히 좋았다.
우덕의 대수인에 맞고 마음이 크게 흔들린 대륜법왕은 죽은 척하려고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며 심공이 깨져버렸다. 덕분에 잔월도 대륜법왕 상대로 살심이 일었다.
대륜법왕과 우덕이 충돌하는 순간만 노리고 있는데 대륜법왕이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회전해 독편복이 아닌 잔월을 덮쳤다.
'공방일체. 자꾸 사부 깨달음을 까먹는구나.'
공격할 생각에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이 굳은 잔월은 대륜법왕의 기습에 반응이 늦었다. 손바닥 아닌 가슴으로 대수인을 받은 잔월이 피를 크게 두 모금 토했다. 잔월을 상대로 힘을 너무 쏟은 대륜법왕은 뒷심이 부족하여 천희연의 매서운 공격에 뒤로 물러났다.
"구양진경이 적힌 불경이다."
천희연이 품에서 불경 다섯 권 꺼내 던졌다. 대륜법왕 근처로 하나, 우덕에게 하나, 독편복 앞에 하나, 왕달 앞에 하나 떨어졌고 남은 하나는 절간 문 앞에 떨어졌다.
"남은 두 권은 진법 안에 있을 거다."
말을 마친 천희연은 잔월을 업고 진법에 뛰어들었다.
"해독단이오."
왕달이 품에서 해독단 하나 꺼내 대륜법왕에게 던졌다. 해독단으로 독을 누른 대륜법왕은 한결 나아진 안색으로 상황을 살폈다.
"왕달, 그리고 마루. 불경을 내게 달라."
"안 되오. 이 불경은 절대 소림사나 원 황실에 넘길 수 없소."
왕달이 거부했다. 절간 앞에 떨어진 불경을 주운 마루는 왕달의 눈치를 봤다. 대륜법왕이 패륜을 저지른 사실을 들을 때부터 마음은 이미 사부에게서 떠났다. 모두 대륜법왕 제자로 들어갔지만, 어린 제자 무공은 왕달이 주로 가르쳤기에 정은 오히려 이쪽과 더 깊었다.
그때 몸을 추스른 독편복이 겨드랑이 쪽에서 약 여러 개 꺼내 연신 복용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지만, 짧은 기간에 내상을 극복했는지 호흡이 정돈되었다.
"다들 진법에 들어가서 숨어라. 절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해독단 효능이 사라질 때가 되었다."
왕달 말에 마루를 비롯한 스님들이 진법으로 뛰어들었다. 해독단 효능이 사라지면 독편복의 독에 당해 한 줌 핏물이 되고 만다.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아무 의미 없는 개죽음은 싫었다.
왕달 역시 지체하지 않고 진법에 뛰어들었다. 대륜법왕도 혼자 독편복과 우덕을 당할 자신이 없기에 진법으로 도망쳤다.
"사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지켜보자."
"저들이 불경을 훼손하면."
독편복이 고개를 저었다.
"대륜은 저걸로 태장종을 일으키려 한다. 왕달은 예전부터 구양진경을 직접 읽고 싶어 했다. 젊은 남녀에겐 불경이 목숨을 흥정할 밑천이다. 불경을 훼손하고 싶은 자는 없다."
숨을 몇 번 헐떡인 독편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이미 글렀다. 길어야 한두 달 더 살겠지. 내상을 치료해달라. 내상이 나으면 내가 진법에 들어가겠다."
다시 지하로 내려간 독편복은 우덕 도움으로 내상을 치료했다. 일시적으로 내공처럼 사용할 기운을 주는 약을 넉넉히 품에 넣은 독편복은 경공을 펼쳐 진법에 뛰어들었다.
우덕은 부처 앞에 무릎을 꿇고 불경을 외우며 독편복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내상과 독이 겹치니 힘들군요."
잔월은 바닥에 드러누워 한탄했다. 독도 그냥 독이 아니고 내상도 그냥 내상이 아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지만, 토번 제일의 고수에 백 년 이래 대수인을 유일하게 극성으로 익혀낸 대륜법왕이다. 그런 자가 판을 뒤집으려고 정신을 십분 집중하여 펼친 대수인을 두 번이나 맞았다.
둘이 조용히 휴식을 취할 때 갑자기 스님이 하나 나타났다. 천희연이 빠르게 반응해 잔월 앞을 막았다. 그러나 천희연 예상과 달리 스님은 검은 피를 토하고 쓰러지더니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독편복이 따라온 것 같습니다."
잔월이 말했다. 과연, 잔월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독편복이 등장했다. 천희연은 황급히 잔월을 안은 다음 무작정 달렸다. 수십 걸음 달리는 사이 풍경이 여러 번 변했다.
"쉬세요. 우리가 대비할 걸 아니 바로 쫓아오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독편복이라면 다른 모습으로 올 수도 있으니 다음부턴 보이는 족족 공격하세요."
잔월 말에 천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월은 대수인에 두 번 당하며 일부 혈도가 막혔다. 그래서 기성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독을 겨우 수십 개 혈도로 분산하여 돌리면서 기환으로 내상을 치료했다. 내상 때문에 독 치료가 어렵고 독 때문에 내상 치료가 어려운 곤경에 처했다.
