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비·문죄
"소룡아, 비무에서 꼭 우승해야 한다."
사부의 당부에 상소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팔 하나 잃긴 했지만, 나무로 의수를 만들어 몸 균형을 잡았다. 황실에서 내린 영약을 먹어 내공도 늘었고 초식도 예전에 재능만 믿고 수련에 게을리할 때보다 훨씬 정교해졌다.
'압도적으로 이겨야 할 텐데. 왜 독고경천 같은 천재는 검선 제자가 됐을까?'
분명히 그때 죽어가는 독고경천을 먼저 발견한 건 완안덕명이었다. 그러나 이미 상소룡이라는 천재를 제자로 들인 완안덕명은 더럽다는 이유로 가까이 가서 살피지 않았다.
검선이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독고경천을 업고 의원을 찾아갈 때 비웃기까지 했다. 이러한 기억들을 이미 깨끗이 지운 완안덕명은 하늘이 무심하다고 푸념했다.
'이게 웬 광대놀음이야?'
회의 내내 아무 성과도 없었다. 아직 회의가 며칠 남았지만, 완안덕명은 자신에게 설득당해 원 황실 편을 설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확신했다.
비무대회 우승을 차지하면 자신의 말에 힘이 실리지 않을까 하는 요행을 바라며 상소룡에게 우승을 주문했다.
그러나 다급한 완안덕명 마음과 달리, 비무에 앞서 각 문파 어린 제자들이 익힌 무공을 자랑했다.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아이도 있었다.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넘어지자마자 왈칵 울음을 터뜨려 구경꾼들을 폭소케 했다.
완안덕명은 그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미파 시연이 있겠습니다."
대여섯 살로 보이는 아이 둘이 비무대로 올라갔다. 얼굴이 똑같이 생긴 두 아이는 허리띠 색깔만 달랐다. 사방으로 포권한 두 아이가 무공을 펼쳤다.
'통배권?'
고작 대여섯으로 보이는 두 아이가 펼친 건 아미파 대표 무공인 통배권이었다. 나이가 어려서 자세가 흐트러지긴 했지만, 고수들은 권법과 함께 움직이는 세찬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타고난 건가?'
내공 수련을 시작할 나이도 아닌데, 권법을 펼침에 따라 체내 기운이 확연한 움직임을 보였다.
'저 쌍둥이 일 할 정도 자질을 갖춘 제자도 없는데.'
그 부족한 제자마저 한 명도 빠짐없이 황금과 은원보를 가슴에 품고 도망쳤음을 알지 못했다. 상소룡과 같은 배분의 제자들도 태을전이 불탄 책임을 자신들에게 물을 것을 알고 황금이나 은원보를 최대한 챙겨 달아났다.
시연을 끝낸 두 아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포권했다. 숨차서 어깨를 들썩이며 쌔근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박수 소리가 유달리 컸다.
본인들도 잘했다는 걸 아는지 서로 마주 보며 해맑게 웃었다.
시연이 끝나고 비무가 시작되었다. 강호에 명성을 떨치고 싶은 젊은 무인들이 비무대로 올랐다. 완안덕명은 눈 감기는 비무자들의 수준에 열불만 터졌다.
수준 낮은 무인 둘이 오래 대결하자 야유가 쏟아졌다. 비무하는 둘도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수비를 기반한 반격 위주의 무공을 익힌 둘이어서 서로에게 틈을 내주지 않았다.
"전진용문파 소문주 상소룡이오. 두 분이 함께 덤비시오."
상소룡이 제멋대로 비무에 개입했다. 무척 건방진 행동이지만, 여기 모인 자들은 공자 왈 맹자 왈하는 선비가 아닌 무인이었다. 상소룡의 행동을 싫어하는 자도 있었지만, 좋게 보는 자가 훨씬 많았다.
서로 눈치를 보던 둘이 동시에 기권하고 내려갔다. 구경꾼들은 내려가는 둘에게 야유했다.
'저 버러지들이 감히.'
완안덕명은 그 야유가 상소룡에게 향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더 밑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곧 벌어졌다.
"오른팔 가져가러 왔다."
상소룡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완안덕명 역시 갓 들어 올린 찻잔을 놓쳤다. 완안덕명 정도 고수가 실수로 찻잔 떨굴 일도 없고, 떨궈도 바닥에 닿기 전에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놀란 나머지 찻잔이 깨지게 그대로 놔뒀다.
"너는, 어떻게, 누구지?"
상소룡은 꿈인지 생신지 헷갈렸다. 독고경천이 자주 꿈에 나와 팔을 자르긴 하지만, 인간이 아닌 괴물 모습으로 등장했다. 게다가 그사이 시간이 거꾸로 흐른 듯 앳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검을 들어라."
상대는 거만한 말투로 상소룡에게 명령했다.
여유를 조금 찾은 상소룡은 목소리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비록 상대가 연월검을 들었고 얼굴도 독고경천과 흡사했지만, 상소룡은 상대가 독고경천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다.
'늘 비교당하며 살았는데 어찌 헷갈릴 수 있으랴.'
"누구냐?"
상대 몸에 흐르는 기운을 느꼈다. 굉장히 복잡한 경로로 빠르게 흐르지만, 내공은 적었다. 감각을 타고났지만 내공 익힐 체질이 아닌 자들이 저런 모습을 보였다.
"종남의 반도를 처리하러 왔다. 동문을 학살하고 기사멸조한 완안덕명과 그 졸개들은 어서 무릎을 꿇고 칼을 받아라."
상대가 채 말을 끝내기 전에 급히 검을 뻗었다. 피풍(披風)검법은 베기 위주의 검법으로 속도가 빠르면서도 검 끝의 변화가 다양했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은 애송이를 상대하기에 적합한 무공이다.
'전진교 무공을 알고 있다.'
상대가 너무 쉽게 피하자 상소룡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독고경천을 닮은 모습과 연월검에 평정을 잃은 상황에 억지로 기세를 끌어 올리느라 상대를 얕보는 마음이 생겨버렸다.
상대 검 끝이 오른쪽으로 향하다 왼쪽으로 급격히 꺾였다. 상소룡은 허겁지겁 검을 움직여 공격을 수비했다.
'현천(玄天)검은 나랑 사부만 익힌 검법인데 어찌 이자가?'
동장서망(東張西望)의 초식 다음으로 검향천산(劍向天山)의 초식이 이어지자 상소룡은 더욱 당황했다. 십수 년을 익힌 자신보다 상대 초식이 훨씬 정묘해 보였다.
'동장서망과 검향천산의 초식을 잇는 연결식(連結式)도 너무 자연스러웠어.'
초식을 펼치는 도중 다른 초식으로 넘어갈 때 연결식이 필요하다. 연결식이 자연스러울수록 상대는 초식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갑자기 바뀐 검식에 허둥댄다. 상소룡은 몰라서 당황한 게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당황했다. 상대의 초식 전환은 상소룡보다 더 자연스러웠다.
'검채화?'
검채화(劍采花)는 검으로 꽃을 딴다는 뜻이다. 내외공과 초식 숙련도 그리고 깨달음 어느 하나 부족한 게 없어야 펼칠 수 있는 현천검의 가장 어려운 초식이었다.
'피할 수밖에 없구나.'
상대의 공격이 더 빨라 반격할 수 없었다. 막으려 해도 검 끝의 변화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소룡이 그쪽으로 피할 줄 알았다는 듯이 상대 검이 정확히 쫓아왔다. 둘 다 자리를 옮기긴 했지만, 달라진 건 그것뿐이었다. 상소룡은 여전히 검채화 초식에 노려졌고 상황은 피하기 전보다 오히려 못했다.
'막아야 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상대의 보법은 상소룡보다 나았다. 검에 최대한 많은 내공을 실어 상대의 초식을 힘으로 파훼해야 한다.
그러나 상대 검을 막은 상소룡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리 내공이 약하다고 해도 어떻게 반탄력이 전혀 없지?'