시간이 흘러 운기가 안정되며 잔월에게 여유가 생겼다. 심심한 나머지 귀를 바닥에 대고 지청술을 펼쳤다. 사람들이 걷고 달리는 기척이 조금씩 들리긴 하지만, 거리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쿵 소리는 누군가 공격당해 쓰러진 소리겠지?'
잔월이 들은 쿵은 우연히 만난 대륜법왕과 왕달이 만든 소리였다. 왕달을 본 대륜법왕이 다짜고짜로 대수인을 펼쳐 공격했다.
무방비로 당한 왕달은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사형, 나 왕달이야."
"독편복, 두 번 속지 않는다."
대륜법왕은 바로 왕달 머리에 대수인을 펼쳤다. 왕달은 대수인을 막지 못하고 머리가 터져 즉사했다.
왕달 품을 뒤져 불경을 찾은 대륜법왕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왕달."
독편복이 변한 왕달에게 속아 중독이 심해진 대륜법왕은 두 번째로 만난 진짜 왕달을 죽이고 말았다. 하지만, 왕달인 걸 알았더라도 죽였을 것은 대륜법왕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마루를 죽이고 얻은 불경까지 총 셋을 모은 대륜법왕은 특별한 경로로 내공을 돌렸다.
'저기 사람 있구나. 나 외에는 다 적이다. 모두 죽인다.'
진법 방해로 상대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잔월은 지청술을 통해 몇 명이 움직이는지는 확실히 알았다.
"이제 둘 남았습니다. 처음엔 다섯이었는데 셋이 죽은 듯합니다."
그때 왕달이 불쑥 나타났다. 잔월은 황급히 일어나 천희연 앞을 막았다. 왕달이든 독편복이든 독을 조심해야 하는 건 똑같았다.
왕달 모습을 한 독편복은 다짜고짜 독을 살포했다. 죽이려는 독이 아니라 상대 행동을 굼뜨게 하는 독이었다. 남은 두 권의 불경을 찾으려면 잔월과 천희연의 재주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때 기척을 찾아온 대륜법왕이 나타나 잔월을 공격했다. 굳이 누군지 보지 않고 가장 가까운 사람을 무작정 공격했는데, 그게 하필 잔월이었다.
독편복의 독 때문에 대응이 어려웠다. 그때 천희연이 잔월을 밀치고 월녀봉심(越女捧心)의 초식으로 대수인을 받았다. 곱게 가슴 앞에 모은 손으로 대수인을 받아내고 강맹한 대수인 내공을 지극히 맑고 순수한 빙청옥결 내공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나 양의 차이가 너무 컸다. 전신 경맥에 충격을 받은 천희연은 입과 코는 물론 귀에서도 피가 흘러내렸다.
"멈춰. 안 그럼 불경 태운다."
잔월이 불경 두 권을 손바닥 사이에 끼우고 둘을 위협했다. 천희연을 끝장내려던 대륜법왕이 주춤했다. 그러나 독편복은 몰래 독 푸는 걸 멈추지 않았다. 상대 행동을 굼뜨게 하고 마지막엔 모든 힘을 잃고 쓰러지게 한다. 잔월이 만독불침을 이뤄 독에 엄청 강한 내성을 갖춘 사실을 모르기에 곧 쓰러질 거로 오판했다.
협박이 제대로 먹히지 않자 잔월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두 불경을 독편복과 대륜법왕 사이에 던졌다. 그리고 바로 천희연을 안고 무작정 달렸다. 미친 듯이 달리다가 궁지에 몰렸다. 분명히 온 길이 있는데 전후좌우는 물론 위아래도 꽉 막힌 공간에 갇혀버렸다.
"천 소저. 남녀가 유별하다곤 하지만, 목숨보다 큰 게 없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잔월 왼손이 천희연 등에 있는 명문혈에 닿았다. 곧바로 오른손이 주저함이 없이 천희연 가슴으로 향했다. 잔월 엄지손가락이 가슴 가운데 있는 단중혈을 단번에 찾아냈다.
峽谷 골짜기
亂鬪 개싸움
- 작가의말
원래 11쪽이었는데 개연성과 상황 설명 추가하다 보니 1천2백 자를 더 썼네요. 대륜법왕 안 죽은 반전 하나 추가했습니다. 과연, 반전은 여기서 끝날 것인지 또 불쑥 튀어나올 것인지 다음 화 기대해 주세요.
그리고 내상 전문가로서 소견 말씀드리겠습니다. 단중혈은 가슴 가운데 있는 혈도로 명문혈과 마찬가지로 대혈입니다. 잔월이 내상과 독 치료를 위해 명문혈과 단중혈을 동시에 공략한 건 옳은 일입니다.
문제는 ‘단번에’ 단중혈을 짚었다는 건데. 평소 명상하면서 심상수련을 많이 한 거로 추측합니다.
사람 구하려는 생각에 단중혈 찾는 심상수련을 열심히 한 인성 좋은 주인공 잔월에게 박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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