곧 이어지는 앙망서천(仰望西天)의 초식에 상소룡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상대의 강대한 내공을 음양무계와 기성해로 분산한 잔월은 상소룡에게 반격 기회조차 주지 않는 공격을 이어갔다.
짧은 수련 기간 도만 잡았던 잔월이 검법으로 상소룡을 이긴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몸이 잘 움직여주는 덕분에 초식은 정묘하게 펼칠 수 있지만, 그걸로 상대를 살상하는 건 다른 문제다.
'검선께선 신통을 얻으셨을까?'
시킨 대로 현천검의 초식으로 압박하니 상소룡이 당황해 반응이 느려졌다. 상대에게 피하거나 막을 기회만 주고 반격 기회를 주지 않았다.
강한 내공을 상대가 아무렇지 않게 해소하니 상소룡은 당혹감이 점점 커졌다. 사부와 자신만 익힌 검법을 상대가 훨씬 정교하게 펼치고,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한 내공도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다.
'써야 하나?'
갈등이 심했다. 그러나 점점 빨라지는 상대의 초식 전환에 한가하게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쓰고 욕먹는 게 안 쓰고 죽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
'독고경천 상대하려고 준비한 건데.'
상소룡이 필요 이상으로 후퇴하며 왼팔을 들자 잔월은 속으로 탄복했다.
'독심호리 숙부 말대로다.'
궁지에 몰리면 상소룡이 왼쪽 의수에 있는 기관을 발동할 것임을 귀띔받았다. 잔월은 신속하게 월영팔법의 잔월을 펼쳤다.
철컥 소리와 함께 기관이 발동되었다. 그러나 십 년도 더 된 기관은 그새 노화하여 예상했던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 안에서 쏘아진 수십 개 침은 어느새 만월로 변한 잔월의 초식에 모조리 막혔다.
'섬전도(閃電渡).'
상대 암기를 막는 동시에 섬전도로 이동했다. 갑자기 사라진 잔월의 모습에 작은 경탄이 터졌다. 소리를 낸 자들은 둘의 공방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는 고수들이었다.
작은 경탄에 이어 비명이 섞인 큰 소리가 터졌다. 상소룡의 검을 잡은 오른팔이 바닥에 떨어져 펄떡거렸다. 왼팔의 나무 의수는 기관을 발동한 여파로 금이 갔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연월검을 검집에 넣은 잔월은 사방을 향해 포권했다.
"강호 동도들께 인사 올립니다. 독고경천의 아들 독고잔월이라고 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음모로 선고와 그 사형제들을 죽이고 억울한 누명까지 씌운 전진교의 반도 완안덕명과 상소룡 및 그 일당을 적발하고 문죄하려 합니다."
'쓰레기 같은 자식.'
잔월은 눈알을 굴리는 완안덕명을 보며 경멸을 금치 못했다. 자기 대제자가 팔이 잘려 고통에 몸부림치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도망쳐야 할까, 당장 여기서 판을 뒤집어야 할까?'
상소룡 덕분에 잔월의 실력이 상소룡보다 강한 게 아님을 알았다. 평범한 대련이고 상소룡이 평상심과 경각심을 유지했다면 열 번에 아홉 번은 상소룡이 이기는 싸움이었다.
마지막에 보여준 경공이 대단하긴 하지만, 빠르기만 하고 부드러움이 부족했다. 상소룡의 안목이라면 응당 피할 수 있었다.
'뒤에 누가 있을까?'
완안덕명은 잔월과 대결하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앞에 나선 저 소년이 전부가 아님을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남궁 가주께서 좋은 마음으로 무림대회를 개최하셨는데 소란을 벌여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완안덕명과 그 일당의 죄가 하늘에 사무치는데도 천하 영웅이 모이는 무림대회에서 거들먹거리는 걸 도저히 봐줄 수 없었습니다."
용문파 제자가 상소룡을 부축해 비무대를 떠났다.
"완안덕명은 외인을 끌어들여 동문인 검선과 그 제자를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제 부친에게 죄를 씌웠습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제 부친은 기사멸조의 죄인으로 만인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斬譬 팔을 잘라
問罪 죄를 알리다
- 작가의말
드디어 복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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